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內 외톨이 여주인공 위로하던 서정적 선율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와 포크송
최근 개봉한 헝가리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감독 일디코 엔예디)는 올해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도축장 검사원인 여주인공 '마리아'(알렉상드라 보르벨리)는 상대방과의 대화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외울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감정 표현이나 신체 접촉에는 지극히 서툴러 직장에서도 언제나 외톨이 신세다. 그가 인간 관계나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적마다 영화에서는 서정적이면서도 음울한 포크송이 흐른다. 영화에서 주제가처럼 나오는 이 노래는 무슨 곡일까.
1990년생 영국 여성 포크 가수이자 작곡가 로라 말링(Laura Marling)의 2010년 음반 수록곡 '그가 쓴 것들(What He Wrote)'이다. '날 여기서 잊어줘.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혀가 잘렸어. 할 말이 없지. 날 사랑한다고? 오, 그는 날 내던졌어. 그는 내 잘못을 비웃었지'라는 노랫말은 사뭇 극단적으로 들린다.
어른스러운 가사와 노래도 놀랍지만, 더욱 충격적인 건 말링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나이가 만 19세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엔예디 감독은 "말링은 눈사태 같은 힘과 응집력, 섬세함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도 음악의 힘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그녀가 여주인공을 맡았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다"고 말했다.
말링은 녹음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영국 명문가의 딸이다.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기타를 배웠고, 아버지가 좋아했던 1960~1970년대 포크 음악의 매력에 눈떴다. 말링은 유년기에 대해 "나이에 걸맞은 장르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축복이자 저주였다"고 회고했다. 10대 후반부터 인디 그룹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8세에는 데뷔 음반을 냈다. 조숙(早熟)도 지나치면 병이라고 할까.
여주인공 마리아가 사랑과 죽음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적마다 말링의 노래가 반복해서 흐른다. 영화는 꿈을 통한 교감이라는 생경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소통 가능성과 단절에 대해 진지하게 되묻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 품격을 지니고 있다.
'북유럽 신화' 모티브로 한 로큰롤과 수퍼 히어로
영화 '토르'와 레드 제플린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가 개봉 10일 만에 관객 320만명을 돌파하면서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영화 첫 장면과 후반에는 남성 록 보컬리스트의 폭발적인 고음이 주제가처럼 반복해서 흐른다. 록 그룹 레드 제플린의 1970년 히트곡 '이미그랜트 송(Immigrant Song)'이다. 수퍼 히어로 영화에 흘러간 로큰롤 명곡이 나온 이유는 뭘까.
이 곡은 레드 제플린이 1970년 여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공연할 당시에 작곡했다. 당시 아이슬란드에서 공무원 파업이 일어나는 바람에 공연도 무산될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한 대학에서 강당을 공연장으로 내줘서 무사히 공연은 열렸다. 아이슬란드에 체류할 당시, 밴드가 북유럽 신화와 바이킹의 정복 등을 주제로 만든 노래가 이 곡이다. 그래서 가사에도 북유럽의 흥취가 넘친다. '우리는 얼음과 눈의 나라에서 왔지. 온천이 흐르는 백야의 땅, 신들의 망치, 우리는 새로운 땅을 찾아 배를 띄우지. 무리와 맞서 싸우고 노래하고 외치네. 발할라. 내가 왔노라!'
흥미로운 건, 수퍼 히어로 '어벤져스' 군단 가운데 유일하게 북유럽 신화에서 유래한 주인공이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라는 점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토르는 레드 제플린의 노래에도 나오는 망치를 들고 적들을 물리치는 수호신이었다.
토르의 아버지인 '오딘'(앤서니 홉킨스)은 북유럽 신화의 주신(主神)으로 보탄으로도 불린다. 여전사 '발키리'는 죽은 전사들을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 임무를 맡고 있다. 북유럽 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전쟁과 세계의 종말이 영화의 부제인 '라그나로크'다.
영화 '토르'에서 레드 제플린의 이 곡이 흐르는 건, 북유럽 신화를 공통 분모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유 있는 선곡이었던 셈이다. 북유럽의 신들은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영화 끝난 뒤, 작곡가가 화장실로 달려간 까닭은
'스코어'와 영화 음악… 관객 흥얼거림에서 반응 살펴
1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스코어: 영화음악의 모든 것'(감독 맷 슈레이더)은 제목처럼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음악가는 말 그대로 영화에 쓰이는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한다. 이 때문에 녹음 스튜디오에 틀어박혀서 작업할 뿐, 무대에 올라와서 관객과 소통할 기회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영화 음악가들은 자신이 작곡한 음악에 대한 반응을 어떻게 확인할까.
이 다큐멘터리에는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아이언맨3'의 음악을 맡았던 작곡가 브라이언 타일러(45)의 일화가 나온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반응이 궁금하면 영화관에 달려가 맨 앞줄 좌석에 앉는다고 한다. 다른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타일러는 고개를 돌려서 관객들의 표정을 몰래 지켜본다는 것이다. 그는 "들키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은 관객과 정면으로 눈빛이 마주치기도 한다"면서 "그럴 때는 머쓱해서 영화관을 나온다"고 했다.
