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선왕조가 1910년의 경술국치로 멸망했다고 알고 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그 이전에 이미 일본군이 침략해 조선을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 '침략'의 시점이 문제가 된다.
"1894년 6월 일제가 동학농민전쟁을 구실로 무력으로 서울을 침공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조선은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한 것이죠. 그것을 우리는 '갑오왜란(甲午倭亂)'으로 봐야 마땅합니다."
700여쪽 분량의 연구서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청계)을 출간한 황태연(60)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그동안 '군주가 처신 없이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친 굴욕의 역사'로 여겨졌던 1896년 아관파천에 대해서도 '아관망명(俄館亡命)'으로 새롭게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 왜군(그는 침략자인 일본군을 당연히 이렇게 비칭해야 한다고 말한다)이 계속 한반도에 주둔한 침략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51년은 결국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낸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였고, 투쟁을 시작한 것은 군주인 고종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프레임으로 보면 고종과 명성황후, 대한제국 주도 세력이 항일투쟁의 주체가 된다. 그는 "자료를 치밀하게 검토해 보면 고종은 계속 동학군에 밀지를 보내 왜군에 맞서 싸우도록 했고, 대부분의 의병도 왕명에 의해 움직였다"고 말했다. 고종을 중심에 놓다 보니 갑신정변, 갑오경장, 독립협회를 주도한 개화 세력을 그 대척점에 섰던 친일 세력으로 평가절하한다. 논란이 될 만한 대목이다.
그가 보기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간 것은 일본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치밀한 계획하에 감행한 근대국제법상의 망명(亡命)이었다. 당시 서양 측 자료들이 한결같이 이 사건을 '망명(asylum)'으로 표현한 반면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함)'은 일본 측 자료에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한 고종은 그곳을 나온 직후인 1897년 대일 독립투쟁을 위한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일제는 1904년 두 번째 침략 전쟁인 '갑진왜란(러일전쟁)'을 일으켜 대한제국의 목을 조르지만, 대한제국의 3만 국군이 의병과 통합된 대한독립의군으로 거듭나 이후 40년 장기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이 시기를 후속작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대한제국과 갑진왜란'에서 다룰 계획이다.
황 교수는 "기존 역사학계가 일제 식민지 시대의 해석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번에 걸친 왜군의 침략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은폐되고 대한제국이 '모의 국가' 정도로 격하됐다"고 주장했다. 그의 표현대로 이 저작들이 '기존 학계에 가공할 충격을 주는 도시락 폭탄'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