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인쇄물과 영상 매체들이 다채로운 색으로 시선을 끄는 시대. 무심해서 오히려 더 주목 받는 컬러가 있다. 오로지 명암으로만 표현한 흑과 백은 화려한 색에 가려졌던 본래 메시지를 부각시키고 시각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최근 디자인과 문화계에 부는 복고 열풍도 흑백 콘텐츠에 정감, 향수라는 정서를 부여한다. 색을 걷어내고 빛으로 채워지는 콘텐츠들을 살펴봤다.

웹툰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웹툰 '송곳', '혼자를 기르는 법', '마스크걸', '문유'

흑백 작업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웹툰(인터넷 만화)이다. '마음의 소리'로 유명한 인기 웹툰작가 조석은 작년 6월부터 신작 '문유'를 연재하고 있다. 지구 멸망 후 달에 혼자 남은 인간의 이야기를 차분한 단색조로 그려나간다. 이 외에도 '송곳' '헬퍼2: 킬베로스' '마스크걸' '블랙 수트'(네이버), '혼자를 기르는 법' '레드 스톰'(다음), '마당 씨의 식탁' '김철수씨 이야기'(레진코믹스) 등 주요 웹툰 사이트마다 흑백 작품들을 서비스하고 있다. ▶기사 더보기

영화

영화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애초에 컬러로 만든 영화를 굳이 흑백으로 돌려 다시 상영하는 작품이 나왔다. 지난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2015)'는 2016년 말에 흑백판으로 재개봉했다. 한국 영화 최초로 윤동주의 생애를 담은 영화 '동주'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춘몽' 역시 흑백 영화로 촬영했다. 3D와 4D 등으로 생생한 체험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는 현재, 사실감을 영화의 매력으로 꼽는 이에게는 시간을 역행하는 작품들이다.

흑백으로 제작된 영화. (왼쪽부터) 동주, 춘몽, 본투비블루, 이다. 포스터 역시 흑백의 모노톤으로 만들어져 영화의 분위기를 표현했다.

['매드맥스', ALL 흑백 버전으로 재개봉 ]

[2016 부국제 개막작은 '춘몽' ]

영화 전체를 흑백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흑백 장면을 삽입해 만든 영화도 있다. 재즈 음악가이자 트럼펫 연주가인 '쳇 베이커(Chet Baker)'의 삶을 다룬 영화 '본투비블루(Born to be Blue, 2015)'는 컬러 화면과 흑백 화면이 교차하면서 영화가 흘러간다. 로드 무비 성격이 강한 영화 '한 여름의 판타지아'는 일본 오래된 마을 고조시(五條市)가 나오는 1부를 흑백 화면으로 구성했다.

Why? 메시지 강조

최근 나오는 웹툰이 흑백으로 돌아선 것은 스토리에 더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흑백으로 만든 콘텐츠는 시각적으로 차별성을 얻고 메시지를 강조하는데 효과적이다.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태이면서 복잡한 스토리 라인을 가진 '그래픽 노블'은 다른 만화에 비해 텍스트가 많고 작가주의 색채가 짙어 주로 '블랙 앤 화이트'라는 흑백으로 그려진다. 최근의 웹툰 역시 스토리와 메시지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흑백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만화와 웹툰에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요인은 그림의 색이나 그림체보다 이야기와 내용이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그래픽 노블'로 표현한 작품. 그래픽 노블의 거장 호세 무르뇨가 그린 '이방인'

영화에서는 상징적 효과나 분위기에 고유성과 차별성을 주기 위해 사용한다. 매드맥스 시리즈를 만들고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흑백판을 내놓은 조지 밀러(George Miller) 감독은 "색이 주는 일부 정보가 제한되지만 흑백톤이 영상을 더 상징적(iconic)으로 만들어준다"며 흑백판이 "최고의 버전"이라고 말했다.

영화 '동주'를 만든 이준익 감독은 "우리는 이미 72년 전 윤동주의 흑백사진을 봤다. 그걸 컬러로 살려내면 오히려 사실성이 떨어질 것 같았다"고 했다. 또한 "흑백영화가 가지고 있는 노스탤지어라는 서정성에 대한 기대"가 관객들을 모을 것이라고도 봤다. 영화 '춘몽'도 노스탤지어라는 향수를 다룬 영화로 흑백 화면이 주는 특유의 정서가 녹아있다. 영화 '한 여름의 판타지아'를 찍은 장건재 감독은 영화 속 배경이 되는 고조시를 직접 다녀온 후 고전적이고 느린 도시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흑백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위)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흑백판 스틸컷, (아래) 영화 '동주' 스틸컷

[스물여덟에 떠난 동주에게 바치는 '靑春의 순간']

흑백사진

흑백 열풍은 사진 소비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필터, 포토샵 등 여러 효과를 주어 찍은 디지털 사진에 질린 탓일까. 소중한 사람과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방식으로 흑백 사진이 선호되고 있다. 덕분에 한때 자취를 감추었던 동네 사진관들이 옛 추억을 내걸고 속속들이 다시 들어서고 있다.

