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러시아 서부 바시키르 공화국의 수도 우파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중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는 러시아 글자를 처음 써봤다. "무서울 게 없었어요. 말만 유학이지 1년만 놀다 올 생각이었거든요." 운명은 엉뚱한 데로 튀었다. 국립영재음악원 첫 수업에서 교수는 당시 클래식 아코디언을 가장 잘한다는 러시아 젊은이의 공연에 그녀를 데려갔다. "걔보단 제가 더 잘할 것 같았어요.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부모님께 '5년 계획표'를 짜서 보냈죠." 다짐은 이랬다. "첫해에 러시아 콩쿠르에서 입상, 2년 차엔 독주회 개최, 3년 차엔 국제 콩쿠르 3위 입상, 4년 차엔 국제 콩쿠르 우승, 5년 차엔 교향악단과 협연."

전유정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자 아코디언이 ‘우우웅~’ 우는 소리를 냈다. “사람도 태어나면 그저 흘러가듯이 아코디언도 건반을 누르면 제 의지에 따라 음량이 작아졌다 커졌다 해서 감성을 울리죠.”

20일 서울 문호아트홀에서 만난 그녀는 목표를 이뤘느냐는 질문에 "생각보다 빨리!" 하며 웃었다. 클래식 아코디어니스트 전유정(26). 중3 때 처음 아코디언을 잡았다가 이듬해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우파국립음대를 거쳐 그네신국립음대를 수석 졸업했다. 아코디언을 시작한 지 11개월 만에 이탈리아 란차노 국제 콩쿠르에서 2위를 했고 2008 쿠레프레바 콩쿠르, 2010 클라바 콩쿠르, 2011 발티도네 콩쿠르를 석권했다. 국제 무대에서 유일한 한국인 아코디어니스트로 활동 중인 그녀가 23일 '금호아트홀 라이징스타 시리즈'에 올라 아코디언의 진수를 들려준다. 러시아 작곡가 구바이둘리나의 아코디언 소나타 '죽은 자의 부활을 찾아'를 비롯해 주비트스키의 아코디언 협주곡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위한 오마주' 등을 연주한다.

알프스 자락에서 요들을 부를 때나 담배 연기 자욱한 카바레에서 춤출 때 흥을 돋우던 아코디언이 클래식용으로 개량된 지는 70년. 해외엔 크세니아 시도로바처럼 인기와 실력을 겸비한 아코디어니스트가 많지만 국내엔 드물다. "어렵거든요. 일반 아코디언은 왼손으로 화음만 넣지만 클래식용은 왼손에도 피아노 건반처럼 반음이 다 있어서 골치가 아파요. 건반이 연주자 눈에 보이질 않으니 실수도 많고." 그래서 아코디언이 인간 감성을 울릴 수 있다고도 했다. "연주자 품에 쏙 안기는 악기는 아코디언이 유일할걸요? 건반을 그냥 누르고만 있어도 제가 숨 쉬는 데 따라 음량과 음정이 확확 바뀌니 온몸으로 노래하는 맛이 나죠." 전유정은 "현악기답고, 건반악기답고, 성악가다운 면모를 다 지닌 아코디언으로 서울을 적시겠다"고 다짐했다.

전유정 Accordion=23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02)6303-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