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사망했다. 암살 방식은 독살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암살 수단으로서의 '독(毒)'을 주제로 글을 쓰기로 했다. 물론 정석대로라면 김씨 사망 배경과 배후세력, 암살 상황, 사건 이후 국제정세 등을 기사로 다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각 언론사 기자 선후배들께서 관련 기사를 초 단위로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글쓴이가 여기에 글귀 하나를 더 보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정치외교가 요동치는 시국에 이따위 글을 쓰느냐고 분개할 분들께는 미리 용서를 구한다.
◇음식을 이용한 독살
역사적으로는 음식을 이용한 독살이 가장 흔한 편이었다. 독(poison)의 어원 자체가 라틴어에서 '한 모금(sip)'을 뜻하는 'potio'다. 암살 대상에게 독을 직접 뿌리거나 찔러넣기보다는 쉬운데다, 독을 섞어 넣은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기도 비교적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 의학 수준으로는 시신에서 독극물을 검출해내 독살 판정을 내리기도 어려워, '병사'나 '급사'로 판정되기 일쑤였다.
자주 쓰였던 물질로는 '비소(砒素)'가 있다. 사람 몸이 비소에 노출되면 호흡곤란이나 신경계 이상이 온다. 하지만 비소혼합물은 단맛이 있어, 음식에 섞어두면 모르고 먹기 좋다.
조선시대 관련 기록이나 작품에서 자주 언급되는 '비상(砒霜)'의 주성분이 비소다. 옛 시대에 은수저를 음식에 넣어 독 검사를 했던 것도 비상 때문이었다. 은이 비상에 든 황 성분에 닿으면 검게 변색하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물론 황 성분이 없는 독에는 무용지물이었지만, 그만큼 당대에는 '음식에 섞는 독=비상'으로 여길 정도로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서양에서도 비소를 독으로 흔히 썼다. 프랑스에서는 삼산화비소의 별칭이 아예 '석세시옹(상속의 가루)'였다. 재산을 물려줄 웃어른을 암살하는 데 쓰기 좋아서였다 한다. 아버지와 형제자매를 비롯해 50명 넘는 이를 독살한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 마리 마들렌 도브레(1630~1676), 어머니와 남편 넷, 친자식 10여명과 의붓자식 5명 등 일가족 21명을 살해한 메리 앤 코튼(1832~1873)이 쓴 독도 비소였다.
아편을 독살 목적으로 쓴 기록도 있다. 1898년 통역관 김홍륙이 러시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다 유배된 것에 앙심을 품고, 고종과 태자(후에 순종)가 마시는 커피에 치사량에 가까운 아편을 탄 것이다. 커피 마니아던 고종은 보통 커피 맛이 아닌 걸 알고 바로 뱉어버렸지만, 태자는 이가 빠지고 며칠 동안 피똥(血便)을 볼 정도로 몸이 상했다 한다.
최근 먹는 독을 가장 적극적으로 쓰는 곳은 러시아다. 지난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 후보 빅토르 유시첸코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는 청산가리보다도 강하다는 독성물질인 '다이옥신'이 일반인보다 6000배 이상 검출됐다. 러시아 정보부 혹은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파가 친서방적인 유시첸코를 제거하기 위해 그가 먹은 수프에 다이옥신을 탄 것이다. 참고로 유시첸코는 결국 살아남아 대통령에 당선됐고, 임기 5년 내내 러시아에 반항해 푸틴의 신경을 긁었다.
방사능 물질을 독살에 쓰기도 했다. 지난 2006년 11월, 영국으로 망명해 푸틴 정권을 비판하던 전직 러시아 비밀경찰 발테로비치 리트비넨코가 갑작스런 복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했다가 2주 만에 사망했다. 사건을 수사하던 런던 경찰청은 리트비넨코의 소변과 찻잔에서 방사능 물질 '폴로늄 210'을 발견했다. 리트비넨코는 몸 안에서 방사능을 맞아 세포 파괴로 사망에 이른 것이다.
