승무원 안정은(25)씨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밤이 되면 '스타'가 된다. 퇴근 후 예쁘게 화장 고치고, 승무원복 대신 다리에 쫙 달라붙는 러닝복으로 갈아입는다. 수원에 사는 그녀가 밤이면 향하는 곳은 멋쟁이 넘쳐나는 서울 압구정로데오역. 그곳에서 스포츠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러닝클럽 일행 40여명과 '접선'한다. 코치의 지도에 따라 압구정 한양아파트를 지나 한강변으로 연결되는 토끼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여남은 명씩 그룹을 지어 멀리 불 밝힌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나침반 삼아 반환점 청담대교를 돌아 줄지어 달린다. "강바람 맞으며 고층 빌딩 가득한 강남 야경 보고 뛰노라면 '런돌핀(런과 엔도르핀의 합성어)'이 샘솟는다니까요."
서울 상계동에 사는 초등학교 교사 최주진(27)씨는 토요일 오전마다 강남에서 열리는 한 스포츠 브랜드의 러닝클럽에 간다. 클럽에서 만난 같은 또래들과 강남 고층 숲을 가르며 달리는 매력에 푹 빠져 지난 겨울에는 인도네시아 발리까지 '달리기 여행'을 다녀왔다.
요즘 강남 여기저기 뛰는 여자들이 출몰하고 있다. 몸에 착 붙는 레깅스 입고 밤이 되면 무리 지어 압구정·반포·청담동 등 강남 도심에서 시작해 한강변을 뛴다. 새벽녘 팔 토시·선캡 무장하고 뛰는 중·장년 '동네 조깅족'과는 사뭇 다른 20~30대 '강남 야밤 러닝족'이다. 사는 동네는 제각각인데 오로지 달리려고 강남에 집결한다. 예쁜 외모로 인스타그램에서 '런스타('런'과 '스타'의 합성어)' '런예인('런'과 '연예인'의 합성어)'으로 불리는 스타 러닝족까지 등장했다.
달리기 빠진 20~30대 젊은 여성들
"아직은 5㎞ 달리고 있지만 최종 목표는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예요. 이왕 시작한 거 폼나게 뛰어야죠(웃음)." 지난 20일 저녁 압구정동에서 열린 한 러닝 클럽에 참가한 30대 여자 직장인이 웃으며 말했다.
과거 달리기는 여성들 사이에서 기피 운동 1호였다. 종아리 굵어진다, 가슴 작아진다, 얼굴 검어진다…. 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수두룩했다. 그러니 그간 한국 성인들에게 달리기는 곧 '조깅' 아니면 '마라톤'이었다. '러닝족' 성별은 대개 남자였으며, 연령대는 중·장년층, 장소는 집 근처 한강변이나 동네 한 바퀴 정도, 시간대는 새벽이 주를 이뤘다.
최근 '2030 강남 야간 러닝족'의 등장은 이런 한국인의 달리기 패턴을 뒤집는다. 20~30대 젊은 여성이고, 사는 지역 막론하고 강남으로 모이며, 퇴근 이후 저녁에 뛴다. "한 바퀴 뛰었으니 '입가심' 한잔해야지?" 뒤풀이하자 바람 넣는 사람도 없다. 깔끔히 뛰고, 깔끔히 헤어진다. 달리기 위해 모이고, 달리기를 위해 헤어진다.
젊은 여성이 달리기를 시작한 건 '건강한 여성'이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떠오르면서다. 무조건 마른 체형보다는 적당히 근육 있는 건강한 몸매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런 트렌드를 반영해 스포츠용품 회사들이 마케팅 차원에서 여성을 집중적으로 후원하면서 여성 러닝족이 증가했다는 분석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마라톤은 40~50대 남성이 주를 이뤘어요. 중년 남성은 마라톤 대회 나가도 대충 집에 있는 반바지 입고 나가지만 젊은 여성은 다르죠. 타이츠부터 브라톱, 헤어밴드까지 전부 갖춰 입고 나갑니다. 스포츠 브랜드들이 주요 소비층인 젊은 여성들 대상으로 러닝 프로그램, 멋진 무료 체험 공간을 만든 게 여성 러닝족에게 먹힌 것 같아요." 마라톤 기획사 '월드21HQ' 주상은 대표 얘기다.
멋지게 달리고 싶다… 강남 안 살아도 강남에서 뛴다
"강남에서 뛰는 사람들은 인스타그램 사진 수준이 달라요. 배경도 화려하고 패션도 돋보여 지방 러닝족 사이에선 강남에서 뛰는 게 꿈이지요." 울산에서 강남으로 달리기하러 '원정' 온 러닝족 김인경(24)씨가 말했다. 그녀처럼 강남 여성 러닝족 중엔 지방에서 일부러 올라오는 이들도 있다.
