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전성기는 17년 만에 온다. 김종민(38)도 "한 우물만 꾸준히 팠더니 이런 날이 왔다"며 씩 웃었다. 2000년 가수 '코요태'로 데뷔한 이후 지금껏 180여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왔다고 했다. 줄곧 그는 '깍두기', '만년 3등'이었다. 한 번도 주역(主役)이었던 적이 없다. 그는 유재석·신동엽·강호동 같은 연예인들이 화면 한가운데에서 화려하게 외칠 때 뒤에서 물개박수를 치거나 구구단을 틀리게 외우고, 사자성어 퀴즈를 풀다 바보 소리를 듣거나 춤추다 넘어지곤 했다. 그리고 작년 12월 24일 김종민은 KBS 연예대상을 받았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설 연휴 프로그램 출연 요청이 밀려들고 기업에서도 강연해달라고 한다. 한 브랜드 이미지 연구소는 최근 김종민의 브랜드 파워를 "유재석에 이은 2위"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1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종민은 "60여개 매체와 합동 인터뷰도 앞두고 있다"면서 "뭐가 뭔지 잘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동안 여행 한번 제대로 못 다녀보고 살았어요. 올해는 꼭 짬을 내서 어머니 모시고 가까운 곳이라도 놀러 가고 싶어요. 올해는 신곡도 낼 계획이어서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해야겠죠? 또….” 김종민이 특유의 어눌한 듯 빠른 말투로 새해 계획을 쏟아낸다. 2017년이라고 적힌 숫자 풍선 앞에서 김종민은 그렇게 덩달아 부풀어 오른 듯했다.

17년 '뇌순남'의 화려한 승리

―그동안 '바보' '뇌순남(뇌가 순수하다는 뜻으로 '바보'의 다른 말)'이라고 놀리던 주변 친구들마저 요즘엔 '대상 수상자'라고 부른다죠?

"그러게요(웃음). 작년에 한 방송에서 '커밍 순'을 영어로 제대로 못 써서 쩔쩔맸던 것 때문에 놀림 많이 받았는데, 요새는 갑자기 저를 우러러봐요. '너 정말 대단하다'면서요(웃음). 축하 전화만 500통 정도 받았는데, 다들 '네가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한길만 간 덕이다' '10년 동안 고생한 게 이렇게 돌아오나보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김종민은 곧 '계산 없이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라는 얘기인 건가요?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네, 제 자랑일 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사실이니까요. 때론 '밥차 아줌마가 김종민보다 재밌더라'는 말도 들어봤고 '암종민'이라는 악플까지 받아봤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10년 동안 '1박2일'을 지켰으니까요. 요즘 학교에서도 개근상 받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데 저는 방송하면서 개근을 했으니, 그 덕에 뒤늦게 칭찬받는 것 같아요."

김종민은 KBS 2TV '1박2일'의 원년(2007년) 멤버다.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느라 출연 못한 2년을 제외하면 '1박2일'이 전성기일 때나 침체기일 때나 떠나지 않고 지금껏 자리를 지킨 유일한 출연자이기도 하다. 2009년 복귀했을 때는 시청자들로부터 '감 떨어졌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2013년 '시즌3'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김종민이 웃겨서 채널을 못 돌리겠다"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KBS 한 PD는 김종민을 두고 "지방 촬영이 있을 때면 전날 밤 현장에 미리 와서 준비하는 걸 4년 넘게 해왔다"고 했다.

―10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한 프로그램에만 출연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죠.

"별거 없어요(웃음). 연예계 생활하면서 갖게 된 신조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먼저 떠나지는 말자'거든요. '누가 나를 먼저 버리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누군가를 먼저 떠나지만은 말자'고요. 연예 활동 17년 하면서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적이 많았어요. 배신당한 적, 뒤통수 맞은 적 많죠. 마음 아픈 일 당할 때마다 내가 이런 상처를 먼저 주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버틴 거예요. 때론 욕먹었지만, 그래서 멤버들에게 미안할 때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먼저 떠날 순 없었던 거죠(웃음)."

부족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김종민은 열일곱 살에 가수 박남정 전속 댄스팀으로 시작한 '프렌즈'에 입단하면서 백댄서로 활동하다가 2000년 '코요태'를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숫기와 말주변이 없어 별명이 '어리버리'였지만 춤추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좋아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추고 싶다'고 생각한 게 시작이었다. 집에서 '런던 나이트(London Night)' 같은 노래를 몰래 틀어놓고 연습하면서 춤을 췄고, 중·고등학교 때부터는 춤 잘 추는 친구들을 따라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했다.

―학창 시절부터 춤으로 유명했던 건가요.

"아뇨. 워낙 숫기가 없어서 누구 앞에서 춤을 제대로 춰보지도 못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오디션을 봤고 그러다가 프로 백댄스팀에 들어가게 된 거고요. 실력도 사실 그때부터 늘었죠."