영화관에서 타일러가 들르는 곳은 또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영화가 끝난 뒤 화장실에서 주제곡이나 삽입곡을 흥얼거리는 관객이 많을수록 정서적 공감대가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실제로 관객들이 흥얼거리는 경우가 많으면 누군가 등을 토닥여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영화음악가들은 소리의 탐구자들이기도 하다. 방 5개에 가득 찰 만큼 온갖 악기를 수집하고 작업한 뒤, 모두 내다 버렸다가 다시 채우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집 덕분에 영화 '록키'와 '007 시리즈'처럼 듣기만 해도 곧바로 장면이 떠오르는 선율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악(惡)의 제국에 맞선 제다이 기사들의 활약상이 소개되는 '스타워즈'의 첫 장면이나 외계인을 태운 소년 엘리엇의 자전거가 밤하늘을 날아가는 'E.T.'에서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없었다면 우리가 그토록 감동했을까. 그런 의미에서 작곡가는 감독의 연출 의도를 음악으로 구현하는 '영화의 단짝'인 셈이다.
'어깨뽕'에 브레이크댄스… 부모세대의 추억을 담다
영화 '슈퍼배드3'의 1980년대 팝송
최근 330만 관객을 넘어선 미국 애니메이션 '슈퍼배드3'의 더빙판에서는 친숙한 팝송을 엉터리 우리말 가사로 옮겨서 부르는 코믹한 장면이 나온다. 악당 '브래트'가 에어로빅 방송을 보면서 따라 부르는 대목이다. 1970~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 올리비아 뉴턴 존(68)의 1981년 히트곡 '피지컬(Physical)'이다. 기성세대라면 '렛 미 히어 유어 바디 토크'를 '웬일이니 파리똥'으로 바꿔 불렀던 추억이 있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에서 추억의 1980년대 팝송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애니메이션에서는 1980년대 아역 스타로 인기를 누렸지만 그 뒤 할리우드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앙심을 품게 된 악당 '브래트'의 주제가로 쓰인다. 브래트는 1980년대 팝송을 흥얼거리면서 화려했던 전성기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브래트는 분홍색 대형 다이아몬드를 훔치러 갈 때도 마이클 잭슨의 '배드(Bad)'를 틀어놓고 뒷걸음질 치는 '문워크(moonwalk)' 동작을 선보인다. 실제로 '문워크'는 마이클 잭슨이 '빌리 진'에서 선보였던 춤 동작이다. 브래트가 주인공 그루를 향해 건반악기로 전자빔을 발사할 때에도 1980년대 미국 록 밴드 밴 헤일런의 경쾌한 '점프(Jump)'가 흘러나온다.
아이들과 함께 극장을 찾은 부모들에게도 이 음악들은 추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브래트가 속칭 '어깨 뽕'으로 불리는 패드를 잔뜩 넣은 촌스러운 패션으로 브레이크댄스를 출 때 부모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옛 추억에 젖어들 수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만 보는 만화영화라는 것도 옛말이다. '슈퍼배드3'에 등장하는 어른과 아이들이 서로 다른 모험을 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어른과 아이 관객들도 각각 다른 감흥에 젖어들게 된다. 애니메이션에서 음악은 관객층을 넓히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들을 날려버려" 거침없는 힙합 전쟁
영화 '올 아이즈…'와 디스戰
24일 개봉하는 '올 아이즈 온 미(All Eyez On Me)'는 25세에 총격으로 요절한 미국의 힙합 가수 투팍(1971~1996)의 음악과 삶을 그린 영화다. 영화 제목은 투팍이 숨을 거두기 전에 발표한 음반명이자 수록곡의 이름이다.
영화에서 투팍은 동료 힙합 가수인 노토리어스 B.I.G.(1972~1997)를 '돼지 녀석'이라고 부른 뒤, 원색적으로 비난을 퍼붓는 곡인 '그들을 날려 버려(Hit 'em Up)'를 무대에서 부른다. "그 머저리들 앞에 총을 들이대, 송장으로 만들어"라는 노랫말은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다. 영화를 보면서 드는 의문 하나. 힙합에는 왜 그렇게 상대방에 대한 험담이나 욕설이 많은 걸까.
힙합에서 상대를 비난하거나 야유하고 조롱을 퍼붓는 행위를 '디스'라고 부른다. 경멸이나 무례를 뜻하는 '디스리스펙트(disrespect)'에서 유래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힙합 음악인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노래들을 발표하면 '디스전(戰)이 벌어졌다'고 한다.
실제 투팍은 1990년대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힙합 음악인, 노토리어스 B.I.G.는 동부의 간판 래퍼였다. 활동 초기에 이들은 선의의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1994년 투팍이 녹음 스튜디오 앞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총 5발을 맞는 사고를 당한 뒤, 노토리어스 B.I.G.가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결국 둘은 서로를 향해 살벌한 '디스곡'을 발표했다.
