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던 마을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양재역사거리 일대 즉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이다. 말죽거리의 유래는 여러가지다. 하나는 제주도에서 올려 보낸 말을 서울로 보내기 전에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남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이나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이곳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인조 2년(1624) 갑자년 2월 8일에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가던 길에 창황히 양재역에 이르자 갑자기 기갈이 심하였다. 이때 유생 김이(金怡) 등 6·7명이 급히 팥죽을 쑤어 임금에게 바치니, 인조가 말 위에서 그 죽을 다 마시고 과천을 거쳐 공주로 갔으므로, 그 뒤부터 임금님이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명종 때 용하기로 소문난 점쟁이인 홍계관이란 사람이 있었다. 왕은 홍계관에 궤짝 속에 든 쥐가 몇 마리인지를 맞춰보라고 했고, 홍계관은 "세 마리"라고 답했다. 궤짝을 열어 보니 쥐가 한 마리뿐이자, 왕은 형관을 불러 홍계관의 사형을 명하였다.
홍이 끌려간 후 왕은 문득 쥐를 잡아다 배를 갈랐는데, 뱃속에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이미 홍계관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은 "아차!"하며 안타까워했다. 그 고개 이름을 아차고개, 산을 아차산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에서 과천시 과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의 경계가 되는 고개다. 여우고개·여시고개·야시고개·호현·엽시현·남현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렀다. 이 고개를 남태령으로 부르게 된 전설이 있다. 어느 해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으로 가는 길에 이 고개마루에서 잠시 쉴 때 고개 이름을 물었다. 이때 과천현 이방 변씨가 머리를 조아리며 "남태령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한 신하가 "이 고개 이름은 예로부터 여우고개라 하거늘 어찌 상감께 거짓으로 아뢰느냐"며 힐책하자, 변이방은 "본디 여우고개라고 하나 그런 요망스런 말을 감히 아뢸 수 없어 삼남대로로 통하는 첫 번째 큰 고개이므로 삼가 남태령이라 한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정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변이방을 칭찬하였으며 이 뒤부터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노량진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옛날에 이 일대는 인가가 없고 울창한 나무숲이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잊지 못해 화산(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으로 전배하러 가다가 이 지점에서 쉬면서,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자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자 장승을 세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장승이 세워졌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란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가는 길에 이 장승 앞에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고 한다.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에 속했던 법정리로서,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폐지되고 종전의 하품리 일원에 명품리와 주어리가 신설되었다. 명칭은 원래 품실 아래쪽에 있다 하여 아래품실 또는 하품곡(下品谷)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두룡리·고촌리(거재골)·주어(주예)를 병합하여 하품리라 명명하였다. 안두렁이·바깥두렁이·고촌리·윗주어·아랫주어 등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의 동쪽과 서쪽,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한 피난처라는 뜻의 보체라 불린다는 설이 있다. 마을에 산제당이 있고 만신이 많았는데, 만신을 찾는 병자들에게 몸을 보호하라는 뜻으로 기원문을 써 주며 마지막에 보체라 쓴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마을의 동쪽과 서쪽,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한 피난처라 전하여져 보체라 불린다고도 하고, 마을에 산제당이 있었고 만신이 많았던 마을로서 만신을 찾는 병자들에게 굿을 해주고 몸을 보호하라는 뜻으로 기원문을 써주면서 마지막에 보체라 쓴다고 하여 보체라 불린다고도 한다.
유방동이라는 이름은 유곡리와 방축리를 병합하여 유곡리에서의 '유'자와 방축리에서의 '방'자 각 한 글자씩을 따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마을에 있는 버드나무 밀림을 방패로 왜군과 교전하여 피해가 작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로 유방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사전
국립국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