―춤 말고 다른 특기는 없었나요.

"별로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장난치다가 옥상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크게 다친 적이 있어요. 피도 많이 나고 턱이 비뚤어졌어요. 그때 그렇게 다친 이후로 성격이 많이 변했어요. 소심해졌고 줄곧 무기력했어요. 유일한 탈출구가 춤이었죠."

서울 방학동에서 춤에 빠져 살던 고교생 김종민은 2학년 때 택시 기사를 하던 아버지가 충남 서산에 내려갔다가 밀물에 휩쓸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항상 장난을 좋아하고 농담을 즐기던, 유쾌하고 밝은 아버지였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김종민은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과 함께 아버지 장례식에 가면서도 그저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고 했다.

―사춘기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겠네요.

"계속 안 믿었던 것 같아요. 나중엔 울지도 않았어요. 잊고 싶은 마음에 그저 춤에만 몰두했어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 동작을 익히려고 5~6시간씩 연습했다. "머리칼이 땀에 흠뻑 젖다 못해 나중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연습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다 보니 지하철을 타면 서 있을 힘조차 없어서 주저앉곤 했다. 3개월 후엔 처음으로 방송 무대에 올랐다. 그때 받은 돈이 4만원이었다. 신문 돌리기, 나이트클럽 웨이터, 건설 현장 인부 같은 일로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1년 뒤엔 가수 엄정화의 백댄서로 발탁됐다. 당시로선 곱상했던 외모와 춤 실력이 소문 나면서 김종민은 곧 웬만한 연예인만큼 큰 인기를 누리게 됐다.

―그때 여학생들이 집에 찾아오고 그랬다면서요.

"팬레터가 매일 자루로 쌓였어요. 그때 한 달 120만원쯤 벌었나봐요. 그때 처음으로 60만원을 어머니 갖다 드렸어요. 그 전까지는 철이 없어서 번 돈 제가 쓰기에 급급했거든요(웃음). 그때쯤부터 비로소 경제관념도 생겼던 것 같아요. 돈을 벌면 반 이상 저금하는 버릇이 생겼죠."

2000년에는 엄정화 음반을 만들던 프로듀서의 소개로 코요태에 합류했다. 노래를 맡은 신지 나이 만 열아홉 살, 김종민이 스물한 살이었다.

가수 엄정화 뒤에서 춤을 추고 있는 앳된 얼굴의 김종민(왼쪽), 2004년 코요태 멤버 빽가·신지와 함께 선 모습(가운데), 작년 말 연예계 데뷔 17년 만에 KBS 예능대상 트로피를 받은 김종민(오른쪽).

―백댄서가 가수 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엄청 헤맸죠. 그래도 다들 착해서 텃세 안 부리고 많이 도와줬어요. 가사 까먹고 틀릴 때마다 신지가 ‘야, 니가 가수야?’라고 화내기도 했지만요(웃음).”

코요태는 꽤 큰 인기를 누렸지만, 멤버 중 일부가 마약 사건으로 활동을 접기도 했고 몸이 아파 수술을 받거나 슬럼프로 활동을 쉬는 경우도 있었다. 김종민은 그런 부침(浮沈)을 17년이나 지켜보며 리더 노릇을 해왔다.

―연예계 생활이라는 게 유혹과 방황의 연속일 텐데요.

“맞아요. 그 안에서 중심을 잡는 게 쉽지 않죠. 그런데 저는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오히려 흔들리지 않았어요. 저까지 흔들리면 팀이 완전히 무너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전 오히려 단순하게 앞만 보고 멤버들을 다독이면서 끌고 왔어요.” 김종민은 술도 거의 안 마시고 도박은 지금은 재미로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요태 자금 관리도 김종민이 도맡아 한다.

꼴찌라서 좋다

코요태 데뷔와 동시에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홍렬쇼’에 출연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개그맨 이홍렬은 김종민에게 “종민씨는 누구랑 살아요?”라고 물었는데 김종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식구랑 사는데요?”라고 대답했다. 방청석이 이 대답에 뒤집어졌고, 베테랑인 이홍렬도 뜻밖의 대답에 그만 얼굴이 빨개졌다. 김종민은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웃어서 당황했었다”고 했다.

―그럼 맥도날드 행사 가서 ‘와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것, 아시아나 카운터 가서 ‘대한항공 티켓 주세요’ 했다는 것도 실제 있었던 일인가요?

“네? 네! 어떻게 아셨어요(웃음)? 정말 몰라서 이상하게 대답할 때도 있고요, 긴장해서 엉뚱한 소리 할 때도 있어요.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일부러 그랬다면 지금껏 바보 소리 듣고 살 수는 없죠(웃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계속 ‘뇌순남’ ‘신난 바보’라고 부르는 건 싫지 않은가요.