흑인 거리 문화의 산물인 힙합은 가사 위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과격하거나 급진적인 내용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갱단의 패거리 문화가 결합하면서 강한 척 으스대거나 상대를 깎아내리는 가사들이 넘쳐났다. 이런 공격적 랩을 '갱스터 힙합'이라고 부른다. 결국 투팍은 1996년, 노토리어스 B.I.G.는 이듬해 모두 의문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음악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목숨까지 내건 '힙합 전쟁'이 일어났던 셈이다.
경쾌한 디스코 리듬과 함께 1980년으로 들어가다
영화 '택시운전사'와 조용필 단발머리
관객 700만명을 돌파한 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의 첫 장면에서 택시운전사 '김만섭' 역의 송강호는 조용필의 히트곡 '단발머리'를 부른다. 택시 운전사를 상징하는 노란 셔츠를 입은 김만섭이 초록색 브리사 택시 안에서 흥얼거리는 이 노래는 1980년 5월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왜 조용필의 수많은 히트곡 가운데 이 곡이었을까.
조용필이 지구레코드로 음반사를 옮긴 뒤 1980년 발표한 정규 1집 음반에 실린 곡이 '단발머리'다. 당시에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만 음반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단발머리'의 심의 번호는 '8003-2380'이다.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가면 1980년 3월에 심의를 갓 마친 따끈한 신곡이라는 뜻이다.
이 곡은 뿅뿅거리는 전자 음향과 신나는 디스코 리듬, 가성(假聲)을 섞어서 첫 소절을 시작하는 역발상까지 당시 기준에서 모든 점이 파격이고 참신했다. '창밖의 여자'의 구성진 단조 발라드와 '한오백년'의 전통 민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트로트뿐 아니라 가볍고 경쾌한 댄스 음악까지 소화할 수 있는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걸 입증한 곡이다.
영화에서도 경쾌하고 발랄한 도입부의 분위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한다. 장훈 감독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시대 속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나리오 단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조용필씨가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이 곡은 당시 또 다른 히트곡인 혜은이의 '제3한강교'와도 짝을 이룬다. 김만섭은 독일 방송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를 손님으로 태우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그 뒤 순천으로 먼저 나온 김만섭은 택시 안에서 '제3한강교'를 끝까지 따라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위기서도 기품 잃지 않는… 영국을 닮은 선율
영화 '덩케르크'에 흐르는 엘가
1940년 영불(英佛) 연합군 40만명이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되자, 영국의 어선과 요트, 낚싯배 등 민간 선박들이 무사히 연합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도버 해협을 건넌다. 천신만고 끝에 됭케르크 해안에 도착한 선박들을 바라보던 '사령관'(케네스 브래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 후반 장면이다. 여기서 잔잔하면서도 따스한 관현악 선율이 흐른다. 과연 어떤 음악일까.
영국의 '국민 작곡가'로 꼽히는 에드워드 엘가(1857~1934)의 '수수께끼 변주곡' 가운데 '님로드(Nimrod)'다. 엘가는 작곡가인 자신과 아내, 지인을 주제로 한 곡씩 선율을 쓴 뒤 곡명으로 영문 이니셜이나 별명을 붙였다. 아내 캐럴라인 앨리스 엘가는 머리글자를 따서 'C.A.E'라고 짓는 방식이다. 이렇게 15곡을 작곡한 뒤 엘가는 '수수께끼 변주곡'이라는 이름으로 모아서 발표했다.
이 가운데 9번째 변주곡인 '님로드'는 작곡가의 친구인 출판업자인 어거스트 재거를 위해서 썼다. 독일어로 그의 성이 '사냥꾼'을 뜻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전설적 사냥꾼의 이름을 붙였다.
작곡을 포기할까 고민하던 엘가에게 재거는 청력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걸작을 쏟아낸 베토벤을 언급하며 격려했다고 한다. 당시 엘가를 위로하면서 재거가 흥얼거렸던 선율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의 유명한 2악장이었다. 엘가는 이 선율에서 착상해 '님로드'의 도입부를 작곡했다.
이 곡은 따뜻하기 그지없는 현악 선율 덕분에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같은 공식 행사와 추모 음악으로도 즐겨 연주된다. 서울시향의 상임 지휘자로 재직했던 러시아의 마르크 에름레르가 2002년 연주회를 앞두고 급작스럽게 타계하자, 당시 악단이 추모곡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인간은 고귀한 희생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낙관적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결코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은 엘가의 선율만큼이나 지극히 영국적이다.
