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직장인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2012년 샐러리맨 초한지(SBS)를 시작으로 2013년 직장의 신(KBS), 2014년 미생(tvN), 2016년 욱씨남정기(jTBC), 그리고 올해 얼마 전 방영을 시작한 김과장(KBS)은 모두 오피스를 배경으로 직장인의 일상과 애환을 활극 형식으로 코믹하게, 또는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사무실 얘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지만, 직장인의 노동 문제에 대해 그려냈던 2015년 송곳(jTBC)까지 포함하면 2012년 이후 직장인 드라마는 해마다 한 편씩 제작되고 있다.
매일 규칙적인 일상을 사는 직장인들의 이야기는 극적 요소가 많지 않아 과거 드라마에서는 자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하루에 롤러코스터를 열두번도 더 타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직장인들의 일상만큼 '리얼 드라마'도 없다. 그런 얘기를 다뤘던 '직장 드라마' 몇 편을 시기 별로 꼽았다.
코믹한 직장인의 일상'TV 손자병법' (1987~1993)
우리나라 직장 드라마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작품. 당시 시트콤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코믹 드라마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 보면 시트콤에 가깝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7년에 걸쳐 다뤘다는 점에서 현재 2000년 부터 방영하고 있는 '막돼먹은 영애씨'와, 주인공들의 이름을 고전 손자병법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에서 차용했다는 점에서 2012년 '샐러리맨 초한지'와 비슷하다. 시대적 배경이나, 구체적인 상황을 다르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들을 코믹하게 다뤘다. 이 작품을 보면 예전과 지금이나 직장인이 느끼는 애환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IMF 시대, 열혈 사원의 성공과 연애'미스터Q' (1998)
씩씩하고 낙천적인 사원 이강토를 중심으로 속옷회사 라라패션 개발과(課) 사람들의 재기를 다룬 드라마. 직장인의 생활상과 애환을 다룬 본격 직장 드라마는 아니지만, 회사 생활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재기 과정을 담고 있어 당시 IMF를 겪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들이 마침내 성공한다는 결말은 당시 시청자들에게 짜릿한 희망을 주었다. 김민종이 불렀던 드라마 OST '세상 끝에서의 시작' 역시 희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40%대로 평균 시청률을 기록해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로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다.
2000대 후반 이후, 직장인 드라마는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 드라마는 배경만 회사인 드라마가 아니라 직장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와 업무를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직장 내 계급, 갈등 양상, 업무를 표현하는 상황 역시 이전보다 훨씬 세밀하고 현실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5년 방영된 '신입사원'은 드라마에서 가장 처음 비정규직 문제를 소재로 가져왔고 2007년 처음 방영한 '막돼먹은 영애씨'는 10인 미만의 직원들이 일하는 영세한 사업장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10년째 이어가는 중이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다'신입사원' (2005)
사회 초년생들의 직장 이야기를 다룬 코믹한 설정으로 풀어낸 드라마.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던 2000년대 초반, 삼류체대를 졸업한 백수가 입사 시스템 오류로 대기업에 들어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우연히 대기업에 들어간 강호를 중심으로 각각 처지와 배경이 다른 신입사원들이 등장한다.
신입사원들 사이에서 로맨스가 싹트는 등 지나치게 드라마적인 설정으로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했지만 당시 한국 드라마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사내 학벌문제, 비정규직 문제와 차별, 대기업-하청업체간의 갑을관계를 주요 스토리로 다뤘다. 특히 여주인공을 비정규직 사원으로 설정해 사내 비정규직 문제와 기업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았다는 점에서 직장 생활 문제를 진보적으로 접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乙들의 초상… 영애씨는 10년째 근무 중'막돼먹은 영애씨' (2007~현재)
2007년부터 총 253회가 방영된 이 드라마는 10인 이하 영세사업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드라마는 반어(反語)로 점철돼 있다. 그녀의 전(前) 직장이었던 디자인 회사 '아름다운 사람들'의 구성원은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인쇄업체 '낙원사' 역시 절대로 낙원이 아니다. 점심때 6000원짜리 순두부를 주문하면 "비싼 것만 먹는다"며 불같이 화내는 사장이 있고, 200만원이 될락 말락 한 월급과 멸시와 그래도 꽉 붙잡아야 하는 징글징글한 생활이 있다.
국내 기업의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그러니 영애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미생(未生)인 셈이다. 시즌 1~8을 연출한 박준화 PD는 "소시민적 정서와 일상적 희로애락이 롱런의 가장 큰 힘"이라고 말했다.
