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호(가명·75)씨는 지난 2015년 초 복부 대동맥류 수술을 받고 서울아산병원 외과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최씨는 입원 사흘 만에 환각, 불안 증세 등을 동반한 섬망(
妄)을 겪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환자들이 병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흔히 겪는 증상이었다. 시간이 지나 의식이 돌아온 최씨는 머리맡에 있던 다이어리 하나를 발견했다.
다이어리엔 최씨의 병원 생활이 사진과 글로 기록돼 있었다. "어제는 잘 주무셨어요? 저에게 활짝 웃어주셔서 감사해요. 치료 잘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간호사들이 최씨를 위해 쓴 '감사 다이어리'였다. 최씨는 그 후로 항상 간호사들이 쓴 다이어리를 머리맡에 두고 재활 의지를 다졌다. 8개월 만에 퇴원한 최씨는 최근 중환자실에 들러 간호사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이선주 수간호사는 "중환자실에 오래 입원한 환자들이 퇴원 후에도 병원 생활을 떠올리며 공포를 느끼는 '중환자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며 "당시 간호사들이 보낸 응원 덕분에 최씨가 살고자 하는 의지도 강해졌고 퇴원 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서울아산병원 간호사들 사이에서 '감사 열풍'이 불고 있다. 이 병원은 지난 2015년 3월부터 '감사 경영'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이곳 간호사들은 동료에게 감사한 점 다섯 가지씩을 찾아 메시지로 보내주거나, 환자나 보호자에게 감사 카드를 적어 보내고 있다. 병동 곳곳엔 '감사 나무'가 있어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들이 서로에게 감사한 점을 종이에 적어 붙일 수 있다. "○○○님, 통증 때문에 힘드셨을 텐데 빨리 회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속 썩여서 죄송해요, 아빠. 우리 옆에 살아계셔서 고마워요" "○○○ 선생님, 동맥 파열됐을 때 응급조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계질서가 확고한 간호사들 사이에선 처음엔 후배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가 어색했다고 한다. 외과 황지혜 수간호사는 "처음엔 대체 어떤 점을 칭찬해야 할지 몰랐는데 동료를 잘 관찰하다 보면 사소한 점에도 감사하게 된다"고 했다. 그가 신입 간호사에게 건넨 말은 간단했다. "오늘도 용기 내 출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외과 중환자실에는 '감사의 종'이 달려 있다. 동료 간호사가 후배들에게 심한 말을 하거나 혼내는 것 같으면 누군가 슬며시 종을 울리는 것. 이곳 김경란 간호사는 "나도 모르게 후배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있을 때 '땡' 소리가 들리면 '아차' 하면서 마음가짐을 고쳐먹게 된다"고 했다. 김연희 간호부원장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간호사들 사이에서 '신입 6개월은 지옥'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규율이 셌다"며 "현장에서 간호사들의 역량이 잘 발휘되려면 유연한 조직 문화가 필요하다고 느껴 감사 운동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암병동 이은경 간호사는 "신입 때 일이 서툴러 자신감이 떨어져 있을 때 선배가 '차분히 자기 일을 잘해줘서 고맙다'고 남긴 메시지가 큰 힘이 됐다"며 "일이 즐거워지자 환자에게도 친절하게 대하게 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고 했다.
간호교육행정팀 이혜영 차장은 "감사 캠페인을 시작하고 지난 2년간 환자들의 간호 만족도, 간호사들의 직무 열의와 조직 몰입도가 꾸준히 올랐다"며 "간호사들의 사직률도 서서히 줄고 있다"고 했다. 아산병원에 처음 감사 경영을 제안한 사단법인 '행복나눔125' 관계자는 "아산병원을 시작으로 현재 전국 20곳 병원에서도 감사 경영을 도입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