첫사랑과의 첫 키스처럼 달콤한 떨림
첫사랑과의 첫 키스처럼 달콤한 떨림
일곱 살에 첫사랑과 첫 키스를 하는 게 가능할까. 7년 만에 국내에서 '지각 개봉'한 '플립'(감독 롭 라이너)은 성장 영화에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솜씨 있게 담아낸 영화다. 청소년 성장물이란 점에서는 감독의 이전 작품인 '스탠 바이 미'(1986)와 닮은꼴이고,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라는 점에서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와 공통점이 있다. 이 같은 매력 덕분에 '플립'은 12일 개봉 당일, 일일 흥행 성적 3위(1만4000여 명)에 올랐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 '브라이스'(캘런 매콜리프)는 소녀 '줄리'(매들린 캐럴)가 좋아하던 플라타너스 묘목을 소녀의 집 정원에 함께 심는다. 이 운치 있는 결말에서 미국 형제 듀오 에벌리 브라더스의 감미로운 발라드가 흐른다. 과연 어떤 곡일까.
에벌리 브라더스의 1960년 히트곡 '렛 잇 비 미(Let It Be Me)'다. 돈 에벌리(80)와 필 에벌리(1939~2014) 형제로 구성된 에벌리 브라더스는 1957년 데뷔 이후 미국 백인 음악인 컨트리에 감미로운 팝 발라드의 색채를 입힌 곡들로 사랑받았다.
영화에서 줄리가 "에벌리 브라더스 가운데 누구와 결혼하는지가 문제"라고 고민할 만큼, 당시 소녀 팬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영국 출신의 비틀스도 활동 초기에는 '영국의 에벌리 브라더스'라고 자칭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에벌리 브라더스는 형제간 누적된 갈등으로 1973년 해산했지만, 1983년 재결합했다. 당시 동생 필은 "포옹 한 번으로 덮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렛 잇 비 미'는 프랑스 샹송이 원곡이다. 에벌리 브라더스가 '당신을 만난 날을 축복해요. 당신 곁에 있기를 간절히 원하니, 제발 허락해줘요'라는 달콤한 영어 가사로 리메이크한 뒤 엘비스 프레슬리와 밥 딜런도 앞다퉈 부를 만큼 사랑받았다. 영화에서 이 노래는 정겹고도 소박한 1960년대 초의 시대상을 묘사하는 동시에 소년과 소녀의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옥자 찾아 달리는 산골 소녀의 戀歌
'옥자'와 존 덴버의 '애니의 노래'
영화 '옥자'(감독 봉준호)에서 슈퍼 돼지 옥자를 미국 뉴욕으로 데리고 가려는 다국적기업의 음모에 맞서 동물보호 단체(ALF)는 옥자 구출 작전에 나선다. 검은 복면을 쓴 ALF 회원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옥자가 서울 도심의 지하상가를 질주하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슬로 모션(slow motion)으로 장면이 바뀌더니 미국 팝 가수 존 덴버(1943~1997)의 미성(美聲)이 흐른다. 이 노래는 어떤 노래이고, 왜 이 장면에서 나왔을까.
국내에서도 심야 라디오의 애청곡으로 사랑받았던 1974년 존 덴버의 발라드 '애니의 노래(Annie's Song)'다. 존 덴버는 '시골 길, 고향으로 데려가 주오(Take Me Home, Country Roads)'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불렀던 '아마도 사랑은(Perhaps Love)' 같은 곡으로 유명한 미국 팝 가수다. '애니의 노래'는 존 덴버가 당시 아내 애니를 위해서 쓴 곡이다.
콜로라도의 스키장 리프트에 앉아서 10여 분 만에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숲속의 밤처럼, 봄철의 산처럼, 빗속의 산책처럼, 사막의 폭풍처럼, 평온한 푸른 바다처럼 당신은 내 마음을 채우네"라는 노랫말은 존 덴버의 목소리만큼이나 감미롭다. 지금 들어보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2악장의 호른 선율과도 살짝 닮은 구석이 있다. 1967년 결혼한 이 부부는 1982년 이혼했다. 훗날 애니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성공이 불화의 원인이 됐다고 회고했다.
봉 감독은 개봉 직전 인터뷰에서 "형이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카세트테이프로 즐겨 들었던 노래"라며 "촬영 단계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편집 과정에서 이 노래를 사용하고 싶다는 장난기가 발동했다"고 말했다.
"검은 복면을 쓴 동물 보호 단체의 낭만적 행동과 감미로운 노래의 분위기가 잘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연가(戀歌)는 옥자를 구하기 위해 뉴욕까지 달려가는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의 지고지순한 마음을 표현하는 역할도 한다.
구슬픈 선율 따라 감정의 절정으로
영화 '맨체스터…' 속 아다지오
형의 사망 소식을 접한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매사추세츠의 해안가 고향으로 향한다. 지난 2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받은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첫 장면이다.
형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홀로 남게 될 고교생 아들의 후견인으로 동생 리를 지명해 놓았다. 하지만 형의 유언장을 읽은 리는 곤혹스러움에 빠진다. 형의 변호사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는 듯 따스하게 위로한다. 감춰져 있던 가족사가 드러나는 이 장면에서, 구슬픈 단조의 오르간 독주와 현악 합주가 서서히 흐른다. 과연 어떤 곡일까.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토마소 알비노니(1671~1751)의 곡으로 알려진 '아다지오 G단조'다. 처연한 정서를 지니고 있어서 영화 '플래시 댄스'와 '도어즈(The Doors)'에도 사용됐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전반적으로 음악을 절제하는 편이지만, 비극적인 절정 장면에서 이 선율을 삽입해서 감정적 진폭을 극대화한다. '아다지오'가 흐르는 가운데 경찰 조사에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리는 끔찍한 결심을 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만다.
