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영화제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없다

세계 3대 영화제는 프랑스 칸 영화제와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 그리고 독일 베를린 영화제다. 뭔가 이상하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없다? 한국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해외영화제는 '아카데미 시상식'인데?

사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이라는 한 나라를 위한 자국 내의 연간 시상식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영화들을 한 데 모아 상영과 함께 시상을 하는 영화제와는 다른 성격의 행사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어떤 세계 영화제보다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영화제가 바로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그만큼 할리우드산 영화가 한국의 극장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물론 과거에 비한다면 요즘에는 한국영화에 종종 밀리는 형국이긴 하나, 그래도 우리에게 '외국영화'는 곧 '할리우드 영화'와 다름 아니다.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 모습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는 89번째를 맞이했다. 참으로 긴 역사다. 시상식의 성격이나 내용이 어떻든, 구순(九旬)을 코 앞에 둔 아카데미 시상식의 장구한 역사는 경의를 표할 만하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에서, 매년 열리는 가장 크고 화려한 시상식이니 그 역사를 살피면 흥미로운 사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부쳐, 90여년에 걸친 아카데미의 역사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깃거리들을 몇 가지 모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 듯 싶다.

제1회 아카데미 영화제는 1929년 5월 16일, LA의 할리우드 루스벨트 호텔에서 약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가 그 전에 개최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시상식이 만들어졌으며 1회 때는 20명의 위원회가 12개 부문에 걸쳐 수상작을 선출했다.

1회 시상식에서 눈에 띄는 수상자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밀 야닝스(Emil Jannings, 1884~1950)다. 독일인 배우였던 에밀 야닝스가 수상자로 발표되자 당시 야유가 쏟아졌다는 기록이 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넘어가는 기로에 있었던 당시, 독일 억양이 강했던 에밀 야닝스는 독일어를 하며 연기를 하고 싶다며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래서 이때 시상식장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트로피를 옆에 두고 찍어둔 사진만 내빈들에게 보여졌다고 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트로피를 부르는 애칭이 있다. 바로 '오스카'다. 이 애칭의 유래는 지금까지 약 3가지로 좁혀진다. 첫째, 두 차례 아카데미상을 받은 여배우 베티 데이비스가 트로피를 보고 첫 남편이었던 오스카 넬슨과 닮았다고 이야기했다는 설. 두번째는 어느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글을 쓰면서 아카데미 상을 '그 상'이라고 지칭하는 게 싫증을 느껴 '오스카'라는 말을 만들어 붙였다는 설. 마지막으로 가장 유력하다는 설은, 아카데미 사서 출신에서 감독으로 변신했던 마거릿 헤릭 여사가 트로피를 보고 "우리 오스카 아저씨를 닮았네요"라고 말한 것을 기자가 듣고 기사로 쓴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오스카'라는 말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상 때마다 불려지고 있다. 수상자의 이름이 발표되기 전에는 반드시 "The Oscar goes to…"라고 운을 떼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자로 우리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인물은 아마 빌리 크리스탈일 것이다. 그는 여유 있으면서도 위트 넘치는 진행으로 아카데미가 고상한 시상식이 아닌 축제의 장으로서 사람들이 인식하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8년만에 다시 사회자로 돌아온 빌리 크리스탈을 위해 티저영상도 제작해 주었다.

밥 호프(Bob Hope, 1903~2003)

그런데 아카데미 사회자로서 기억해야 할 인물은 따로 있다. 19번이나 사회를 본 밥 호프다. 압도적인 회수로 아카데미의 호스트를 가장 많이 맡아온 밥 호프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로 기억된다. 1938년 라디오 출연을 시작으로 희극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며 '미국 코미디의 황제'라고 불렸으며 수많은 위문공연 및 TV 활동도 병행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카데미 수상은 한 건도 없었다는 것. 그래도 공로는 인정 받아 특별상 격인 명예 아카데미상은 4번이나 받았다고 한다.

최근의 아카데미에서 눈에 띄었던 사회자는 아마도 엘런 드제너러스일 것이다. 본인 이름을 붙인 토크쇼가 승승장구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희극인이다. 엘런은 2014년 86회 아카데미의 사회를 맡았는데 그 해에 다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리고 아카데미 역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피자 배달원이 시상식이 열리고 있는 돌비 극장에 등장한 것이다.

엘런은 시상식 도중 객석을 향해 "배고픈 사람 없어요? 나한테 죽이는 생각이 있어요. 피자를 시킬 건데 드실 분?"이라고 했고 현장에서 배우들이 잇달아 손을 들자 실제로 피자를 시켰다. 전세계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생방송에서 피자파티를 벌인 것.

