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문화유산인 고소설(古小說) 필사본이 자칫하면 사라지고 고소설 연구도 어려움에 빠질 것 같아 용기를 내 역주본(譯註本)을 출간하게 됐습니다."

김광순(78·사진) 경북대 명예교수(택민국학연구원장)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소설 필사본을 현대적인 우리말로 바꾸어 책으로 간행하는 사업을 4년째 하고 있다. 고소설 100편을 목표로 잡아 '김광순 소장 필사본 고소설 100선'으로 불린다. 새롭게 탄생한 고소설은 상당수가 이본(異本)이거나 희귀본이다. 특히 '양추밀전' '승호상송기' '윤선옥전' '취연전' 등 4편은 원전 자체가 유일본이어서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김 명예교수는 40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한 국문학 분야 석학이다. 경북대에서 정년 퇴임한 뒤 2003년 택민국학연구원을 세웠다. 그는 작년 말까지 대구시와 택민국학연구원 이름으로 고소설 40편을 요즘 우리말로 번역한 책 24권을 펴냈다. 앞으로 2년에 걸쳐 고소설 60편을 책 16권에 담아내는 역주 사업이 끝나면 우리 고소설 100편이 총 40권의 책으로 빛을 보게 된다.

김 명예교수는 대학원 시절부터 우리 문학의 뿌리인 고소설에 매료됐다. 필사본이라도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전국을 뛰어다녔다. 그는 "주인이 팔려고 하지 않으면 직접 베끼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했다.

조선시대 고소설은 한문본과 국문본이 공존하고 대다수가 필사본으로 유통됐다. 김 명예교수가 지금까지 확보한 고소설 필사본은 모두 474권. 그를 비롯해 정병호·권영호·강영숙·백운용·박진아(이상 경북대), 김동협(동국대), 신태수(영남대) 교수 등 8명이 3년 전 대구시 지원을 받아 번역 작업에 뛰어들었다. 한지에 붓으로 쓴 수백 년 된 필사본이 삭아 없어지기 전에 번역하자는 뜻으로 뭉쳤다.

"필사본 고소설은 붓으로 흘려 쓴 데다 띄어쓰기가 없고 오탈자도 많아요. 또 필사자가 거주한 지역의 사투리가 뒤섞여 있고 한자어가 고어체로 적혀 있습니다."

역주본에는 해당 고소설의 의미와 내용을 정리한 해제, 현대어로 번역한 내용, 원문을 차례로 담았다. 해당 분야 전공자는 물론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국문학계도 "대중과 소통하는 고소설 역주 사업"이라거나 "한국문학사를 다시 써야 하는 쾌거"라고 평가한다.

김 명예교수는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임진왜란 때 경주 금오산(현 남산) 용장사 석굴에 있다가 일본으로 반출됐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보지도 못했지만 일본에선 두 차례나 간행됐다"면서 "일제강점기에 최남선이 판본을 발견하고 역수입해 1927년 '계명' 19호에 실으면서 한국 최초의 소설이라 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소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하는 박물관을 대구에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