흥미로운 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로 불리는 이 곡의 원작자는 따로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이탈리아 음악학자이자 작곡가인 레모 자조토(1910~1998)는 1958년 독일 드레스덴의 도서관에서 알비노니의 미완성 악보를 입수했으며, 그 악보를 바탕으로 '아다지오'를 편곡했다고 주장했다.
알비노니의 전기를 집필했던 그는 이 곡에 '토마소 알비노니 주제의 현악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정작 미완성 악보 원본은 공개하지 않아서 궁금증을 자아냈다. 현재 음악학자들은 알비노니가 아니라 자조토의 곡이라고 추정한다.
누구의 곡이 됐든 이 작품은 바로크풍의 기품과 구슬픈 정서를 머금고 있어 영화와 드라마 등에 널리 사용되면서 사랑받았다.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이나 록 그룹 뮤즈도 이 선율을 편곡해서 자신의 곡에 사용했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神의 노래… 마음의 빈 곳 채우네
영화 '오두막' 과 포크가수 닐 영
막내딸이 유괴당한 뒤 고통에 시달리던 '맥 필립스'(샘 워싱턴)는 어느 날 의문의 초대장을 받는다. 편지에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있을 예정이니 만나고 싶으면 찾아와요'라는 구절만 적혀 있다. 문제는 이 오두막이 딸의 혈흔이 발견됐던 사건 현장이라는 점이다. 맥은 범인을 만날지 모른다는 복수심에 권총을 들고 간다. 하지만 오두막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파파'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신(神)이다. 국내에서도 100쇄 이상 발행된 윌리엄 폴 영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두막'의 초반부다.
이 영화에서 '파파'가 아침 식사를 차리는 평범한 흑인 중년 여성(옥타비아 스펜서)으로 묘사된다는 점도 이채롭다. '파파'는 식사를 차리면서도 닐 영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맙소사, 하나님이 닐 영의 팬이었다니. 무슨 곡이고, 어떤 이유로 이 노래를 골랐을까.
영화에서 '파파'가 부르는 닐 영의 노래는 '오직 사랑만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지(Only Love Can Break Your Heart)'다. 캐나다 가수이자 작곡가인 영은 1968년 포크 록 그룹인 '크로스비 스틸스 앤드 내시'에 가입했다. 영의 합류 이후 그룹 이름도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드 영(Crosby, Stills, Nash & Young)'으로 길어졌다. 이 밴드는 1960~1970년대 포크와 컨트리, 로큰롤 등 다양한 장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랑의 상처와 상실감을 담은 이 노래는 닐 영이 동료인 그레이엄 내시를 위로하기 위해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내시는 여가수 조니 미첼과 2년여간 교제했지만 결별했다. 가사도 "네 세상이 모두 무너져 버린다면?" 같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이 상실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맥은 '파파'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나쁜 습관이 있다"고 절규한다. '파파'는 그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위로한다.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영화의 묘사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지만, 죄 없는 사람이 왜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신정론(神正論)'에 대한 따스한 우화로 볼 만하다.
SF 영화 빛낸 7080 추억의 팝송
영화 '가디언즈…'와 올드 팝
그루트는 최근 개봉한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감독 제임스 건)에 등장하는 나무 종족의 이름이다. 1편에서는 거목(巨木)에 가까웠지만, 반대로 2편에서는 나뭇가지 크기의 귀여운 꼬마 나무로 변했다. 이번 속편의 첫 장면에서 다른 동료들은 괴물과 힘겹게 싸우는 동안에도, 그루트는 흥겨운 음악을 틀고 스피커 앞에서 앙증맞은 춤을 추느라 여념이 없다. 한 편의 유쾌한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첫 장면에서 흘렀던 음악은 무슨 곡이었을까.
1970~1980년대 인기를 누렸던 영국 록 그룹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의 1978년 곡 '미스터 블루 스카이(Mr. Blue Sky)'다.
'미스터 블루 스카이'는 ELO에서 보컬과 기타, 베이스와 첼로, 드럼과 작곡까지 두루 소화했던 만능 음악인 제프 린의 곡으로 비틀스 스타일의 밝고 경쾌한 로큰롤로 편곡했다. 제프 린은 영국 라디오 인터뷰에서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짙게 깔린 스위스 별장에서 2주간 한 곡도 쓰지 못하다가, 갑자기 햇살이 비치고 알프스의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지자 그다음 2주 동안 이 곡을 포함해 14곡을 연달아 작곡했다"고 말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1970~1980년대 올드 팝을 적재적소에 활용해서 사운드트랙(OST)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인공 '피터 퀼'(크리스 프래트)의 외계인 아버지와 지구인 어머니가 만나는 초반 장면에서 흘렀던 1970년대 미국 팝 그룹 '루킹 글라스(Looking Glass)'의 히트 곡 '브랜디(Brandy)'가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피터 퀼은 어머니의 유품인 워크맨으로 흘러간 옛 노래를 듣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은하계(Galaxy)를 지키는 수호자들(Guardians)의 활약을 만화적으로 묘사한 SF 장르인데도 1970~1980년대 팝 음악들이 흐르다 보니 복고풍의 독특한 매력이 넘친다.
