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재판이 이렇게 시작하는군."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던 전직 나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에 대한 재판이 1961년 4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미국 TV 프로듀서 '밀턴 프루트먼'(마틴 프리먼)과 다큐멘터리 감독 '레오 허위츠'(앤서니 라파글리아)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과정을 전 세계 생중계하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1일 개봉한 '아이히만 쇼'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세계 37개국으로 중계했던 프루트먼과 허위츠의 실화(實話)에 바탕하고 있다.

'아이히만 쇼'에서 다큐멘터리 감독‘레오 허위츠’(앤서니 라파글리아·왼쪽)와 제작자‘밀턴 프루트먼(마틴 프리먼)’. 프루트먼 역은 영국 드라마‘셜록’에서 왓슨 역을 맡았던 프리먼이 연기했다.

'아이히만 쇼'는 아이히만에 대한 실제 흑백 재판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아이히만 대역(代役) 배우의 뒷모습이나 옆얼굴을 먼저 컬러 화면으로 슬쩍 비춘 뒤에, 실제 법정의 아이히만을 촬영한 흑백 영상을 통해 정면으로 클로즈업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역사적 충실도는 높아지지만, 흑백과 컬러 영상 사이 이질감이 생길 수 있다는 단점이 생긴다.

영화는 초반부에 5~10초 안팎으로 쉴 틈 없이 장면을 전환하면서 최대한 속도감을 높이는 편집 방식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아이히만 재판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MTV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현란한 편집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961년 법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가운데).

영화는 중반부에 "수십만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아이히만도 매일 저녁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였다"는 허위츠의 대사를 통해서 선명한 논점을 제시한다. 영화는 여기서 독일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의 핵심적 명제였던 '악(惡)의 평범성' 문제를 던진다.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당시 재판을 지켜봤던 아렌트는 1963년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라고 규정했다.

화려한 편집과 묵직한 주제 전달에 이어서 영화는 후반부에 사실로 돌아온다. 유대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법정 진술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수용소의 시체 처리 작업에 동원됐던 유대인 생존자는 독가스를 흡입하고 숨진 사망자들 속에서 아내와 두 아이를 발견한 뒤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고 싶었다"는 심경을 토로한다. 정작 그 말을 듣는 아이히만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미동(微動)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쏟아지는 증언과 이스라엘 검사의 집요한 추궁 끝에 아이히만은 결국 '죽음의 행진'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1944~1945년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유대인 수용자들에게 도보 행진을 강요해서 수만 명의 동사자(凍死者)와 아사자(餓死者)를 냈던 비극적 사건이다. 이 법정 장면에서 영화도 절정에 이른다. 걸핏하면 사실과 디테일을 무시하고 '분노 상업주의'로 치닫는 영화들이 쏟아지는 요즘, 극영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모범적 사례로 꼽힐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