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공원 앞, 우리가 '애정'했던 장소였죠."
압구정동 토박이 민정(39·가명)씨는 2000년대 중반 '도산공원의 랜드마크'였던 브런치 카페 '느리게 걷기'를 추억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낮이면 친구들과 햇살이 들어오는 테라스에서 커피와 녹차빙수를, 밤이면 살랑이는 바람에 '칠리떡볶이'를 안주 삼아 먹었다. 당시 '트렌드세터'라면 느리게 걷기를 한 번쯤 방문했다. 영원할 것 같았지만 2008년 자취를 감췄다. 대신 미국 명품 브랜드 '랄프 로렌'이 들어섰다. 한 블록 지나선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도 자리했다. 그렇게 도산공원 일대는 국내외 내로라하는 패션, 편집매장이 속속 들어서며 명품 거리를 만들어 갔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전세가 역전됐다. 의류 매장으로 가득했던 골목은 다채로운 음식점으로 탈바꿈했다. 세월을 건너뛰어 느리게 걷기의 바통을 여러 레스토랑이 이어받았다. 젊은 셰프들은 좀 더 다양한 연령층이 편하게 들러 식사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가격의 메뉴를 선보인다. 도산대로변 'CGV 청담씨네시티' 바로 옆엔 '쉐이크쉑' 2호점도 문을 열었다. 2017년 도산공원의 달라진 풍경.
패션숍 지고, 레스토랑 들어서
"도산공원 일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fine dining restaurant·고급식당)이 많았지만 '식당가'는 아니었잖아요. 우리 매장도 그전엔 패션디자이너 홍혜진씨가 운영하는 '더 스튜디오 케이'였어요. 골목에 옷 가게가 많았는데 최근 순식간에 음식점들로 바뀌었어요."
지난해 10월 문을 연 이탈리안 레스토랑 가드너 아드리아를 운영하는 김신 셰프의 말이다. 가드너 아드리아 맞은편 이탈리안 레스토랑 볼피노는 패션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 매장을 밀어내고 들어왔다. 볼피노 옆 프렌치 레스토랑 르꽁뜨와 역시 명품 브랜드 '발란타인' 매장이 나간 자리를 메웠다.
1년 전, 이태원에서 이사 온 르꽁뜨와 서문용욱 셰프는 "내가 추구하는 요리가 이태원에선 저변을 넓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아무래도 강남, 도산공원 일대가 주차 등 접근성이 편하고 미식(美食) 수준이 높아 매장을 옮기기에 적합한 장소였다"고 했다.
르꽁뜨와 건너편에는 '마스터셰프코리아4'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던 송훈 셰프의 아메리칸 그릴 레스토랑 에스테번이 있다. 한복점 '솜씨명가'가 있던 자리다. "오픈 초기엔 레스토랑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모험'이었어요. 우리 매장도 웨딩스튜디오가 있던 데라 주변에서 '왜 옷 가게에 식당을 해?'라며 처음에 말렸거든요. 지금은 젊은 층도 기념일에 한식을 즐길 정도로 많이 찾아요." 2012년부터 모던 한식당 '민스키친'을 운영해온 김민지 셰프가 말했다.
들썩이는 도산공원, 셰프도 고객도 젊어져
도산공원 일대는 여전히 지갑 두둑한 사모님들이 우아하게 식사를 즐기는 공간이지만 20~30대 유입이 두드러지고 있다. 신세대 셰프들의 레스토랑 개업이 한몫했다. 또한 '요섹남'들이 만드는 아름다운 요리가 궁금해 도산공원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학원생 황현경(26)씨도 그중 한 명. 그녀는 생일을 맞아 이탈리안 레스토랑 아우어 다이닝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예쁜' 요리에 혹해서 왔어요. '우니(성게알) 파스타'를 먹었는데 만족스러워요."
맛집 탐방이 취미인 민유리(23)씨도 최근 압구정 로데오거리, 청담동보단 도산공원을 자주 방문했다. 이미 '핫'하다는 레스토랑 3곳 이상 발도장을 찍었다. 민씨는 "양질의 음식을 먹는 데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연희동 이탈리아 요리 선생님 김진숙씨는 "아우어 다이닝의 20대 요리사 강석현씨가 수산시장에서 고등어를 사거나 아침마다 파스타 생(生)면을 만드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걸 봤다. 정성 담뿍 담긴 '그 맛'이 궁금해 몇 번 도산공원을 찾았다"고 했다.
번잡한 가로수길 피해 호젓함 찾아 유턴
과거 도산공원 일대엔 '만만하게' 갈 만한 카페가 적었다. 요즘엔 레스토랑 파급 효과로 카페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지난해 10월 문을 연 꼼뽀스텔라는 이미 인스타그램에선 유명하다. 파티시에 권영미씨는 "예전에 이 일대에서 식사를 자주 했는데 가볍게 차 마실 곳이 마땅치 않아 아쉬웠던 기억이 있어 카페를 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된다"며 웃었다.
최근 강남구청이 조사한 '도산공원 주변 일반·휴게음식점 현황'에 따르면 2014년 94곳에서 2015년 108곳, 2016년 126곳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신규 음식점은 2014년 9곳에서 2016년 18곳으로 2배 늘었다.
도산공원으로 음식점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이미 포화 상태인 청담동과 비교했을 때 임차료는 비슷하지만 권리금이 없거나 낮은 것이 매력적이라 도산공원 주위로 몰리는 것"이라고 했다.
도산공원 특유의 호젓함과 여유로운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2004년부터 도산공원에서 레스토랑 마이쏭 등을 운영하는 이송희 셰프는 "가로수길, 경리단길의 번잡함이 싫어서 도산공원 특유의 여유롭고 호젓한 분위기를 찾아 '유턴'하는 이가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복합문화공간도 점점 늘고 있다. 오는 3월 퀸마마마켓 맞은편엔 현대카드 고객 체험형 공간 쿠킹 라이브러리가 들어선다.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카페, 쿠킹스튜디오, 도서관 등이 들어간다. 현대카드 측은 "수준 높고 민감한 미식 트렌드와 강남 한복판 고즈넉함을 동시에 누릴 수 있어 도산공원을 택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