선율 속에 숨어있는 오싹한 反轉의 힌트
영화 '에이리언…'과 바그너
최근 개봉한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감독 리들리 스콧)의 첫 장면에서 '피터 웨일랜드'(가이 피어스)는 인공지능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에게 피아노 연주를 청한다. 웨일랜드는 인공지능 개발 회사의 설립자이자 회장. 인공지능 데이비드가 연주하는 곡은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가운데 1부 '라인의 황금'에서 신들의 발할라(Valhalla) 입성 장면이다. 발할라는 무엇이고, 왜 영화에서 바그너의 선율이 흘렀던 걸까.
발할라는 북유럽 신화에서 전사한 영웅들의 영혼이 들어가는 신전을 일컫는다. 영웅들의 '국립묘지'인 셈이다. 독일어로는 발할(Walhall)이라고 한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나흘간 공연하는 데 20시간 가까이 걸리는 대작이다. 이 오페라를 쓰면서 바그너는 '유도 동기(Leitmotiv)'라고 불리는 독특한 작법(作法)을 도입했다. 등장인물이나 장소, 소도구와 사건 등에 일종의 주제 음악을 붙이는 방식이다.
듣는 사람은 이 선율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누가 무대에 등장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유추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영화 '스타워즈'에서 악당 다스 베이더가 등장할 때마다 기분 나쁘게 울려 퍼지던 금관 팡파르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영화 초반에서 신들이 발할라에 입성할 때 흐르던 선율은 웨일랜드가 사실상 자신을 창조주라고 여기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 선율은 생존한 승무원들이 잠드는 모습을 인공지능이 지켜보는 영화 종반에 다시 한 번 흐른다. 여기서 과연 누가 전사한 영웅이 되고, 누가 신의 반열에 오르려는 걸까. 때로 영화는 음악만으로도 오싹한 반전(反轉)을 암시한다.
몸짓은 우아했지만 삶은 '헤비메탈' 같았다
다큐 '댄서'의 '아이언 맨'
최근 개봉한 '댄서'는 영국 로열 발레단 최연소 수석 무용수였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27·사진)의 삶과 예술 세계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폴루닌은 2006년 로잔 콩쿠르 우승을 거두고 19세 때인 2009년 로열 발레단의 최연소 수석 무용수로 승승장구한다. 강력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폴루닌의 별명은 '우아한 야수'. 그런데 이 다큐의 도입부는 아름다운 발레 음악이 아니라 무겁고 암울한 헤비메탈로 시작한다. 무슨 곡이길래 이 음악을 사용한 걸까.
육중한 전자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노래는 영국 록 그룹인 블랙 사바스의 '아이언 맨(Iron Man)'이다. 1968년 결성한 블랙 사바스는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 등과 함께 하드록과 헤비메탈 같은 록 음악의 장르를 탄생시킨 개척자로 꼽힌다. 블랙 사바스는 활동 중단과 멤버 교체 같은 위기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올해 결성 50주년을 맞은 전설적인 밴드다.
발레리노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가 정작 헤비메탈로 시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크라이나 평범한 가정 출신의 폴루닌은 13세 때인 2003년 영국 로열 발레 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돌보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지만, 다른 가족들은 폴루닌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할머니는 그리스 양로원에서 일했고, 아버지는 포르투갈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폴루닌은 "다른 아이들보다 2배는 연습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판 빌리 엘리어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아이 교육 때문에 떨어져 살았던 그의 부모는 폴루닌이 15세 되던 해에 결국 이혼했다. 어머니의 혹독한 교육 방침에 반발한 폴루닌은 우울증과 약물 투약, 과도한 문신, 동료들과의 불화로 논란을 몰고 다녔다. 결국 2012년 폴루닌은 로열 발레단을 박차고 나와 러시아로 돌아갔다. 무겁고 암울한 헤비메탈은 폴루닌의 반항적 성격과 평탄하지 않은 삶을 일러주는 전조(前兆) 역할을 한 셈이다. 다큐에서 가장 놀라운 건, 그가 아직 20대라는 점이다.
빌뇌브와 스코세이지 감독이 사랑한 선율
'컨택트'의 슬픈 현악합주 '셔터 아일랜드' 등 여러 편에 흘러
영화 '컨택트'(감독 드니 빌뇌브)에서 언어학자 '루이즈'(에이미 애덤스)는 불치병으로 아이를 떠나보낸 뒤 슬픔에 빠져 있다. 이 첫 장면에서 처연한 단조풍의 현악합주가 서서히 흐른다. 여주인공의 상실감을 대변하는 듯한 이 선율은 시공간의 거대한 반전이 일어나는 영화 종결부에 다시 나온다.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본 것처럼 친숙한 이 선율은 무슨 곡일까.
