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취임한 말레이시아 4대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맛의 꿈은 원대했다. '비전 2020.' 40년 후를 내다본 야심 찬 국가 전략을 세웠다. 그 핵심 사업이 신공항 건설이었다. 1998년 완공된 쿠알라룸푸르(KL) 공항은 단순한 비행기 터미널이 아니다. 말레이시아인들의 미래 염원을 담은 건축물이다. 1996년 기초 공사가 한창이던 이곳을 취재한 후 4년 만에 다시 들렀다가 첨단 시스템에 놀란 기억이 난다. 이 나라의 자존심 같은 바로 이곳 KL공항에서 북한 김정은의 이복(異腹)형 김정남이 독살당했다.

▶말레이시아는 우리나라 중장년층에는 '말련(馬聯)'이라는 약어로 친숙하다. 이 나라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메르데카컵 축구 대회'가 1960~70년대 현장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중계되면서 우리에겐 친근한 나라가 됐다. 2000년대 중반 노무현 정부가 수도를 이전하려고 할 때는 말련의 행정 도시 푸트라자야가 주목받았다. 상당수 공무원, 연구원이 푸트라자야 방문을 위해 KL행 비행기에 올랐다.

▶말레이시아는 국교인 이슬람과 비동맹 외교의 영향으로 독자 노선을 강조해왔다. 마하티르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 발전을 본받아야 한다는 동방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미국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그는 "서구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아 외환 위기 때도 이 나라는 우리와는 정반대 길을 선택, 국제통화기금(IMF) 처방을 거부했다.

▶이런 전통 때문일까. 말레이시아는 우리보다 13년 늦은 1973년 북한과 수교했지만 평양과도 꾸준히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북한 사람도 무비자 입국하도록 함으로써 거점 공관 역할을 하게 했다. 1994년 제네바 미·북 합의 후 양측 협상이 KL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외교부를 출입했던 중견 기자들은 'KL 북대(북한 대사관) 뻗치기' 취재를 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1997년 우리 국정원 출신이 이곳 대사로 나간 데도 이런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가 지금 이병호 국정원장이다.

▶말레이시아 부총리가 김정남 독살 사건 수사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신을 북한에 인도하겠다는 방침부터 밝혔다. 이 나라가 견지해 온 독자 노선과 비교적 끈끈한 북한 유대 관계가 그 배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정남 피살은 훗날 한반도 정세의 변곡점이었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는 사건이다. 치열한 외교전이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외교력은 지금 변두리를 돌고 있는 것만 같다. 나라 사정이 이래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