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자존심이 이동했다, 명품 가방에서 주방가구로
"여기서 요리하고 싶다"... 강남 신흥 부유층의 홈파티 상징으로 떠올라
롯데타워 '시그니엘' '한남더힐 펜트하우스' 등에 사용된 하이엔드 명품 부엌
최초로 아일랜드형 식탁, 간결한 일체형 디자인으로 전 세계 부엌 문화 바꿔
◆ 남자는 자동차, 여자는 부엌가구로 자존심 세우는 시대
곧 출산을 앞둔 주부 이진희(서울 삼성동·34)씨는 최근 베이비 샤워(baby shower·출산을 축하하는 행사)를 집에서 치루면서 상당한 비용을 지불했다. 최근 유행에 맞춰 홈파티를 여는데 식탁과 식기까지 새로 맞췄기 때문. “마음 같아서는 벽지도 새로 도배하고 싶었어요. 예전에 배우 지성, 이보영 부부가 SNS에 올린 베이비 샤워 파티를 봤는데, 식기와 센터피스(식탁의 중앙 장식물) 등 파티 장식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지인들에게 집을 처음 공개하는 자리인만큼 저도 뒤처지고 싶지 않아서, 주방 가구도 새로 들이고, 조명도 바꾸고 신경을 꽤 썼었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잇백’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의 관심이 ‘집 꾸미기’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아무리 근사하고 값비싼 가방이라고 해도 상품 하나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걸까.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인테리어 및 생활소품 시장 규모는 12조5천억원으로 2008년(7조원)에 비해 70% 이상 커졌다.
흔히 하이엔드 럭셔리 문화의 화룡정점은 ‘리빙’이라는 말이 있다. 24시간 생활하는 삶의 공간 속에는 패션이나 자동차에서 짐작하기 힘든 라이프스타일과 생활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독특한 스타일의 현관 손잡이부터 실내 에스컬레이터까지 1% 상류층의 집은 인테리어 비용에만 강남 대형평수의 아파트 값이 넘게 소요되기도 한다.
고급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부엌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거실의 기능은 상실되어 가는 반면 부엌의 역할은 커지고 있기 때문. ‘호텔 같은 아파트’를 전면에 내세운 롯데월드타워 ‘시그니엘 레지던스’와 개포주공3단지 재건축 ‘디에이치 아너힐즈’의 주방 인테리어에 억대를 호가하는 독일 명품 브랜드 불탑(bulthaup) 제품이 사용됐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로 알려진 ‘한남더힐’ 펜트하우스에도 불탑 주방가구가 쓰였다.
◆ "부엌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소통하는 공간”
흔히 부엌은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손님이 오면 감추고 싶은 누추한 공간일 수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 부엌은 가족끼리 대화하거나 모임을 갖는 곳으로 거실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아이들이 아일랜드 테이블에 앉아 숙제를 부엌에서 하면서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와 소통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아이랜드를 처음으로 만든 브랜드가 바로 불탑이다.
불탑은 1985년 주방 가구 최초로 아일랜드를 선보이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대화, 게임, 독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주방을 탈바꿈시켰다. 아일랜드는 싱크대와 조리대를 따로 분리한 부엌 형태를 말한다. 섬(island)처럼 분리돼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아일랜드는 주방과 거실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없애주면서 아일랜드와 연계된 식탁, 소파, 바(bar) 등의 새로운 디자인까지 만들어냈다. 대면형 주방이나 아일랜드를 설치하기 어려운 좁은 평수에서도 일자형 주방에다 움직이는 선반을 달아 식탁 겸 작업대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마틴 불탑의 외손자이자 현 불탑 최고경영자(CEO) 마크 애커트는 과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불탑이 부엌을 재해석했다고 말한 바 있다. “부엌에서 실제 요리하는 시간은 20%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온 가족이 테이블에 한 데 모여 서로에 대해 묻고 대화를 하는 데 보내는 중요한 공간이죠. 불탑은 ‘머물고 싶은 부엌’을 지향합니다. 부엌이야말로 흩어진 방들과 거술을 하나로 묶어주는 ‘집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 메르세데스 벤츠, 포르쉐와 함께 독일 명품으로 꼽히는 불탑
1949년 독일인 마틴 불탑(Martin Bulthaup)이 설립한 불탑은 독일 내 명품 브랜드를 선정할 때면 자동차 브랜드인 메르세데스 벤츠, 마이바흐와 포르쉐 등과 함께 어김없이 상위에 이름을 올린다.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가방, 수트, 주얼리 등의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패션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면, 독일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능적인’ 제품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 배경에는 짧게는 6년, 길게는 12년 정도 한가지 기술을 연마하는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가 있다. 인간의 안전과 관련된 제조업의 경우 독일 회사는 무조건 마이스터를 고용해야 한다. 독일에는 현재 맥주 제조부터 기계, 금속 제련 등 총 350여 종의 마이스터가 있다.
