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를 이끈 스타 PD 서수민(45·사진 오른쪽), 정우성·이정재 같은 톱스타 찍은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조선희(46). '잘나가는' 두 사람은 한때 반지하 단칸방 나눠 쓰던 룸메이트였다. 그들의 스물일곱해 우정을 들었다.

"화장실하고 욕실이 집 밖에 있어서 비 오면 우산 쓰고 나왔잖아. 옆방 언니 연탄가스 마신 다음 달 무서워서 동치미 국물 엄청 먹었던 거 기억나?" 까만 머리 깡총하게 묶은 서수민(45) PD가 추억을 꺼낸다.

"네 것 내 것 싸운 기억도 없어. 서로 탐낼 만한 소지품이 없었으니까."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사진작가 조선희(46)가 맞장구친다. 한땐 숨기고팠던 가난이 이젠 꺼뜨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된 모양이다. 그 시절 꺼뜨리지 않으려 당번 세워 지켰던 연탄불처럼.

“아, 학교 다시 다니고 싶어! 이렇게 학교가 좋았어?” 27년 전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된 연세대 신촌캠퍼스에서 두 사람이 목청 높였다. 가난 때문에 대학 생활을 만끽할 여유가 없었단다. 그래도 이들은 말한다. 결핍이 있었기에 오늘의 성공이 있었다고.

'개그콘서트' 황금기를 이끌고 '프로듀사' '마음의 소리' 등을 만들어온 스타 PD 서수민, 정우성·이정재·이영애 같은 톱스타들 사진 찍으면서 연예인만큼 유명해진 사진작가 조선희. 각자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프로란 사실 빼고 연결 고리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최근 함께 '촌년들의 성공기'(인플루엔셜)라는 책을 냈다.

의외의 조합에 고개 갸웃하는 이가 많지만, 사실 두 사람은 27년 지기 단짝 친구다. 연세대 의생활학과 90학번 동기. 게다가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2만원짜리 이대 후문 반지하 단칸방에서 3년 동안 살 부대끼며 살았다. 늘어난 속옷 널어주고, 지지리 궁상 연애 상담 참 많이도 했다. 두 사람 인연이 시작된 연세대와 신촌의 호프집에서 이들을 만났다.

반지하 자취방 시절 보낸 단짝

―알고 지낸 지 27년, 새삼스레 책 낸 이유가 궁금해요.

"출판사 대표가 선희 친구예요. 수다 떨다가 그 친구가 책 제안을 했는데 농담 삼아 '싫어. 선희랑 같이라면 모를까'라고 했다가 코 꿴 거죠."

"제목엔 '성공기'라 돼 있지만 '마흔여섯 살 중년 여성의 성장기'랄까요. 배경 없는 우리 둘이 20여년 업계에서 버텨온 내용이, 요즘 친구들한테 힘 되지 않을까 싶어 용기 냈어요."

―제목이 도발적입니다.

"각자 서울에서도 세련된 사람 모인다는 강남, 여의도에 뿌리내렸지만 나는 왜관, 수민이는 포항 출신이에요. 시골 출신이죠. 그래서 딱히 '촌년'이라 붙였다기보단 길들여지지 않고, 순수한 열정 가진 여자들을 통칭하고 싶었어요."

"야야, 난 신호등·육교 있는 시(市) 출신, 너는 읍(邑) 출신. 천지차이야. 1학년 때 너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록색으로 '깔 맞춤' 한 거 기억나? 뭐 저런 애가 있나 싶었어. 서울 애들하고 놀고 싶었는데, 네가 친한 척해서 괴로웠다니까. 깔깔." 누가 예능 PD 아니랄까, 진담과 농담 사이를 활강한다.

닮은 듯 다른 두 빛깔

대학 1학년 시절 MT 가기 전 신촌 역 앞에서. 뒷줄 맨 왼쪽이 조선희, 왼쪽부터 다섯째가 서수민이다.

"난 맥주!"(조) "난 아메리카노!"(서) 주문 음료처럼 두 사람은 다른 빛깔이었다. 경상도 어투가 조금 남아 있는 서수민과는 달리, 조선희는 '패션 화보'의 '화' 자를 '하'로 발음할 정도로 억센 경상도 억양이 있었다.

"다르죠. 난 왜관 '대구만물상회' 점방(店房) 집 2남 3녀 중 가운데, 수민이는 서울대 법대 나온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 집 1남 2녀 중 가운데."

"솔직히 선희는 거칠고 투박하고, 무례했어요. 사람들은 선희가 성공하고 나서 거만해졌다는데 선희는 원래 그랬어요." 핀잔 같은데 곱씹어보니 칭찬이다. "선희의 무모함, 직관적으로 앞뒤 안 재고 달려가는 추진력이 부러웠어요."

"난 몰라서 거칠었던 거지. 넌 못 하는 게 없었어. 똑똑하고 세련됐고."

"맞아, 난 너무 똑똑했어." '진지 모드'로 들어선 조선희가 서수민의 자화자찬에 포복절도한다.

신입생 때 사진 동아리도 같이 들어갔지만 서수민은 두 달 만에 나와 연극 동아리로 옮겼다. "실은 엄마가 사진기 살 돈이 없다셔서 나왔던 거야." 서수민이 케케묵은 비밀을 이제야 털어놨다. "진짜? 난 전공 필수품 재봉틀 안 사고, 카메라 산 거였는데." "야, 내가 네 과제까지 재봉틀로 다 박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또 티격태격이다.

