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맞이하는 아침처럼 우리는 하루 세 번 삼시 세끼를 접하게 된다.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을 때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이 숟가락·젓가락이고 서양권에서는 나이프와 포크, 스푼이다. 이것은 ‘Cutlery’ 혹은 ‘Flatware’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는데 두 단어가 말해주듯 ‘납작하게 생긴 자르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1인상이 원칙이던 우리 옛 식문화와 달리 서양은 여러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고, 그래서 나이프·포크·스푼 이외에도 음식을 나눠 먹는데 쓰이는 각종 서버가 발전했다. 실제로 숟가락, 젓가락, 주걱, 국자 정도인 우리 식기류에 비해서 서양의 커트러리 종류는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다. 커트러리의 종류는 당연히 음식의 종류와 관련성을 가지고 나뉘게 된다. 특히 요리를 모두 식탁에 차려두고 각자 덜어 먹는 방식에서, 음식을 코스에 따라 순차적으로 내오고 각각 다른 식기로 먹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서양의 식기류는 ‘범람’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정도로 많아졌다.
빅토리안시대에는 ‘식기류의 천국’이라고 불릴 만큼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정찬코스에서의 나이프만 해도 전채, 생선, 육류, 디저트 등의 코스에 따라 각각 다른 나이프를 쓴다. 여기에 버터나이프, 치즈나이프, 덩어리로 된 고기를 직접 잘라 서빙하는 카빙나이프까지 더해진다. 스푼은 기본적인 것 외에도 각종 과일용 스푼과 주스 스푼, 보기에도 앙증맞은 소금·겨자용 조미료 스푼, 티 문화와 관련된 티스푼과 봉봉스푼 등 각각의 용도에 따라 그 종류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 외에도 토마토, 아스파라거스, 샌드위치, 감자칩 등을 서빙하는 서버류와 각종 집게류, 국자류가 있다. 당시 수많은 종류의 은식기류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신분은 극소수 상류층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접하는 그 시대의 커트러리 세트에는 귀족 가문의 문장이 포크나 스푼 손잡이에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또 결혼식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용 커트러리인 경우에는 받는 사람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커트러리의 천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빅토리안시대에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세계 도처의 식민지에서 들여온 재화가 넘쳐났고, 상류층은 그러한 부를 이용해 식탁에서도 마음껏 사치를 부렸다. 이것이 빅토리안시대를 커트러리의 천국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다. 빅토리안시대에 이토록 화려하고 다양한 커트러리가 등장하게 된 데에는 당시 그들의 식문화가 많은 기여를 했다. 그 당시 유럽 전역에는 새로운 부가 창출되어 구귀족들과 기득권층은 재력을 갖춘 신흥 중산층 계급에게서 끊임없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신분에 어울리는 새로운 기준을 정해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기준이 바로 정찬모임이었고, 훌륭한 음식과 선별된 손님, 장식성이 강한 천의자, 그림, 카펫 등으로 꾸며진 다이닝룸은 그러한 모임의 필수조건이었다. 긴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도자기 그릇부터 은으로 만들어진 서빙 그릇, 가지런한 커트러리 등은 정찬 테이블의 기준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털 디켄터와 다양한 와인 글래스, 크루잇(Cruet; 조미료통), 캔디볼(Candy Bowl), 리넨, 화려한 촛대, 유리나 도자기 장식의 센터피스 등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중에서 잘 손질된 리넨 천은 식탁을 다양하게 장식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영어로 리넨(Linen)은 마(麻)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테이블 세팅에서의 리넨은 테이블보, 러너, 매트, 냅킨, 그릇받침 등 식사에 필요한 모든 천 종류를 일컫는다. 리넨은 여자에게 옷이나 화장품과 같은 것으로 장식성과 기능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나 다마스크 천으로 된 식탁보를 사용하는 것은 이 시대의 고급 연회에서 필수적이었다. 필자가 오랫동안 컬렉션해온 리넨들은 대부분 수공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너무도 고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손으로 수를 놓는 것은 물론이고 한 올 한 올 올을 뽑아 얽어 만드는 드론워크(Drawn Work) 공법의 레이스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요리는 최고의 요리를 택하되 가짓수를 적당히 하고 포도주는 종류별로 최상급 품질을 준비했다. 음식은 가장 주된 것에서 가벼운 순서로, 포도주는 옅은 향에서 짙은 향의 순으로 서빙되었다. 가령 수프 다음에 셰리주, 첫 번째 앙트레에 이어 샴페인, 생선요리와 화이트와인, 육류와 레드와인의 조합이었다. 음식은 모두 은식기에 담았고 후식은 도자기 그릇에 담겨졌으니 빅토리안시대는 진정 음식의 천국, 화려한 만찬의 극치였다.
