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 로펌인 법무법인 한누리가 5년 만에 ELS(주가연계증권) 투자 관련 증권집단소송에서 도이치은행(도이치방크)을 대리한 김앤장을 누르고, 투자 피해자 집단에 승리의 깃발을 안겼다.

한누리는 2012년 ELS 투자 피해를 본 6명의 소액투자자 대표당사자들을 대리했다. 증권집단소송 판결이 확정되면 소송을 낸 원고 외에 같은 조건의 다른 피해자 494명도 동일한 효력을 보게 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부장 김경)는 지난 20일 김모씨 등 대표투자자 6명이 도이치은행을 상대로 낸 증권관련 집단소송 1심에서 “피해자들에게 총 85억 80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2005년 1월 도입된 증권집단소송은 증권거래 과정에서 50명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했을 경우, 대표 당사자의 소송 효과가 피해자 집단 전체에 미치도록 하는 민사소송 절차를 말한다.

증권집단소송의 경우 일반적으로 소송 남발을 막기 위해 법원의 허가가 있어야 본안 심리가 진행된다. 이번 집단소송사건은 2012년 3월에 소장이 접수됐지만, 소송허가 절차가 길어져 2016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서울 여의도의 주식시세전광판.

한국투자증권은 2007년 8월 31일 파생결합증권의 일종인 ‘한국투자증권 부자아빠 ELS 제289회'를 판매했다. 이 상품은 기초자산인 삼성전자와 국민은행 보통주의 만기평가일 가격이 모두 최초기준가격의 75% 이상이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로 짜여졌다. 만기가격결정일은 2009년 8월 26일이었다. 한국투자증권은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지급해야하는 위험을 헤지(회피)하기 위해 도이치은행과 ELS와 같은 구조의 ‘주식연계 달러화 스와프계약'을 맺었다.

도이치은행은 만기평가 기준일 당일 장마감 직전인 오후 2시 50분부터 3시까지 국민은행 주식에 대해 대량으로 시장가매도주문(종목과 수량은 지정하되 가격은 지정하지 않는 주문유형)을 냈다. 그 결과 ELS 상환조건 기준가인 5만4740원을 근소하게 넘었던 국민은행 주가는 갑자기 5만3600원으로 하락했고 수익 만기상환조건은 무산됐다. 수익 만기상환조건이 충족됐을 경우 도이치은행은 한국투자증권 계약금액 88억9000만원의 128.6%인 113억원을 투자자에게 지급해야 했으나, 수익 만기상환조건이 무산됨에 따라 66억원만 고객들에게 지급하게 됐다.

◆ 금융공학의 탐욕⋅논리적 허점을 공격해 승리한 한누리

한누리는 김상원 전 대법관과 두 아들인 김주현 김주영 대표변호사가 2000년 공동 창업한 법무법인이다. 한누리는 설립 초기부터 집단소송 경험을 쌓았다.

한누리는 2010년 ‘한화 ELS’ 종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캐나다왕립은행(RBC)을 상대로 첫 증권집단소송을 제기했으며 2011년에는 씨모텍 증권신고서 허위기재 사건 등을 맡았다. 현재는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관련 사건을 진행 중이다.

한누리는 지난해 11월 같은 ELS 투자 실패건과 관련해 개인투자자 20명과 기관투자자 6곳이 도이치은행을 상대로 낸 상환원리금 청구소송 파기환송심에서 김앤장을 누르고 원고 승소 판결을 받기도 했다. 한누리는 1심에서, 김앤장은 2심에서 각각 승소하는 등 승패가 뒤집히기도 했으나 결국 한누리가 승리했다.

좌측부터 한누리 김주영 대표 변호사와 구현주 변호사.

이번 ELS 증권집단소송에서는 한누리의 김주영(18기) 대표변호사와 연세대 로스쿨 출신의 구현주(변호사시험 4회) 변호사 단 두명만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사건을 총괄한 김주영 변호사는 1992년부터 5년 동안 김앤장에서 공정거래 및 회사법 관련 송무를 담당한 바 있다. 현재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 위원, 법무부 증권관련집단소송 개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누리는 ‘금융공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법'이라는 김앤장의 주장에 대해 고의적 의도가 있었음을 입증했다.

