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은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지만 카드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합니다."
핀란드 헬싱키에 사는 티모 히니넨(27·회사원)씨는 지난 1일 오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한 달치 교통비 70유로(약 8만6000원)를 교통카드에 충전했다. 회사 앞 카페에서 0.5유로(600원)짜리 초콜릿을 사면서는 직불카드를 내밀었다. 지갑 대신 스마트폰 케이스에 카드 1장과 신분증만 꽂고 다니는 티모씨는 "현금을 갖고 다닌 지 3~4년은 된 것 같다"며 "가게에서 오히려 현금 내미는 손님을 귀찮아한다"고 말했다. 핀란드 내 현금인출기기(ATM) 숫자는 20년 전 2500개에서 1500개로 줄었고, 일부 은행은 ATM 기기로 현금을 인출할 때마다 수수료를 받기 시작했다. 핀란드를 비롯해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이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에 성큼 다가서고 있다.
◇버스표 현금으로 못 사? 노숙인도 모바일로 기부받는다?
덴마크는 지난 1월 1일 화폐 직접 생산을 중단했다. 지폐와 동전은 필요한 만큼 다른 나라에 위탁 생산해 들여오고, 장기적으로는 전자화폐 'e크로네' 도입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노르웨이와 스웨덴도 이미 화폐 생산을 외국에 위탁했다. 덴마크 최대 은행인 단스케뱅크가 2013년 도입한 모바일 결제 시스템 '모바일페이'는 덴마크 전체 인구 560만명 중 300만명이 사용하고 있다. 단스케뱅크는 노숙자도 모바일페이를 통해 기부를 받을 수 있도록 작년 10월 노숙자연합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노숙자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어 모바일 기부에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1661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지폐를 발행한 스웨덴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현금을 안 쓰는 나라로 불리고 있다. 스웨덴의 2015년 현금 결제 비율은 20%로 5년 전(39%)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스톡홀름에서는 2007년부터 버스·지하철 요금을 현금으로 지불할 수 없도록 했다. 미리 충전된 교통카드만 사용 가능하다. 시내 곳곳 상점에는 '현금 없는 가게(Kontantfri butik)'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대다수 소매점과 노점상이 지불 수단을 카드로 한정하고 있고, 손님들이 현금을 내밀어도 거절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교회 헌금도 오래전부터 카드 결제 기계를 이용하는 추세다. 스웨덴 은행들은 한 달 결제 금액을 제한한 어린이 대상 직불카드를 발급하는 등 카드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2030년이면 현금 사용이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노르웨이 최대 은행 DNB도 지난해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6%만이 일상생활에서 현금을 사용한다"며 "대부분 은행 지점이 현금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자연히 금융 서비스와 IT 기술을 결합하는 핀테크 산업도 성장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카드 결제 방식을 보다 간편하게 바꾸는 모바일 지급 결제 분야나 모든 디지털 화폐의 거래 내역을 순차적으로 기록하는 '블록체인' 기술 개발 등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핀란드 핀테크 기업 '유니클'은 얼굴 인식 기술을 통해 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고, 스웨덴에서는 모바일 카드 결제 애플리케이션 '아이제틀'의 매출액이 작년 한 해 동안 30%나 늘었다. 스마트폰과 소형 카드리더기만 있으면 어디서나 카드 결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계산대를 갖추기 어려운 작은 점포나 노점상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생활 침해나 노년층 불편 등 우려도?
덴마크 국세청은 지난 2012~2014년 사이 덴마크의 지하경제 규모가 3분의 1 정도 줄었다고 발표했다. 현금 거래 축소가 검은돈의 규모를 줄이는 데 기여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북유럽 각국은 '현금 없는 사회'가 되면 화폐 생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탈세나 테러, 마약 등 범죄 활동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모든 금융 거래 내역이 시간과 장소까지 세세하게 전자 시스템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탈세가 감소하면 정부 세수가 자연스레 늘고 뇌물 수수, 마약 거래, 밀수 등 불법 거래는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금 없는 사회'는 보안과 개인 정보 유출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개인의 소액 결제 내역까지 정부나 기업의 손에 통째로 넘어가거나 해킹당할 경우 개인의 사생활이 '빅 브러더'에 감시당할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라르스 로데 덴마크 중앙은행 총재는 작년 12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디지털 화폐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거래 내역을 추적하는 기술을 도입하는 등 현금을 대체할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면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는 기술 개발이 아니라 개인 정보에 관한 정부와 국민 간의 신뢰를 어떻게 쌓느냐는 것"이라고 밝혔다.
현금 없는 사회로 빠르게 이행하면서 현금을 선호하고 신용카드나 모바일 결제에는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이 감수해야 할 불편이 크다는 불만도 나온다. 지폐나 동전 등 실물 화폐를 주고받지 않다 보니 소비가 헤퍼지는 경향도 나타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