가까운 동네 놔두고 왜 굳이 강남에서 뛰는 걸까. 여성 러닝족에게 달리기는 '스포츠'인 동시에 '멋'이다. 멋지게 달리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배경 무대로 강남만 한 곳이 없다. 러닝복을 입고 명품 매장, 백화점 앞을 뛴다. 고층 빌딩 숲을 지난다. 달리기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에 유동 인구 많은 강남이라지만 행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들이다.
역동적인 도심이 색다른 '뛰는 맛'을 주기도 한다. 안정은씨는 "도심에서 뛰면 횡단보도, 도로 공사, 안전봉 같은 장애물이 있어 늘 주의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것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고 했다.
스포츠 브랜드, 강남 러닝족 잡기 경쟁
스포츠 브랜드들의 강남 러닝족 잡기 경쟁도 치열하다. 각 브랜드가 달리기 프로그램인 '러닝 클럽'을 앞다퉈 강남에 열면서 격전을 펼치고 있다.
나이키는 강남역 근처 강남점에서 러닝 클럽을 운영해 오다 올 초 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 바로 맞은편에 러너들을 위한 콘셉트 매장 '나이키 압구정로데오 러닝'을 새로 열었다. 아식스는 신논현역 근처 강남 직영점에서 러닝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 저녁 아식스 러닝 클럽이 열리는 날이면 강남대로를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러닝복을 갖춰 입은 젊은 남녀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준비 운동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지난 1월 한국에 진출한 언더아머는 전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초대형 매장을 나이키 강남점에서 불과 100여 m 거리에 열고 러닝 클럽 운영을 준비 중이다. 임다정 언더아머 홍보팀 매니저는 "서울의 상징인 강남은 유동 인구가 많고 20대 트렌디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브랜드로서는 매우 매력적인 장소"라고 했다.
뛰는 젊은 여성이 늘면서 러닝 클럽 코치도 여성이 대세다. 아식스는 국가대표 마라토너 출신의 권은주 감독이, 나이키는 14년 육상선수 경력의 아이린 코치가 러닝 클럽을 이끈다. 아이린 코치는 "요즘 들어 특히 20대 젊은 여성들 비중이 높다"며 "서울뿐 아니라 분당·수원 등 멀리서도 온다"고 했다.
'인증샷' 문화 타고 '런예인(런+연예인)'까지 등장
새 러닝 문화는 인스타그램, 힙스터(hipster·개성 있는 문화를 좇는 사람들) 문화 등 요즘 젊은 세대 문화와 만나면서 전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일단 쓰는 단어부터 다르다. 요즘 젊은 러닝족들은 '동호회'란 말 대신 '러닝 크루(crew·특정 일을 함께하는 무리)'라 부른다. '힙합 크루'와 어감이 비슷해 젊은이들에게 달리기가 색다른 문화로 다가간다.
국내 러닝 크루 모임을 선도하는 서울 강남 신사동의 'PRRC(Private Road Running Club)'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모임 '360사운즈' 멤버들이 모여 만든 러닝 모임. 360사운즈의 이진복(35) MC가 PRRC 설립자다.
"4년 전 뮤지션·아티스트·모델 등 지인들끼리 젊은 사람들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러닝 동호회를 만들자고 뭉쳤어요. 그전까지는 달리고 싶어도 부모님뻘 분들이 하는 동호회가 대부분이었죠. 등산 동호회처럼 주말 아침에 마라톤하고 술 드시는 분위기? 하하. 저희는 직장인들 편하게 평일 저녁에 만나 뛰어요."
현재 서울에만 러닝 크루 모임이 40여 개다. 강남, 홍대, 여의도, 광화문 등 젊은 층이 모이는 곳이나 직장인들 많은 곳으로 퍼지고 있다. 모임별 개성도 제각각이다. PRRC는 클럽이나 바를 빌려 파티를 열고 친목을 다진다. 삼청동길·반포대교 등지에서 주로 달리는 '크루 고스트'는 왕초보를 위한 모임. 조용히 왔다 사라지는 유령처럼 언제든 부담 없이 와서 실력을 쌓고 다른 러닝 모임으로 가라는 의미에서 모임 명이 크루 고스트다. '크루 러브'라는 신문화까지 생겨났다. 러닝 크루 모임들끼리 대회 때 서로서로 찾아가 응원해주는 것을 말한다.
'셀카' '인증샷' 찍기 좋아하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자신의 러닝 기록을 측정하고 인증샷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은 필수. 한 스포츠 브랜드는 전문 사진가를 고용해 사진을 잘 찍어준다고 입소문나면서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러닝 모임에 참여하는 여자들까지 생겨났다.
마라톤대회에서도 여성 러닝족을 겨냥해 여성들이 참여하기 쉬운 10㎞ 코스를 늘리고 있다. 다음 달 30일 열리는 '2017 서울하프마라톤'은 홈페이지(halfmarathon.chosun.com)를 통해 하프마라톤(21.0975㎞), 10㎞ 2개 부문에서 선착순 참가자 1만명을 모집 중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해 마포대로·마포대교·여의도·양화대교·상암월드컵공원 등 서울의 심장부를 누비며 달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