“아뇨.” 김종민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왜 싫어요? 그 덕분에 사람들이 저를 이렇게 좋아해주는데요. 저처럼 대단한 것 없는 사람이 이렇게 오래 일할 수 있는 것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것도 다 그 덕인걸요(웃음).”

시청자들은 그러나 여전히 김종민을 두고 종종 ‘천재일까, 바보일까’ 입씨름을 벌인다. ‘5×7’ 같은 구구단 퀴즈도 종종 틀리는 그가 안중근 의사의 생년월일(1879년 9월 2일)과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1884년) 같은 역사 상식은 척척 잘도 맞히기 때문이다.

―역사 문제 맞힐 때 보면 바보 행세가 연기 같던데요.

“(손을 황급히 흔들며) 아녜요, 아녜요! 역사는 공익근무할 때 관심이 생겼어요. 그때 정말이지 시간이 남아돌더라고요. 시간이 많으니 ‘나의 뿌리가 어디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를 알고 싶어졌고요(웃음). 솔직히 머리가 나쁜 데다 어릴 때 머리를 다친 이후로 책은 잘 못 읽어요. 대신 이런저런 인터넷 강연을 찾아 듣기 시작했는데 그때 역사에 꽂히게 됐어요. 그렇게 귀동냥해서 들은 게 뜻밖에도 기억이 잘 나는 것뿐이죠.”

김종민에게는 사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병이 있다. 백업댄서 시절, 스핀(몸을 빙빙 돌리는 춤) 같은 동작을 격렬하게 반복하다가 난청과 외이도염, 허리 디스크를 얻었다. 김종민은 “이제 격렬한 춤은 전혀 못 춘다”고 했다.

―난청 때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거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네? 네…. 그럴 수도 있죠(웃음). 그런데 아파서 그렇다는 핑계를 대고 싶진 않고요, 제가 어리버리해서 그런 거예요. 저는 그리고 꼴찌, 바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로 마음이 편해요. 1등, 천재 소리 듣고 살았으면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머리 아프고 힘들었을 거 아녜요. 꼴찌는 그런 고생을 겪지 않아도 되잖아요? 저는 지금이 정말로 좋아요.”

팔굽혀펴기 한 번 더 하는 마음

김종민에게도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 2000년 초 PC방 사업을 벌였다가 6개월 만에 접었고, 이윽고 양대창 음식점도 열었으나 금세 문을 닫았다. 아는 사람에게 투자했다가 수천만원씩 돈을 떼이거나 손해본 적도 제법 된다고 했다.

―연예인들이 사업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뭔가요.

“불안하니까요. 저도 20대 후반, 30대 초반까지는 엄청 불안했었어요. 주변에서 다들 ‘연예인은 오래가는 직업이 아니다’ ‘한순간에 망하기 쉽다’는 말을 워낙 많이 했으니까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몰라서 걱정했었고요. 그래서 알지도 못하고 사업에 손을 댔다가 금방 망했던 거죠. 나중에야 알았어요.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전념하지 않으면 절대 잘될 수 없다는 걸요.”

―그럼 지금은 불안하지 않나요.

“네. 더는 불안하지 않아요. 요새 들어서야 지금 하는 이 방송 일을 끝까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고, 열정을 갖고 시간과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솔직히 어느 장사가 끝까지 갈 수 있겠어요? 어떤 일이라고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결국은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한길로 가는 게 맞는 것이더라고요. 이걸 왜 예전엔 몰랐나 모르겠어요.”

―그래도 언젠가 또 슬럼프가 올 수도 있겠죠? 지금 전성기가 다시 왔다 해도요.

김종민은 “그럼요!” 하고 큰 소리로 대꾸하더니 ‘헤헤’ 웃었다. 지우개로 지우듯 눈이 잠시 사라졌고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리고 이내 진지해졌다. “슬럼프가 다시 온다고 해도요, 저는 이제 극복하는 법을 알아서 괜찮아요.”

―그게 뭐죠?

“단순해지는 거요. 뭐가 안 풀릴 땐 일단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열심히 몸을 쓰면서 부딪쳐보는 거예요. 그렇게 하루 종일 고되게 부딪쳐보고 집에 돌아갈 때쯤 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늘 나는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뭐 어쩌겠어.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었는걸!’ 이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요, 어느새 문제가 풀려요. 실력도 그렇게 늘어요. 팔굽혀펴기를 해보면 그래요. 10개까지는 할 수 있어요. 거기에 하나를 더 해서 11개를 만드는 게 정말 힘든 거잖아요? 그런데 죽을 힘을 다하면 11개를 할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하면 12개, 13개가 돼요. 그러니까 저는 이제 걱정 안 해요. 11개를 일단 만들다 보면 뭐든 될 테니까요.”

이 대답을 듣는 동안 잠시 이상한 경험을 했다. 김종민이 그 어떤 사람보다도 지적(知的)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안중근 생년월일과 갑신정변 연도를 외우는 것을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