지지리도 안 풀리던 백수 시절 이대 후문 쪽 자주 가는 카페가 있었다. 하루는 카페가 문 닫아 같이 헛걸음한 백수 남학생과 근처 식당에 가서 1200원짜리 볶음밥을 나눠 먹었다. 같은 학교 정외과를 졸업한 남학생은 영화감독 지망생이랬다. "몇 해 전에 탕웨이가 김태용 감독하고 결혼한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때 그 백수 남학생인 거라. 나중에 탕웨이 사진을 촬영했는데 김태용 감독이 촬영장에 왔더라고요. 우릴 기억하고 있었어요."

누구에게나 '때'가 있다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던 조선희가 김중만의 제자로 사진계에 발 딛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서수민도 1995년 11년 만에 뽑은 여자 PD로 KBS에 입사했지만 2010년 '개그콘서트' 맡기 전까지 이렇다 할 히트작을 못 내놨다.

"백수 때 수민이 언니 결혼사진을 찍었어요. 그 앨범을 들고 수민이랑 아현동 웨딩숍을 돌아다녔어요. 한 군데에서 의뢰가 와서 사진을 다 찍었는데 계약금까지 토해내라는 거예요. 특이하게 신랑 신부 이마를 확 잘라 찍어놨거든요."

"주목받기 전엔 애 둘 딸린 처치 곤란 아줌마 PD였어요. 2003년 '입봉'했지만 변변한 히트작도 없었고. 중간에 포기했으면 지금의 성공은 없었겠죠. 어떤 회사가 기념품으로 나눠준 때밀이 수건에 이런 문구가 있었어요. '다 때가 있다.' 기막히죠. 나를 믿고, 치열하게 살다 보면 때가 오나 봐요."

억척같아 오해도 많이 샀다. 거친 사투리 쓰는 조선희는 더 심했다. 인터넷에 '조선희'를 쓰면 연관 검색어로 '성별' '인성'이 딸려 나온다. 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독설하는 캐릭터로 설정된 탓도 있다. "대학 나오셨다고요? 결혼도 했다고? 애도 있다고?" 조선희는 "센 이미지 때문에 나보고 사람들이 세 번 놀란다"며 웃었다.

결핍은 나의 힘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이 뭐였나요.

"'촌년 방임 교육'이랄까요? 부모님이 장사하시느라 바빠 일일이 간섭할 틈이 없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대구로 나와서 공부했는데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지요. 초등학교 5학년짜리 제 아들도 자립적으로 키우려 해요." 둘째 딸이 박순천 같은 여성 정치인이 되길 원하셨던 아버지는 조선희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녀의 방에는 아버지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아버지가 유언도 못 하고 갑자기 세상 뜨셨어요.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더니 '남편한테 잘하고, 식탐을 줄여라'였어요. 고집불통 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셨던 거죠. 식탐 줄이란 건 우습지만 딸자식이니 할 수 있는 얘기고." 두 사람은 고인이 되신 두 아버지 이름을 이번 책 앞머리에 써놨다.

―인생 후배들에게 해주고픈 말은.

"서툴러도 직진하라! 애들이 혼자 밥 먹으려면 여덟 살 때까지 적어도 10만번쯤 숟가락질해야 해요. 뭐든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요. 서투르다고 관두지 말고, 끊임없이 나아가세요. '결핍'을 즐기세요."

"남들이 반대하는 걸 해라! '1박 2일' '마음의 소리' 만들 때 내부 반대가 많았어요. 그런데 이미 머리에 그림 그려진다는 건 재미가 없단 얘기예요. 인생에서도 남들이 반대하는 걸 해보세요."

소지품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서수민은 필통, 조선희는 노트를 꺼냈다. 펜과 노트,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두 사람을 닮았다.

●서수민 PD 스타일: 직접 꼰 장식으로 두른 뱅앤올룹슨 이어폰(왼쪽)과 청회색 헨리 베글린 필통. "필기구 마니아. 뭔가를 시작할 땐 필통 속 필기구부터 바꾼다. 음악은 권태를 깨는 힘. 같은 출퇴근길도 다른 음악 들으면서 보면 달리 보인다. 언제나 배신하지 않는 선택은 이문세."

●조선희 작가 스타일: 영국 리버티 백화점에서 산 가죽 다이어리. 비행기표에 단풍잎까지, 소소한 일상이 가득 채워져 있다. 촬영장 단상, 여행 스케치…. 감성과 꼼꼼함이 놀랍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긁적이는 행위를 좋아했다. 나를 기억하는 방법이라고나 할까."

서수민 PD는…

1972년 포항 출생
1995년 연세대 의생활학과, 신문방송학과 졸업
1995년 KBS 예능국 입사
2010년 '개그콘서트' 연출
2013년 한국PD대상 올해의 PD상 수상
2015년 예능 드라마 '프로듀사' 연출
2016년 몬스터유니온 예능부문 프로듀서 이적

조선희

1971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출생
1994년 연세대 의생활학과 졸업
1998년~ 조아조아 스튜디오 운영
2003년 올해의 패션 포토그래퍼상 수상
2009년~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과 정교수
2011년~ Z ZIN 발행인 및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