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신임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브룩스 브러더스(Brooks Brothers·이하 브룩스) 코트를 입었다는 기사를 보름쯤 전에 썼다. 그랬구나. "결론은 버킹검"이라던 오래전 신사복 광고처럼 천하의 트럼프도 결국 브룩스구나. 원고 전송 버튼을 누르면서, 말끝마다 미국을 부르짖어온 그가 스타일에서도 확실한 미국식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미국 스타일은 사실 한국에선 좀 억울한 데가 있다. 몸에 착 감기는 재킷에 복사뼈가 드러나는 바지만이 슈트의 전부인 양 유행하는 사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한국 남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소매가 손등을 덮는 재킷을 입고 발목에 주름이 최소 두 번은 잡히는 바지를 입게 된 것이 큰 옷 좋아하는 미국 영향 때문이라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있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에 이탈리아 명품 브리오니의 슈트를 즐겨 입다가 "미국인 일자리를 늘린다더니 유럽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입는다"고 공격받았다. 그랬던 그가 대통령직 첫발을 떼는 날 브룩스를 선택했다니. 브룩스는 단순한 미국 브랜드이기 전에 아메리칸 스타일의 상징 아니던가.
그 기대가 무너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려고 해도 트럼프의 스타일은 미국식이라기엔 도저히 무리였다. 그의 슈트는 빌려 입은 옷처럼 헐렁했고, 심지어 구깃구깃했다. 미국 슈트가 여유 있고 넉넉하다지만 이건 실루엣의 문제가 아니라 사이즈 선택의 실패다. 슈트를 입고 서 있을 땐 재킷의 단추를 잠그는 게 예의이건만 그는 앞섶을 열어젖힌 채로 유세에 나섰고 취임 선서를 했으며 집무실을 활보했다. 또 넥타이는 왜 그리 길게 매는지? 트럼프의 넥타이는 넥타이 맬 때 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인 벨트 버클보다 항상 주먹 하나쯤 더 내려와 있다. 오히려 앉아 있을 때 양복 단추를 잠그는 일이 많아서 재킷 아래로 삐쭉 얼굴을 내민 넥타이가 자주 카메라에 잡힌다.
정치권의 이단아 트럼프는 옷차림에서도 기존의 규범과 거리를 두려는 것일까? 그러나 파격(破格)은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법이다.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넥타이를 하지 않는 날에는 대부분 스트라이프 타이를 하는데, 거의 예외 없이 줄무늬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다. 기원을 따지자면 영국식이다. 옛날 영국군 연대들이 부대 상징색을 넥타이에 넣으면서 왼쪽 가슴의 심장부터 오른손의 검으로(from heart to sword) 이어지는 방향을 따른 데서 유래했다. 이런 무늬가 각 연대의 상징이 되자 브룩스는 누구든 소속에 구애받지 않고 맬 수 있도록 방향을 뒤집은 넥타이를 내놨다. 이렇게 해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줄무늬가 미국식으로 자리 잡았다.
전화 통화에서 외국 정상을 윽박지르고 물고문을 지지한 트럼프의 행보 역시 감점 요인이다. 슈트는 신사(紳士)의 옷이다. 이번 미국 대선이 있기 한참 전에 머리칼을 일렬횡대로 줄 세운 듯한 그의 헤어스타일을 두고 "모든 것을 뜻대로 통제하려는 확신의 표현"이라고 해석한 책이 있었다. 기업가로서는 그런 성격이 강점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말 한마디로 국제 질서를 좌우하게 된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일말의 기대가 무너진 순간 70세 은퇴자의 스타트업 재취업기를 그린 영화 '인턴'을 떠올렸다. 로버트 드니로가 표현해낸 '미국 신사'의 완벽한 모습에 감탄한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신문사에서 노동 분야를 취재하던 한 친구는 영화를 보며 임금피크제나 노년 일자리 문제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IT 담당이었던 나는 스타트업 사무실의 첨단 기기에 애플 로고가 난무하는 와중에 일흔 살 인턴의 구식 피처폰에만 서글픈 삼성 마크가 보인다는 데 주목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튼을 누르면 '지잉~'하고 돌아가는 전동식 넥타이 걸이가 화면에 등장한 뒤부터 벤(로버트 드니로)의 스타일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벤은 브룩스 카탈로그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모습이다. 아무도 정장을 입지 않는 스타트업의 남자들 사이에서 벤은 "이게 편하다"며 슈트를 고집한다. 차분한 감색 또는 회색에 단추가 2개 달린 기본 중의 기본 스타일이다. 벤의 슈트는 최신 유행은 아니지만 시류에 상관없이 깊이를 더해온 그의 원숙미를 닮았다.
벤은 입사 지원용 자기소개 동영상을 찍던 날까지 포함해 일할 때는 어김없이 버튼다운(button-down) 셔츠를 입었다. 아이비리그를 중심으로 하는 프레피룩(preppy look)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다.
영화에서 벤이 입었던 의상 대부분은 브룩스와 히키 프리먼(Hickey Freeman)의 제품들이다. 두 곳 모두 뉴욕에서 시작해 100년이 넘은 미국 대표 남성복 브랜드다. 이들보다 더 값비싸고 더 고급스러운 슈트는 많지만 면접에서 자신의 강점으로 "브루클린에서 평생 살아 주변 지리에 빠삭하다"는 점을 내세웠던 벤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격인 브랜드를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벤은 평생 입어온 슈트가 '제2의 피부'처럼 된 인물이다. 배려나 친절 같은 신사의 덕목이 몸에 배어 있다는 뜻이다. "손수건은 빌려주기 위한 것"처럼 다소 노골적인 대사는 물론, 벤의 사소한 행동에서도 그런 면모는 묻어난다. 예컨대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던 벤에게 상사 줄스(앤 해서웨이)가 피자를 권하는 장면. 줄스가 다가오자 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 단추를 채운다. 그리고는 매번 일어날 필요 없다는 줄스에게 말한다. "워낙 습관이 돼서요." 딸뻘의 상사를 고까워하는 기색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드니로는 작년 미국 대선 기간에 "트럼프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고 싶다"고 했다. 비록 얼굴은 아니지만 이 영화로 트럼프의 스타일에는 펀치 한 방을 날린 셈이다. 오랜만에 '인턴'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트럼프 스타일이 어딘가 엉성하다고 느꼈던 분들, 미국 남성복 스타일의 정석(定石)을 접하고 싶은 독자들께도 이 영화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