극사실주의 묘사와 함께 이 드라마를 '다큐드라마'로 떠오르게 한 데는 내레이션의 힘이 크다. 전 시즌 내레이션을 맡은 박형욱 성우는 "목소리에 괜한 기교를 넣어 감동을 자아내려 하지 않는다"면서 "직장 여성이 여름에 겨드랑이 털을 깎고, 화장실에서 거하게 속을 비워내는 속사정만으로 호소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기사 더보기
아내의 사교력이 곧 남편의 승진 '내조의 여왕' (2009)
학창시절엔 잘 나갔지만 지금은 말단사원의 아내가 된 천지애가 상사의 아내가 된 여고동창생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천지애는 남편의 승진과 성공을 위해 상사 아내들과의 모임에 온몸을 던진다. 여기서 아내들의 모임도 직장의 남편들처럼 위계질서를 이루며 하나의 사회로 작동한다.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남편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과 동시에 이에 발맞춰 움직이는 아내들의 세계를 함께 보여준다. '내조의 여왕' 박지은 작가는 "공군 장교와 결혼한 후배가 상관 부인들 모시는 모습을 보고 드라마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과거 직장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정의롭고 이상적인 가치관으로 사랑을 받았다면, 2010년대 주인공들은 조금 까칠하고 비사교적이지만, 우리가 현실에서는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대신 해주는 '사이다' 캐릭터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의감으로 정정당당하게 성공하는 직장인 이야기보다 답답한 회사 생활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직장 이야기가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일터에서 살아남은자, 천하를 얻으리라'샐러리맨 초한지' (2012)
신약 개발을 둘러싼 대기업 간의 암투와 경쟁, 그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대한민국 샐러리맨들의 애환과 성공스토리를 담은 드라마이다. 가진 것 없는 삼류대학 출신의 촌스러운 남자 유방이 해외 명문대를 나온 항우에 대적해 제약회사를 가지게 되는 스토리는 고전 초한지에서 하급관리 출신이었던 유방이 장수 집안 출신의 항우를 이긴다는 기본 구조와 비슷하다. 드라마가 초한지를 컨셉으로 했고 등장인물의 대다수가 초한지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왔기 때문에 고전과 드라마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유방의 성공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지키면서 직장 내 왕따 문제·성희롱 문제 등을 다뤄 방영 당시 개념 드라마로 일컬어졌다. 가진 것 없이 촌스러운 말투와 특유의 재치로 위기를 헤처나가는 유방의 모습은 우리 시대 샐러리맨을 대표하며 많은 직장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우리에게 칼퇴를 허하라'직장의 신' (2013)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주인공 미스김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자발적 비정규직이다. 그녀가 비정규직을 택한 이유는 귀찮은 인간관계, 도의적 책임, 사내 정치, 추가 근무 등 직장생활에서 발생하는 기타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이런 것들이 당연하게 받아지는 현실에서 맡은 바 할일을 다했으니 당당히 "No"라고 외친다.
비정규직임에도 칼같은 업무처리 능력과 로봇같은 태도로 '갑'의 위치로 올라서는 그녀는 꼭 필요한 곳에서 어려움에 빠진 동료를 위해 할 말을 하는 따뜻한 면도 지녔다. 미스김과 주변 인물들이 겪는 직장 생활의 현실을 잘 담아 위로하는 한편, 비현실적인 미스김의 캐릭터와 태도로 보통 직장인들의 환타지를 충족시켜줬다. 미스김을 통해 우리 직장 문화가 얼마나 개인의 삶을 소모하는지 표현한 것이다.
乙은 안다, 이 드라마가 현실임을'미생' (2014)
아프니까 직장인이다. 일이 없으면 불안하며, 일이 많으면 힘들다. 긴 하루를 마치고 술 한잔 하다 보면 이게 사는 건지, '살아지는' 건지 몽롱하다. 그래서, 우리는 '미생(未生·생사를 모르는 돌을 뜻하는 바둑 용어)'이다. 드라마 '미생'은 이렇게 아픈 직장인들 얘기다. 종합상사 인턴·대리·과장 같은 이들이 주인공이다.
이런 이들이 주연이었던 게 'TV 손자병법' 말고 몇 편이나 됐던가. 제작진은 욕심내지 않고 원작을 그대로 재현한다. 상수(上手·뛰어난 한 수)라 하겠다. 특히 배우 캐스팅이 성공적이다. 주연을 맡은 임시완·이성민·강소라는 만화 속 캐릭터를 자신의 역량에 맞게 재해석할 줄 안다. 류태호·성병숙 등 조연들도 하나같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원작의 팬이 아니라도 공감할 수 있는 디테일도 장점이다. 출근 첫날 복사용지 위치를 몰라 헤매고,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어 혼자 앉아있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잘못이 없는 부하직원을 혼내고 술자리에선 사과 대신 다른 엉뚱한 칭찬을 하는 상사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이 드라마는 매일 출근해서 일하다 혼나고 반성하는 보통 직장인들의 삶이 사실 얼마나 비범한 것인지 깨닫게 해준다. 하루를 버티려고 온갖 고생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다 보면 스스로 묻게 된다. 나는, 아니 우리는 살아있는가. ▶기사 더보기
갑에 맞서는 을의 연대기'욱씨남정기' (2016)
대기업 황금화학 화장품 부서의 옥다정 팀장이 하청업체 러블리즈 코스메틱의 본부장으로 오게되면서 생기는 일들을 담았다. 까칠하며 불합리에 당당하게 맞서는 옥다정 본부장을 중심으로 러블리즈 코스메틱의 자립기를 함께 그려낸다.
