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즐거운 인생'(2007) '우아한 세계'(2007) '전설의 주먹'(2013)엔 기러기 아빠가 등장한다. 하나같이 라면이 주식(主食)이고, 가족과의 유일한 끈인 전화기에 '목숨' 건다. 그러다 생명줄처럼 생각했던 전화를 통해 이혼 통보를 받는 줄거리는 기러기 아빠 영화의 공식 같았다.
이제 시간은 흘렀고 풍경은 바뀌었다. '해외파 기러기'가 줄고 국내파 기러기 아빠들이 급증했다. 저가항공, KTX를 타고 주말이면 가족들에게 달려간다. 1인 가구 속 부성애 유전자로 홀로 살기를 기꺼이 감수하는 이 시대의 신(新) 기러기들을 만났다.
육지~제주, 서울~세종 '국내파 기러기'
일산에 있는 유명 제조회사 임원인 정유석(가명·46)씨는 3년 전 사춘기 큰딸과 작은딸, 막내아들을 한꺼번에 제주 내 국제학교로 보내면서 기러기 아빠에 '입문'했다. 금요일 저녁이면 제주행 비행기에 오른다. "해외 유학보단 제주도가 가깝고 안전하다 싶었어요. 자취 생활 한 번도 한 적 없어 부담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제주 생활에 무척 만족하고 있어요. 실보다는 득이 많다는 생각에 이 생활을 감내하게 됐습니다."
국제학교가 많은 제주는 대표적인 신(新) 기러기 도래지다. 국제학교가 몰려 있는 대정읍사무소에서 전·출입을 담당하는 고지나씨는 "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엄마와 자녀만 전입신고하고 아빠는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채 수시로 다녀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제주 영어교육도시에 생긴 진풍경도 있다. 주말이 되면 주중엔 안 보였던 아빠들이 이 집 저 집 출몰한다. 엄마들 사이에선 "제주행 기러기가 되면 최소 2년은 매주 제주행을 하는 게 가족에 대한 예의"란 우스개도 있다. 아예 제주 주말 농장에서 농사짓는 아빠, 펜션을 지어 주말마다 '투잡' 하는 아빠도 있다. 요즘은 방학 때 '제주 한 달 살이'를 하는 엄마와 자녀 가구도 늘어 제주행 기러기 아빠들은 더욱 증가하는 추세다.
2013년부터 정부 부처가 세종시로 옮기면서 '세종시 기러기 아빠'도 생겨났다. 세종시 공무원 김은석(가명·48)씨는 주중에는 세종시에서 생활하고 주말이면 '서울집'으로 가 아내와 중학생인 두 딸과 보낸다. 2013년 부처가 세종시로 이전했을 때 이사를 고민했지만 두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전학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주말부부를 택했다. 그는 "처음엔 서울에서 세종시로 매일 출퇴근했는데 체력 부담이 컸다. 밤늦게 들어와 아침 일찍 나가는 바에야 기러기 아빠가 나을 것 같았다"며 "우리 부서에만 나 같은 기러기가 3명 있다"고 했다.
기러기 아빠의 의미도 확장됐다. SNS에 '#기러기아빠'라는 해시태그로 검색하면 '여행 등으로 가족과 잠시 떨어져 지내는 아빠' 사진까지 나온다. '교육 때문에 가족을 해외로 보낸 가장'이라는 의미에서 '아내·자녀와 잠시 떨어져 지내는 아빠'를 통칭하는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기러기 아빠? 나는'혼중년'
디지털 시대, 1인 가구 시대가 되며 기러기 아빠의 라이프스타일도 변했다. 자녀와 아내가 보고 싶으면 수시로 영상통화하고, '카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인터넷상 '밴드'를 만들어 가족들끼리 사진과 이야기를 공유하기도 한다.
미국 기러기 아빠 7년 차인 송상용(54·삼성서울병원 병리과 교수)씨는 가족이 생활하는 미국 집 식탁에 '캠'을 설치해 화상대화를 나눈다. 대화가 어려울 땐 가끔 가족들이 잘 지내는지 영상으로 확인한다. "영상통화를 하다 보니 시차를 맞춰야 해 번거롭고 이따금 감정이 북받쳐 올라 안 되겠더라고요.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캠을 켜서 봐요."
캐나다 기러기 6년 차인 정기철(가명·52)씨는 "예전엔 혼자 밥 먹는 게 처량했는데 요즘엔 '혼밥' '혼술' 문화 덕에 주변 시선 부담은 확실히 줄었다"고 했다. 반찬이 떨어졌을 땐 반찬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다. '카톡'으로 아내만의 레시피를 물어보고 요리하기도 한다. 그는 "기러기 아빠 대신 '혼중년(혼자 노는 중년)'이라 불러 달라"며 웃었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중국 기러기 아빠 5년 차 이규혁(47)씨는 저가 항공 덕에 든든한 날개를 달게 된 경우. 그는 "비행기표가 쌀 때 '얼리버드'로 예약해 1년에 4~5번씩은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단기, 근거리' 늘어도 균열 조심해야
사회 인식이 바뀌고 생활이 편해졌다지만 기러기 아빠는 어디까지나 '차선'의 선택이다. 조창현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장은 "단기, 근거리 기러기가 많아졌다고 해도 가족 갈등이 있는 경우엔 금방 균열이 가기 쉽다"면서 "미래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어렵게 한 선택이 성공하려면 배우자, 자녀와의 신뢰를 충분히 형성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조 원장은 특히 "자녀 교육을 위해 기러기 아빠를 선택해도 가족의 중심은 자녀보단 부부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수연 한국워킹맘연구소장은 "기러기 아빠들이 혼자 사는 불편함이 줄어들긴 했지만 일반 가장보다 삶의 질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라며 "다양한 기러기가 속출하는 만큼 개별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함께 고민해봐야 할 시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