폴로늄 210은 자연에서는 양이 너무 적어 사실상 구할 수 없고, 양성자 가속기를 써서 인공적으로 만든다 한들 연간 생산량이 100g 정도에 불과하다. 민간은 고사하고 웬만한 나라 정부수반도 구경조차 어려운 희귀물질이다. 때문에 세간에서는 러시아 정부가 리트비넨코를 독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에서는 정부를 거스르면 푸틴이 방사능 홍차를 타준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우리나라에서 정부 비판하면 코로 설렁탕을 마시거나 색상 바뀌는 번호판 달린 경차에서 자살 당한다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침이나 화살을 이용한 독살
"녀석의 얼굴은 햇볕에 탔고, 몸은 아주 날쌔고, 돌을 단 막대기나 독을 묻힌 화살을 무기로 들고 있지." – 네 개의 서명(1890), 아서 코난 도일
픽션에서는 독침이나 독화살을 대롱에 넣고 불어 쏴 암살을 시도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거의 없다. 부피가 작고 사용할 때 조용한 건 좋지만, 명중률도 낮은데다 표적에 제대로 꽂히지 않을 수도 있어서다. 원주민 출신이 아닌 이상 소음총을 쓰는 게 훨씬 쉽고 편하다.
대신 가까이 다가가 독침으로 찌르는 암살 방식은 지금도 간혹 쓰이고 있다. 소리와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아 '조용한 죽음'을 추구하는 암살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지난 1978년에는 불가리아 비밀경찰이 영국 런던에서 극작가 게오르기 마르코프를 독이 든 우산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불가리아 공산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쿠바 공산주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볼펜에 든 독침으로 암살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었다.
북한도 독침을 애용한다. 주로 쓰는 도구는 만년필이나 볼펜, 손전등 안에 독침을 숨긴 '독총'이다. 지난 2011년 10월 검찰은 대북(對北) 전단 살포 운동을 하는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탈북자 출신) 대표를 암살하려 한 혐의로 탈북자 출신 공작원 안모씨를 구속 기소했다. 당시 안씨가 쓴 볼펜 모양의 독침은 뚜껑을 오른쪽으로 다섯 번 돌리면 침이 발사되는 형태로, 침에는 브롬화네오스티그민이라는 독약 성분이 묻어 있다고 전해졌다. 같은 해 8월 중국 단둥에서 탈북자를 돕다 브롬화네오스티그민 중독으로 사망한 김창환 목사도 북한 공작원 손에 독침으로 암살당했다는 의혹이 있다.
◇가스를 이용한 독살
흔히 쓰이진 않았지만, 독가스를 암살에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중국 국민당 장제스 정권은 혁명가에서 친일파로 돌아선 왕징웨이(汪精衛)를 암살하려 그가 묵는 베트남 하노이의 빌라 욕조 밑에 독가스 캔을 설치하고 마개를 열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보다 경호원이 먼저 욕실에 들어가는 바람에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히틀러를 독가스로 암살하려 했다 주장한 이도 있었다. 나치 독일의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다. 그는 회고록에서 "히틀러가 숨어 있는 베를린 벙커 환기통에 독가스를 넣어 암살하려 했었다"고 썼다. 다만 당시 경계병들이 독가스를 주입할 만한 곳을 지키고 있던 데다, 환기구 굴뚝도 접근이 어려울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시도였다 보는 게 보통이다.
◇점차 저무는 독살
인류 역사에 암살이 없던 적은 없지만, 독을 쓰는 암살은 세월이 흐를수록 보기 드물어지는 추세다. 의료 분야의 발달 때문이라 한다. 국내 최고의 독성학 권위자 중 한 명인 홍세용 순천향대 천안병원 교수는 "맹독을 직접 먹이거나 주사해도 순전 독 때문에 사람이 죽는 데에는 최소 10분 이상이 걸린다"며 "의학이나 응급구조체계가 미흡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10분이면 의료진이 출동해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즉사시키는 암살 방식도 많은 요즘 독살은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북한이 굳이 독극물을 써서 김정남을 암살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테러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만종 호원대 교수는 "공항이라는 장소 특성상 총이나 사제폭발물은 발각되기 쉽고, 칼로 살해하면 피가 많이 묻어 암살자들이 도망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며 "다른 살해 도구나 기술이 있었음에도 당시 상황에 가장 쓰기 좋은 암살 방식이 독극물이라 판단해 그렇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