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혁 문화부 기자

최근 페이스북에서 초대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상혁모음'이라는 페이지였는데, 상혁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전국의 동명이인이 모여 서로 안부를 나누는 곳이었다. 대부분 한자까지 같았고, 끝 자는 대개 빛날 혁(赫)이었다. 한 이름을 달고 각자의 이름값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혁들을 바라보며 감개가 묘했다. '지수모음' '민우모음' 등 여타 동명이인의 커뮤니티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서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름"이라며 용기를 북돋았다. 큰 힘이 되겠느냐마는 응원의 모양새가 화목해 보였다.

누구나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은 자아를 드높이면서 때로 천형(天刑)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김창렬(金昌烈)은 좋은 이름이다. 대단히 창성하다는 의미 아닌가. 김창렬 중엔 유명 화가도 있고 대학교수, 성직자도 있다. 그러나 현재 김창렬은 양두구육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연예계 악동' 이미지의 가수 김창렬(44)씨가 본인 이름을 내건 편의점용 식품을 잇달아 내놓았는데, 품질이 부실해 네티즌들의 놀림감이 됐기 때문이다. '창렬하다'는 화려한 포장에 비해 허접한 내용물을 비웃는 신조어가 됐다. 김씨는 명예 회복을 위해 해당 식품업체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으나 최근 기각당했다. 재판부는 "'창렬하다'의 뜻이 온라인에서 부정적 의미로 확산된 것은 김씨 행실에 대한 그간의 부정적 평가가 하나의 촉발제가 돼 상대적 품질 저하라는 문제점을 크게 확대·부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시했다. 전국의 김창렬은 당혹스럽게 됐다. 피해자는 김씨 혼자가 아닌 것이다.

이름은 간판이며, 거의 전부다. 한물간 연예인이 예명을 바꾸거나 정당이 정치적 위기에 몰릴 때마다 자유·민주 등의 성스러운 단어를 차용해 개명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름은 본질을 앞서지 못한다. 미국에서도 맹위를 떨치는 일본의 야구 영웅 스즈키 이치로(一朗)의 뜻은 그저 '첫째 아들'이다. 영국에서 너무도 흔한 이름인 조지(George)를 택한 소설가 조지 오웰, 한국 만화가 김보통처럼 부러 소박한 필명을 쓰는 작가도 많다. 이름이 작품보다 거창해지는 겸연쩍음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세상에 좋은 이름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름의 주인이 이름에 준하려는 의지를 지닐 때에야 비로소 이름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름대로 사는 일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이름은 개인의 것이며 동시에 여럿의 것이므로. 최근 국내 개봉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큰 인기를 끌면서 제목에 들어간 마침표의 의미에 설왕설래가 많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저 마침표는 물음표나 말줄임표가 될 수 있다. 각자의 시각에 따라 여러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하고 싶어진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너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게 네 이름이라고?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 거대한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