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짜리 아들을 키우는 우모(여·35)씨는 아이가 태어난 이후 고기나 계란이 들어간 음식을 준 적이 없다. 모유를 뗄 때쯤부터 과일즙과 현미 미음 등으로 '채식 이유식'을 만들어 줬다. 철분 등은 영양제를 따로 먹이는 식으로 보충해 준다. 아이에게 이가 나고부터는 애호박무침, 가지구이, 연근조림 같은 채소 반찬을 먹이고 있다. 사과나 감을 식품건조기에 말려 간식으로 주기도 한다. 우씨는 "동물을 비인도적인 환경에서 길러 얻은 고기를 아이에게 먹일 수 없어 아이도 채식주의로 키우기로 했다"며 "아이가 잔병치레 없이 크는 건 채식 덕"이라고 했다.
일곱 살 아들을 둔 정모(여·42)씨는 10년 넘게 비건(vegan·완전 채식주의자)으로 살고 있다. 정씨 남편 역시 결혼하면서 계란, 유제품, 해산물은 먹지만 붉은색 살코기는 먹지 않는 페스코(pesco) 식단을 유지하고 있다. 정씨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간식과 도시락을 따로 챙겨주고, 교사에게 다른 음식들을 함부로 먹이지 말라고 몇 번을 당부했다. 정씨는 최근 시어머니와 크게 다퉜다. 정씨가 없을 때 아이를 돌봐주던 시어머니가 "애들은 크면서 고기를 먹어야 건강하다"며 정씨 부부 몰래 고기를 구워줬기 때문이다. 정씨는 "아이 영양상태를 알아서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있는데 집안 어른들이 양육 방식에 동의하지 않아 힘들다"고 했다.
채식주의를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채식 육아'를 하는 부모들도 늘고 있다. 과거 질병 예방을 위해 민간요법 중 하나로 채식 식단을 먹이는 부모들이 있었다면, '채식주의'라는 부모 신념 때문에 아이 역시 채식주의자로 키우는 것이다. 동물성 성분을 전혀 쓰지 않고 유아용 채식 간식을 만들어 파는 쇼핑몰도 생겨났다. 채식주의 잡지 '월간 비건' 이향재 대표는 "채식 육아를 하면 아이에게 생명 존중의 가치를 알려주고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어떻게 식탁에 올라오는지 교육시킬 수 있다"며 "채소, 곡물류 등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균형 잡힌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게 식단을 짜면 아이들 성장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지난해 미국 소아과의사협회는 "아이를 비건으로 키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필수 영양소인 비타민 B-12, 비타민 D, 철분, 아연, 칼슘 등이 골고루 들어간 식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채식주의 문화가 발달한 외국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극단적인 채식을 강요하는 사례가 생기자 '채식 육아'에 대한 논란도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사는 한 여성은 11개월짜리 아들에게 약간의 과일과 견과류 외에 다른 음식을 주지 않아 아이를 영양실조에 이르게 한 혐의로 별거 중인 남편에게 고발당했다. 이 건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의원들이 만 16세 미만 자녀에게 부모가 채식을 강요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이탈리아에서도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채식주의 식단을 강요해 영양실조에 이르게 할 경우 최대 징역 2년을 선고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했다.
국내 전문가들 역시 한창 성장하고 있는 아이가 채식만 하면 성인이 채식을 고집하는 것보다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 쉽다고 경고한다. 박민선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활동량이 많은 소아기 아이들이 동물성 단백질 섭취가 부족할 경우 체력이 약해져 정상적인 성장이나 성기능 발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며 "아이가 고기를 피하고 곡물과 채소만 먹다 보면 결국은 당 지수가 높은 간식을 먹게 돼 오히려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김민선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할 수 있다고 알려진 콩에는 에스트로겐 성분이 있어 남자아이들 성장에 도움되기가 어렵다"며 "채식 위주 식단을 짜더라도 권장량까지는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한편 책 '내 몸이 최고의 의사다' 저자인 임동규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단백질이 7% 포함된 모유만 먹고도 갓 태어난 아기는 인생에서 가장 큰 신체적 성장을 한다"며 "현미 등 식물성 단백질로 식단을 보충한다면 채식만으로 아이를 키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