이 때문에 독일의 벤츠와 불탑 모두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최고를 자랑한다. 불탑의 ‘시스템 B3’의 경우 주방가구 처음으로 판넬 두께가 10mm 미만으로 얇아 졌다. 타 주방가구 업체들의 판넬 두께가 18mm이상인 것에 비하면 슬림하고,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주방가구 중 유일하게 ‘벽걸이’형를 시도했다. 기존의 주방 가구들이 반드시 벽을 따라 설치됐다면 ‘시스템 B3’은 벽에 레일을 장착해 걸 수 있다. 역시 벽판넬(가벽)에 레일을 설치해 걸 수도 있는데, 1톤 정도의 무게도 걸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불탑 전시관 직원은 “원하는 장소 어디에나 벽판넬을 세워 걸 수 있음으로써 한정된 ‘주방 공간’에서 탈피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동적인 제품 구성은 가구업계의 고정관념을 깬 것이기도 하다. 흔히 시스템키친(준비대, 개수대, 조리대, 가열대, 배선대 등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붙박이형 부엌가구)은 붙박이장처럼 한번 설치하면 그만이지만, 불탑은 원하는 품목만 사거나 다른 회사 제품과도 조화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무실, 시골집 어디에든 불탑 제품을 설치할 수 있고 이사갈 때는 옮겨갈 수 있으며 동양의 골동품, 미니멀한 현대식테이블 등 그 어느 것과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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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했던 '앤틱'의 시절은 가고 모던한 스타일의 하이엔드 인테리어의 시대
국내에 하이엔드 리빙문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건 1988년 이후다. 성북동, 평창동, 한남동 넓은 평수의 대형주택이나 빌라를 중심으로 클래식하고 앤틱(antic)한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주를 이뤘다. 수입대리석과 무거운 톤의 원목 바닥재에 고풍스러우면서 화려한 샹젤리제 조명은 기본이었다. 지금도 드라마에서 많이 재현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평창동 재벌가’는 이 시기 유행하던 클래식 스타일을 보여준다.
2000년대 들어오며 신흥 부자가 증가하며 강남을 중심으로 고급빌라와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섰다. 비슷한 시기에 불탑, 보피, 폭앤폴 등 글로벌 명품 리빙브랜드들은 제한된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도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을 활용한 모던한 디자인의 인테리어 트렌드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분양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특히 일부 주상복합의 펜트하우스를 중심으로 모던한 스타일의 하이엔드 인테리어 트렌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보수적이던 평창동 등 전통적인 부촌에도 천편일률적인 클래식 인테리어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습의 리뉴얼이 시작됐다.
불탑의 김도균 과장은 “2000년대 들어선 주상복합도 비록 높은 분양가를 형성하고 있지만 맞춤형 하이엔드 인테리어가 들어서기는 부족한 수준이었다”라며 “입주자가 원하는 대로 인테리어를 꾸미는 ‘누드분양’이 가능한 펜트하우스를 제외하고는 분양을 받자마자 인테리어를 뜯어내고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재시공하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