영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막스 리히터(51)의 '온 더 네이처 오브 데이라이트(On the Nature of Daylight)'라는 곡이다. 리히터는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한 뒤 오페라와 발레, 영화음악 등을 넘나들면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 곡은 2004년 리히터의 두 번째 음반에 실렸다. 그는 "이라크 전쟁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무기력감을 느꼈고 폭력에 대한 항의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반전(反戰)과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은 이 곡의 운명에 반전(反轉)이 찾아온 건 2010년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셔터 아일랜드'에 삽입된 것이다. 존 케이지와 리게티, 펜데레츠키의 현대음악으로 가득한 이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가수 디나 워싱턴(1924~1963)의 걸쭉한 블루스 음성과 함께 이 곡이 흘렀다.
그 뒤에도 '디스커넥트'(2012), 최근 국내 개봉한 폴란드·프랑스 합작 영화 '아뉴스 데이' 등에서 이 음악이 사용됐다. ▷기사 더보기
25년이 지났어도... 가슴 뭉클한 사랑의 세레나데
'미녀와 야수' 주제가
마을 처녀 '벨'은 야수의 성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러 나섰다가 대신 갇히고 만다. 흉측한 야수의 외모에 감춰진 따스하고 이지적인 면에 놀란 벨은 성 안에서 단둘을 위해 열리는 무도회에 초대받는다.
텅 빈 홀에서 둘이 손을 맞잡는 순간,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의 감미로운 동명(同名) 주제가가 흐른다. 199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한 영화 '미녀와 야수'는 25년 전의 주제가를 다시 썼을까.
리메이크 영화 '미녀와 야수'는 지난달 국내 개봉 이후 11일 만에 관객 300만명을 넘어섰다. 어린이들에겐 마법에 걸린 왕자와 순수한 시골 처녀의 낭만적 동화요, 20~30대에겐 아름다운 노래가 끊이질 않는 뮤지컬 영화다. 애니메이션을 기억하는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일깨우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돌아보면 1990년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가의 황금기였다. 1991년 국내 개봉한 '인어 공주'의 '언더 더 시(Under the Sea)'부터 '미녀와 야수'의 동명 주제가, '알라딘'의 '아름다운 세상(A Whole New World)'까지 애니메이션의 인기와 더불어 수록곡도 사랑받았다.
이번 영화에서 음악은 추억을 환기하는 장치가 된다. 오케스트라 반주를 통해서 한층 풍성하고 다채롭게 편곡된 동명 주제가가 대표적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모두 주제가는 미녀와 야수가 춤을 추는 절정 장면과 자막이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두 번씩 흐른다. ▷기사 더보기
[미녀와 야수 vs. 알라딘… 당신을 사로잡았던 OST는? ]
아카데미가 사랑한 '브라질의 밥 딜런'
올해 3관왕 '문라이트'에 등장한 카에타누 벨로주 '쿠쿠루쿠쿠…'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남우조연상·각색상 등 3관왕에 오른 '문라이트(감독 배리 젠킨스)'는 흑인 소년의 인종적·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섬세하게 묘사한 영화다. 22일 국내 개봉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샤이론(트레반트 로즈)은 마약 중독에 시달렸던 어머니가 입원한 재활 병원으로 면회를 간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마약 중독에 넌더리를 냈던 샤이론이 정작 어른이 된 뒤 마약 중개상이 됐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샤이론이 어머니와 감정적 응어리를 풀고 화해한 뒤 돌아가는 고속도로 장면에서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남성 가수의 미성(美聲)이 흐른다. 노래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브라질의 밥 딜런'으로 불리는 가수 카에타누 벨로주의 '쿠쿠루쿠쿠 팔로마(Cucurrucucu Paloma)'다. 벨로주는 1960년대부터 브라질 전통 음악과 미국의 록·포크 음악을 결합한 노래 운동 '트로피칼리아'를 주창했다. 지난해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서 벨로주는 단출하게 기타 한 대를 들고 이 노래를 불렀다.
'쿠쿠루쿠쿠 팔로마'는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 실려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하다. '그녀에게'는 2002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그녀에게'에서는 가수 벨로주가 직접 출연해서 노래를 불렀다.
비둘기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떠난 이의 넋을 떠올리는 노랫말 때문에 장조 선율에도 슬픔이 어려 있는 듯한 정취를 자아낸다. '문라이트'는 마약과 폭력 등 거친 남성성을 강조할 때는 힙합 음악을,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묘사할 때는 리듬 앤드 블루스(R&B)를 사용하는 등 음악을 영민하게 활용한다.
영화 '더킹'과 베르디 '레퀴엠'
묘하게 잘 어울리네, 미사곡과 분노
최근 53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더 킹'(감독 한재림)에선 1997년 당시 검사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15대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장면이 나온다.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스크린에는 격렬한 오케스트라 합주 위로 혼성 합창이 흐른다.