갑에 맞서는 을의 연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을의 중심에는 갑이었다가 을로 내려온 본부장 옥다정과 실속없이 사람만 좋아 매사 손해보는 남정기 과장이 있다. 원료 업체 빼돌리기, 갑자기 주문 취소하기, 원천 기술 트집잡기 등 대기업 황금화학의 불합리한 요구에 순응하는 러블리즈 코스메틱 사람들에게 새로 온 옥다정 본부장은 자신의 성질대로 정면돌파해야 한다며 다그친다. 대기업 vs 하청업체, 옥다정 본부장과 남정기 과장 사이의 갑을 관계에서 드러나는 갈등, 그리고 회사 전체에 깔린 성차별적 요소에 대해 옥다정 본부장이 대처하는 장면이 통쾌하다. 능력과 원칙으로 무장해 상대를 할 말없게 만드는 점에서 직장의 신에서 김혜수가 맡았던 미스김 역할과 비슷하지만, 주로 업무 능력으로만 대처했던 미스김과 달리 옥다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맞선다.
스스로의 존재감과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할 말을 하는 파워 우먼 옥다정은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는 남정기 과장을 비롯해 러블리즈 코스메틱 직원들을 조금씩 변화 시킨다.
김과장, 자넨 사이다 같아 좋아'김과장' (2017)
'김과장' 4화의 한 장면. 경리부에 막 입사한 경력 사원 김성룡(남궁민) 과장이 안하무인 회장 아들(동하)과 맞서 싸운다. 법인카드로 긁은 945만원을 비용 처리해 달라고 하자 '호텔 스위트룸' '클럽' '명품 매장' 등 업무 연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지출 내용을 직원들 보는 앞에서 줄줄이 읊어대며 골탕을 먹인다. '#사이다'라는 해시태그(hash tag·검색이 용이하도록 단어 앞에 #을 붙이는 방식)가 달린 이 클립(clip·방송 하이라이트 영상)은 이틀 만에 포털 조회 수 25만 건을 올렸다.
'김과장'의 부상은 최근 불고 있는 '사이다 콘텐츠' 열풍과 궤를 같이한다. '사이다'는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호평(好評)을 단순화한 표현. 답답한 속 뻥 뚫어주는 음료수 '사이다'처럼 시청자 마음을 통쾌하게 만든 콘텐츠에 붙는 애칭이다. 발 빠른 전개, 선명한 캐릭터, 명징한 메시지 등 웰메이드 드라마가 갖춰야 할 속도감과 완성도가 이 단어에 함축돼 있다. 반대로 답답한 전개가 이어지면 먹을수록 목이 멘다는 뜻의 '고구마'란 평가가 달린다.
극 중 김성룡과 윤하경(남상미)은 꼰대 상사에게 '할 말 다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직언(直言)이 사라진 사회, 엉망진창 시국, 부조리 묵살하는 직장 생활 등 도처에 깔린 '고구마' 같은 현실에 피로감을 느낀 대중은 '사이다 콘텐츠'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낀다. 제작사 로고스필름 관계자는 "시청자가 속 시원해할 만한 '사이다 코드'를 버무린 것이 직장을 배경으로 한 '김과장'의 흥행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기사 더보기
과거 직장을 그리는 드라마가 재벌 2세와 권력 간의 암투, 대형 프로젝트, 직장내 로맨스 등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다뤘다면 지금 직장 드라마는 이면지 활용하기, 야근 후 회사 화장실에서 조는 모습 등 직장인들에 관한 세밀한 묘사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대변하고 저항하는 인물들을 하나씩 배치해 공감을 얻고 통쾌함을 선사한다.
현실의 직장이 '행복한 곳'이라면 직장을 배경으로 한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인기가 없었을 것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임금근로자 1800만명 중 비정규직이 591만명. 월급을 받는 근로자 셋 중 하나가 비정규직이다.
결국 직장인을 내세운 콘텐츠가 가리키는 것은 생존이다.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걸로 오버했다간 자기 목만 날아간다"는 미스 김('직장의 신')이나 회장이 된 친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이 부장('전설의 주먹'), 일 중독 때문에 맨날 눈이 벌건 오 팀장('미생') 모두 생존 경쟁이란 맥락 아래서 그려지고 있다. ▶기사 더보기
사진 출처 = 각 드라마 홈페이지 스틸 컷 및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