법정에서는 파생상품 만기일 장 마감 전에 주식을 대량매도한 게 적법했느냐에 대한 공방이 치열했다.

김앤장은 ‘경제적 합리성’을 주장했다. 김앤장은 “델타헤지의 특성상 단일가매매시간대에 이 사건 주식 모두를 처분해야했다”며 “(델타헤지) 목적에 부합하는 정당한 행위로 사건 주식의 가격에 영향 미쳤다하더라도 시세조종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델타헤지란 헤지한 기간에 옵션의 계약 수를 탄력적으로 변화시켜 헤지 성과를 달성하는 전략적인 매매 방식을 말한다.

한누리는 외관상으로는 합리적인 금융 거래 기법이 사실상 탐욕스러운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누리는 “장 마감 10분 전 대량매도는 종가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지만 이해관계 당사자가 대량매도해 가격에 영향을 미치면 고의성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또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한 금융기법이라면 오히려 이론상 종가가 결정된 이후 시간외거래가 부합한다”며 “유동성 리스크를 부담하면서도 장마감 전 대량매매를 한 것은 헤지거래라는 명분을 들어 가격 조정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맞섰다.

국내외 금융공학 분야 교수들의 조언을 참고해 전략을 짠 것도 승리 요인이다. 한누리는 장마감 전 매매시간 등을 근거로 “헤지거래 기술론적으로 오히려 종가가 결정된 시간외 거래가 매매 취지에 더욱 부합하며 종가 결정 전 미리 판 것은 악의적 의도가 있다”는 논리를 폈다.

재판부는 한누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단일가매매시간대에 이르러서는 가격 하락 효과가 큰 시장가주문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주식을 대량매도했다는 점을 봤을 때, 도이치은행이 가격을 낮출 의도로 예상체결가격의 추이를 살피면서 주식매도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손해는 이 사건 주가연계증권에 내재하는 위험이 발현된 결과라기보다는 도이치은행이 이 사건 주식의 가격을 낮춰 수익 만기상환조건의 성취를 무산시킬 의도로 자본시장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시세조종행위 내지 부정거래행위에 해당하는 주식매도행위를 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금융분쟁 전문 변호사 대거 투입한 김앤장 “고의없는 일반적 금융기법" 주장했지만 패소

김앤장은 금융 분쟁 전문 변호사들을 대거 투입했다. 정진영(사법연수원 15기) 변호사를 비롯해 이윤식(19기)・박성하(19기)・이상윤(20기)・박철희(27기)・박상용(31기)・배태준(37기)・나희정(변호사시험 1기) 변호사가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다.

좌측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진영・이윤식・박성하・이상윤 변호사

김앤장은 우선 이 사건의 주식매도 행위를 정당한 델타헤지의 일환이며 ‘시세 조정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델타헤지 특성상 도이치은행은 단일가매매시간대에 이 사건 주식 12만8000주 모두를 처분해야 했지만, 시장가주문방식이 아닌 지정가주문방식으로 거래를 한 것에 대해 주식매도행위와 투자자들의 손해를 직접적으로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했다.

이 밖에 금융투자업자가 델타헤지 수행이라는 사정을 내세워 특정한 주식거래행위를 했더라도, 이것은 자본시장법에서 금지하는 시세조종행위 혹은 부정거래행위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도이치은행뿐 아니라 한국투자증권이 함께 ELS의 기초자산을 매도했기 때문에 책임을 도이치은행에만 부담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폈다.

재판부는 그러나 “델타헤지에 따라 주식을 모두 처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금융투자업자가 위험을 회피하려는 금융거래기법으로 보인다"며 “이 사건 주식매도행위에 시세 조종의 의도가 있고 그 처분의 시기와 방법이 정당하지 않아 자본시장법을 위반한 이상 책임을 제한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