여러 코스로 된 서양식 음식문화와 그에 따라 함께 식탁에 나열되는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한 많은 커트러리…. 때로는 우리를 당황스럽게도 하는 서양의 커트러리는 언제쯤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인류의 문명과 함께 스푼은 그 역사를 함께해왔지만 서양인들이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다소 의외이다. 특히 포크가 식탁에 당당히 등장하기까지는 스푼과 나이프에 비해 훨씬 긴 세월이 필요했다.
모든 물건이 널리 쓰이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용도가 있어야 하는데, 유럽 역사에서 15세기 중엽까지의 중세시대에는 말 그대로 찍어 먹을 만한 음식이 거의 없었다. 인구의 대부분이 농노였던 그 시대에 먹을 음식이라곤 오직 묽은 죽과 빵이 전부였으니 포크의 등장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 16세기 무렵 극소수의 이탈리아 귀족층들 사이에서 비싼 비단옷을 더럽히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위생적인 차원에서 포크가 점차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크는 용도라는 측면 이외에도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식탁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신의 은총인 음식을 신이 만들어준 인간의 손 이외의 것으로 집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다’라는 이론을 내세우며 많은 종교인들은 포크가 식탁 위에 놓이는 것을 터부시했다. 1600년대까지도 거의 대부분의 서구 사람들은 손을 사용해서 음식을 먹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임진왜란 후 선조시대와 같은 시기인 셈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유기로 된 각종 그릇과 숟가락·젓가락이 있는 식탁문화가 완성된 상태였다. 양반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소반에 올려진 반상기를 삼시 세끼 접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 특유의 여백과 선의 미를 자랑하는 한옥과 목가구 등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식문화를 꽃피우고 있었으니 동시대의 서양인들이 식탁에서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은 생경스러울 따름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8세기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포크는 무수한 핍박을 이겨내고 이탈리아를 넘어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카트린느 비가 1533년 프랑스 앙리2세와 결혼하면서 포크는 프랑스에 첫선을 보였다.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을 이룬 태양왕 루이14세의 베르사유 궁전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프랑스는 전 유럽의 상류문화를 선도하게 된다. 이는 프랑스가 포크를 유럽에 소개하면서 화려한 식문화를 이끈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모든 유럽의 왕실들은 프랑스의 궁정문화를 선망하며 문화적인 모든 면에서 프랑스적인 취향을 따라 하고자 노력했다. 식탁문화의 발전이 프랑스를 전반적인 문화선진국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17세기가 되어서야 포크는 귀족사회에서 비로소 갖고 싶은 선망의 물건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유럽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며 당시 유행의 리더였던 루이14세조차도 식탁에서의 포크 사용을 귀찮게 여겼다. 그는 포크보다는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을 더 즐겼다고 한다. 영국의 경우 1568년에서 1603년까지 군림했던 엘리자베스1세 여왕은 이탈리아 사신에게 받은 은제 포크를 보석으로 장식해서 귀중품처럼 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고기, 양고기 그리고 포도주 등 많은 음식을 차려 먹었던 여왕의 식탁에서도 칼과 포크는 거의 쓰이지 않았고 여왕은 직접 두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 이때까지도 포크는 금은 소재에 상아나 진주로 장식된 신분 과시용 사치품일 뿐이었다. 귀족들이 이러한 포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이다. 프랑스혁명 후 유럽은 반귀족적 사회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신분을 상징하던 사치스러운 복장이 금기시되었고 귀족들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 나타낼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옷에서 나타내지 못하는 신분의 우월감을 하루 세끼 식탁 위의 음식과 커트러리로 나타냈고, 그중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이 포크였다. 말하자면 ‘나는 포크로 음식 먹는 사람이야’라고 과시하는 것이었다. 두 갈래였던 포크가 세 갈래에서 네 갈래로 바뀐 것도 이 시기였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프랑스혁명 와중에 포크의 갈래수가 두 개에서 세 개로 변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고자 했다는 설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귀족들은 포크를 다시 네 갈래로 만들어 사용했다.
이후 18세기 산업혁명기에 일어난 철 생산라인의 획기적인 변혁은 철의 대량공급을 가능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스털링(순은)이 아닌 은을 도금한 실버플레이트 포크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이는 포크의 대중화로 이어졌고 역사의 격랑을 겪으며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사치품에서 일상용품으로 대중의 식탁에 안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