검사들이 정치권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풍자한 이 장면에 등장한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레퀴엠(Requiem)' 중 '분노의 날(Dies Irae)'이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에 헌신했던 소설가이자 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1785~1873)를 존경했던 베르디는 만초니의 타계 소식을 접한 뒤 '레퀴엠'을 완성했다.
레퀴엠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가톨릭 미사곡이다. 라틴어 가사로 된 레퀴엠은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와 '분노의 날' '눈물의 날(Lacrimosa)' '신의 어린 양(Agnus Dei)' '저를 구원하소서(Libera Me)' '낙원에서(In Paradisum)'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작곡가의 선택에 따라서 자유롭게 곡을 빼거나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
이를테면 모차르트는 미완성 유작인 '레퀴엠' 가운데 '눈물의 날'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나머지 부분은 작곡가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후대에 완성됐다. 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는 '분노의 날'을 빼는 대신 '저를 구원하소서'에 비중을 실어서 한층 따스하고 온화한 인상을 준다.
반면 베르디의 '레퀴엠'은 '분노의 날'을 강조해 오페라처럼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느낌이 두드러진다. 미리 염두에 둔 건 아니었겠지만, '더 킹'에 흘렀던 '분노의 날'은 최근 한국 상업영화의 '분노 과잉'과도 역설적으로 잘 어울린다.
속물 가수? 그래미상 10번 받은 만능 음악인
'라라랜드'의 '약방의 감초' 역할 키스役 존 레전드
영화 '라라랜드'에서 주인공인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오로지 재즈만 듣고 연주하는 전문 클럽을 여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학창 시절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키스'의 이 말을 들은 뒤 오랜 결심을 접고 대중적 취향의 팝 그룹에 건반 연주자로 합류한다. 주인공의 마음을 돌려놓았던 '키스'는 과연 누구였을까.
'키스' 역은 미국의 팝 가수 존 레전드(38)가 맡았다. 영화에서는 둘도 없는 속물처럼 묘사되지만, 레전드는 2000년 데뷔 이후 그래미상만 10차례 받은 만능 음악인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하다가 음악인으로 전업했다. 리듬 앤드 블루스(R&B)나 소울(soul) 같은 흑인음악을 현대적이고 세련된 감각으로 해석한 노래들로 사랑받고 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삶을 다룬 영화 '셀마'의 '글로리(Glory)'로 2015년 아카데미 주제가상도 받았다. '라라랜드'에서 그가 불렀던 '열정을 불붙여(Start a Fire)'도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흥미로운 건 뮤지컬과 재즈를 절묘하게 버무렸던 영화와는 달리, 존 레전드는 흑인음악 색채가 강한 팝 음악을 선보이는 가수라는 점이다. 영화에서 세바스찬과 키스가 처음 합주(合奏)하는 장면에서도 레전드가 연기했던 '키스'는 힙합과 일렉트로닉 리듬의 기계음을 과감하게 실연(實演)에 집어넣는다. 복고풍의 재즈를 지향하는 '세바스찬'과 대중적 취향을 반영해야 한다고 믿는 '키스'의 차이를 음악으로 보여준 것이다. 꿈과 현실, 열정을 다룬 이 영화에서 '세바스찬'의 재즈와 '키스'의 팝 음악도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폭발 직전, 고요한 현악 4중주 흐른 이유
'얼라이드' 속 하이든의 '황제'
최근 개봉한 영화 '얼라이드(Allied·사진)'에서 영국 정보국 장교(브래드 피트)는 2차 대전이 한창인 1942년 독일 대사 암살 지령을 받고 프랑스령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침투한다. 거기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의 여성 비밀 요원(마리옹 코티야르)과 함께 독일 대사관에서 열리는 연회장에 잠입한다. 사전(事前) 준비한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긴박한 이 장면에서 갑자기 현악 4중주가 조용히 흐른다. 과연 무슨 선율이고, 왜 흘렀던 것일까.
총격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고요함을 상징했던 영화의 선율은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의 현악 4중주 '황제' 2악장이다. 하이든은 1791년 영국을 처음 방문한 뒤 '신이여 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King)'가 널리 불리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하이든은 1797년 '황제 찬가'를 작곡했고, 자신의 현악 4중주 '황제'의 2악장에도 이 선율을 사용했다. 현재 기독교에서 널리 불리는 찬송가 '시온성과 같은 교회'와 같은 곡조(曲調)다.
이 노래는 1918년 1차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공식 국가였다.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에는 '독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독일이여'라는 나치 찬가로 쓰였다. '뫼즈강에서 네만강까지, 아디제강에서 페마른섬의 해협까지'처럼 영토 팽창주의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1~2절은 제외하고, 지금도 3절은 독일 국가로 불린다. 영화의 독일 대사관 장면에서 이 선율이 흘렀던 건 당시 연회가 나치의 공식 행사였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