당시 피자를 갖고 왔던 배달원은 일약 유명인이 되었고 앞다퉈 방송에 섭외돼 잠시 바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후에 엘런 드제너러스 쇼에도 출연해서 팁으로 천 달러를 받아갔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이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날 벌어진 또하나의 역사적인 이벤트는 바로 '셀카' 찍기였다. 이 사진은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리트윗 된 사진으로 기록되었고 더불어 삼성 갤럭시 PPL이 확실하게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의 영화팬들은 저토록 자연스럽고 흥겨우며 여유 넘치는 시상식을 보고 '역시 할리우드!'라고 탄식하며, 경직된 우리네 시상식을 떠올리며 씁쓸해했을 것이다.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찍힌 '셀카'

아카데미 시상식이 늘 흥겹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은 매우 엄숙하기까지 하다. 제4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으로 '대부'의 말론 브란도가 호명됐을 때였다. 무대에 오른 사람은 배우가 아닌 정통 인디언 복장을 한 여성이었다. 미국 원주민 혈통(훗날 네이티브가 아닌 혼혈이라 알려져 논란이 되었음)의 사친 리틀페더(Sacheen Littlefeather)라고 불리는 여성이, 상을 거부한 말론 브란도 대신 단상에 오른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인디언을 다루는 방식에 항의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2분 정도 단상에서 간단한 소감을 이야기한 리틀페더는 무대 뒤에서 15쪽에 이르는 말론 브란도의 연설문을 기자들에게 읽어주었다고 한다. 사실 이전에 말론 브란도는 한 차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탄 적이 있다. 하지만 말론 브란도는 73년 두번째 아카데미 타이틀을 거부하면서 '할리우드의 착한 아이'가 되기도 함께 거부했다.

1988년 제60회 아카데미에서는 시상을 하러 나온 에디 머피가 불만을 터뜨린다. "할리우드는 흑인을 차별 대우한다. 흑인에게는 20년에 한번 꼴로 상을 주는데 내가 상을 타려면 2004년은 되야 하나?" 현장에서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거의 현실이이었다.

2002년 74회 아카데미에서 흑인 최초의 여우주연상이 나왔다. '몬스터 볼'의 할리 베리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이름이 호명되자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며 흥분 속에 수상 소감을 이어갔다. 소감이 길어지자 제작진 측에서 이제 그만 끝내라는 메시지를 받고는 "이 상을 받기까지 74년이나 걸렸다고요!"라며 성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남우주연상은 덴젤 워싱턴에게 돌아갔고 공로상 마저 원로 흑인배우 시드니 포이터어가 받았다. 2002년 아카데미는 할리우드 내 흑인배우들의 위상이 한껏 상승한 역사적인 시상식으로 기록된다.

할리 베리처럼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배우들은 대체로 감격에 겨운 나머지 소감이 너무 길어져, 주최측이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민망할 정도로 소감을 짧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영화학도에게는 교과서 같은 인물로 추앙되는 알프레드 히치콕은 사실 오스카를 수상한 적이 없다. 5번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수상에는 모두 실패했다. 대신 아카데미는 1968년 시상식에서 그에게 공로상 성격의 '어빙 탈버그 상'을 수여했다. 이름이 불리자 히치콕은 느릿느릿 걸어오더니 '꽁'한 마음이라도 있었던 모양인지 소감으로 "Thank You" 한마디만 하고는 단상을 내려가버렸다.

사뭇 감동적인 공로상 수상의 순간도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찰리 채플린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던 시절 공산주의로 몰려 결국 영국으로 반 쫓겨나다시피 해야 했던 채플린은 1972년 공로상의 주인공이 되며 미국으로 돌아왔다.

백발의 채플린이 등장하자 관중들의 기립박수가 꽤 오래 이어졌고 그가 수상소감을 하는 내내 모두 선 채로 경청했다. 그리고 소감이 끝나고도 박수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영화 역사를 빛냈던 거장 희극배우에게 주어진 다소 뒤늦은 환호였다.

제44회 아카데미 공로상의 찰리 채플린

아카데미 시상식을 놓고 여러 가지 우스개 소리 중에 이런 말도 있다. 정치적인 이유이든 인종의 이유이든 유난히 오스카를 받지 못하는 영화인이 있더라도 오래만 살아 있으라고 말이다. 어쨌든 결국 공로상은 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가 엔니오 모리꼬네다. '시네마 천국'이나 '미션' 등으로 세기에 남을 명작을 남긴 영화음악의 거장이다. 그런 그도 2007년 공로상을 받을 때까지 다섯번이나 후보에 지명됐지만 단 한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으니 2016년 '헤이트풀 8'으로 드디어 음악상을 수상했다. 이 순간 그의 나이 88세였고 아카데미 역대 최고령 수상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제88회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엔니오 모리꼬네

2016년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감동적 수상도 적잖은 이슈였지만 이 해의 가장 큰 이슈는 뭐니뭐니해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남우주연상 수상이다. 90년대부터 현재까지 꽤 오랫동안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와 흥행파워를 가진 스타배우로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천재적으로 보일 정도의 빼어난 연기를 아무리 펼쳐도, 번번히 남우주연상 목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팬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조차 그의 낙마를 매번 함께 아쉬워하고 있었다.

곰에게 처참히 물어 뜯기고도 죽지 않고 처절한 고통을 감내하며 겨우 살아남은 후에야 디카프리오는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마침내 수상에 성공한 디카프리오는 본인의 첫 수상을 감격해 하는 대신, 지구의 온난화를 걱정하는 차분한 소감으로 또 한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 3대 영화제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없다

2017년 89회 아카데미 영화제가 여지 없이 개최됐다. 올해는 '라라랜드'를 제치고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았고, 그 어느해보다 가장 정치적이었던 시상식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영화팬들이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갖는 관심의 핵심은, 세련되고 여유가 넘치는 타국의 시상식 매너에 관한 것일 테다. 전세계인의 눈을 집중시키는 스타배우들의 화려함, 그리고 장내를 채우는 유머와 풍자가 매번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아무리 먹을 게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항상 북적북적하기 마련. 아카데미 시상식이 영화제로서의 위상은 다소 흔들릴지라도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위상은 아마 앞으로도 작아질 일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