(왼쪽) 아날로그 감성 가득한 흑백 필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연희동 사진관. (오른쪽) 종로구 계동 '물나무사진관'.

서울 종로구 계동 '물나무사진관',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동사진관'이 대표적이다. "결혼 1주년을 맞아 남편이랑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었는데, 흑백 필름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세상에 한 장뿐인 사진이라 더욱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연희동 골목길, 아련한 70~80년대 동네 사진관처럼 꾸민 '연희동 사진관'을 찾은 이영주(33)씨 말이다.

두 달 전 이곳에서 결혼 사진을 찍은 박진영(36)씨는 "억지로 꾸미고 웃는 기백만원 웨딩 사진보다 소박하지만 우리다운 사진을 찍어서 신혼집에 두고 싶었다"며 "비용도 줄인 데다 느낌이 아주 근사한 사진이 됐다"고 했다. 만난 지 100일을 맞아 기념사진을 찍으러 오는 풋풋한 대학생 짝,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만삭 사진을 찍으러 온 부부, 부모님 모시고 가족사진 찍으러 온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이곳 문을 두드린다.

이곳에선 흑백 폴라로이드 사진과 흑백 필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흑백 폴라로이드 사진은 단종된 흑백 폴라로이드 필름으로 촬영하는 즉석 사진. 촬영 후 30초~1분 만에 사진을 받을 수 있다. 흑백 필름 사진은 총 12컷을 촬영한 뒤 암실에서 필름을 인화하는 방식인데 디지털 사진처럼 포토샵으로 몸을 늘씬하게 만들거나 얼굴을 갸름하게 하는 등 보정 작업은 전혀 할 수 없는데도 인기다. ▶기사 더보기

Why? 아날로그 감성, 복고 열풍
최근 출시된 후지필름의 즉석사진기용 흑백 필름.

사진과 영상 매체에서 흑백이 각광받는 것은 아날로그 감성과 복고 열풍과 관련있다. 빠르고 화려한 것만 멋있다고 여기던 사회 풍토는 사람들에게 과거에 대한 향수, 느린 정성에 관한 그리움을 갖게 했다.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고, 사람 냄새가 나는 옛 것,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영화와 사진에서 색을 걷어내게 한 것이다.

사진의 색을 걷어냄으로써 본질에 더 가까워져 훨씬 진실한 사진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포토샵 등의 효과를 사용하여 고칠 수 없고 오로지 빛만으로 표현되는 흑백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이 모습이 오히려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어서 좋다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생 최규은(26)씨는 "사진을 매일 찍다시피 했는데도 흑백 필름으로 찍은 사진 속 제 모습은 좀 달랐어요. 물론 좀 뚱뚱해보이고 키도 작아 보이지만 오히려 자연스러운 제 표정과 저다운 모습이 담긴 따뜻한 사진이었죠."고 말했다.

몇년 전부터 디자인계에 불고 있는 복고풍 열풍도 한몫했다. 최근 1~2년 사이 디자인업계에서는 6·70년대에 썼을 법한 간판이나 포스터에서 착안한 디자인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복고풍 느낌을 좋아하는 트렌드가 사진을 소비하는 방식에도 반영됐다. 하루하루 경쟁에 내몰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막연한 '옛날 느낌'에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삐뚤해서 촌스러워서… 자꾸 쓰게 된다, 너]

블랙 에디션
2012년, 2014년, 2017년 블랙에디션을 내놓은 남성 패션지 GQ.

패션에서는 품위 있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흑백을 사용한다. 남성 패션지 GQ는 올해 2월호를 2012년, 2014년에 이은 세번째 '블랙 에디션'으로 내놨다. 일부 광고 등만 제외하고 잡지 한권을 통째로 흑백으로 만들었다. 선명한 흑백으로 표현된 이미지들이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만든다. 단조로운 모노톤의 구성은 콘텐츠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스니커즈 브랜드 컨버스는 지난달 '턱시도 팩'이라는 이름의 특별판을 출시하며 흑백을 활용했다. '턱시도와 드레스에 어울리는 스니커즈'라는 콘셉트에 맞춰 신발을 검정·흰색·회색으로 디자인하고 홍보용 사진 역시 흑백으로 촬영했다.

실제로 흑백은 패션계, 전자제품 업계에서는 '고급', '프리미엄'의 이미지가 강하다. 명품의 대명사인 샤넬의 로고는 블랙이며, 고가의 가전제품은 대부분 검은색이나 흰색이 많다. 고급차의 색깔도 대부분은 검은색이다.

▶검은 천을 배경으로 촬영해 흑백 이미지를 강조한 컨버스의 스니커즈.

[색이 권력이다]

[블랙 전성시대… 개성 표현인가, 新계급사회 징조인가]

빛으로만 표현한 흑백은 단조로워보일 수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본질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너도나도 알록달록한 색으로 '튀어야 한다'고 외치는 시대, 사람들이 다시 흑백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 것은 '진짜'와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