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부장 판사 문유석, ‘꼰대질은 꼰대에게'라는 칼럼 화제… “나는 재수 없는 사람, 주변에 까칠한 조언하는 친구들 있어 다행" … “읽고, 듣고, 쓰고… 판사의 일상은 시험 준비하고 시험 보는 일”... “청소년기 순정 만화 읽으며 세계사 공부, 다독으로 텍스트 훈련했다”… “판사에게 동정심은 지위 남용, 우리 사회 불행의 연쇄 아닌 행복의 연쇄 작용 일어나야"

문유석 판사는 서울동부지법 민사합의 15부에 재판장(부장판사)으로 일하고 있다. 사법연수원 26기로 1997년 판사로 부임한 이후 20년 가까이 판결문을 써왔다.

문유석 판사가 새해 벽두부터 써낸 ‘직장 상사'에 관한 칼럼이 화제다. 문 판사의 칼럼은 SNS의 파도를 타고 청년들의 가슴에 ‘사이다' 기포를 일으켰다. 요약한 내용인즉슨 이렇다.

‘저녁 회식 하지 마라. 젊은 직원들도 밥 먹고 술 먹을 돈 있다. 없는 건 당신이 뺏고 이는 시간뿐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개떡같이 말해놓고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니 이 무슨 개떡 같은 소리란 말인가… 술자리에서 여직원을 은근슬쩍 만지고는 술 핑계 대지 마라, 내 인생에 이런 감정이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용기 내지 마라. 제발, 제발... 무엇보다 아직 아무것도 망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하려면 이미 뭔가를 망치고 있는 이들에게 해라.’

◆ 꼰대되지 않으려면 불필요한 개입 자제해야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라는 정중한 제목으로 시작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섬뜩하다. ‘꼰대질은 꼰대에게'. 하마터면 지금 제일 잘 나가는 래퍼 비와이에게 이 글을 통째로 넘겨주고, ‘노래 한번 만들어 보라’ 전화할 뻔했다. ‘꼰대질은 꼰대에게!’ 웃으며 삿대질하는 힙합퍼 특유의 춤과 찰진 랩에 딱이지 않은가. 어쩌다 나이 먹어 나 또한 ‘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는 것도 까맣게 잊게 한 문유석 판사의 흥겨운 일침.

글 쓰는 현직 판사 문유석을 만났다. 대한민국 판사라는 엄숙한 타이틀을 가진 채로, 진솔한 에세이 ‘판사 유감' ‘개인주의자 선언'을 낸 현직 작가.

왼쪽 얼굴은 부드럽고 반대로 오른쪽 얼굴은 사나운 (본인 표현에 의하면)아수라 백작 같은 용모로,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성을 양손으로 던져가며 저글링하고 있는 법원이라는 무대의 묵묵한 곡예사,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실낱같은 믿음을 지닌 채.

지난해 12월 그는 여성 판사의 활약상을 담은 ‘미스 함무라비'라는 법정 소설까지 출간했다. 그가 쓴 소설 ‘미스 함무라비'는 젊은 여성 판사를 주인공으로 한 법정 활극이다.

현재 문 판사는 서울동부지법 민사합의 15부에 재판장(부장판사)으로 일하고 있다. 사법연수원 26기로 1997년 판사로 부임한 이후 20년 가까이 판결문을 써왔다.

-연세대 철학과 명예 교수이자 ‘백 년을 살아보니'의 저자인 김형석 교수(98세)의 외손녀사위 되십니다.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을 가까이서 뵈면서 깨달은 점도 있을 텐데요.

“성실함이나 인내심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은 옛날 시대 분인데도 속된말로 꼰대스럽지 않으세요. 가족에게도 절대 개입을 안 하세요. '이래라저래라'가 없으시죠. 항상 예의를 차리고 점잖게 말하세요. 손주의 일에도 먼저 조언을 구하지 않는 이상, 씨익 웃으면서 보고만 계세요. 독립된 개인으로 믿어주시는 거죠. 저도 그렇게 살아야지요(웃음).”

-문유석 판사는 자유주의자이지요?

“네. 골수 자유주의자입니다.”

-자유주의자의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역으로 남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죠.”

-직업적으로 훈련된 태도인가요?

“(웃음)우리나라 헌법의 기본이 자유주의 헌법이잖아요. 불필요한 개입을 안 하려고 합니다. 내 잣대로 남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늘 한 번 더 유보하려고 해요.”

문유석 판사는 경복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 석사를 받았다. 어린 시절 꿈은 PD나 소설가였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 법대를 택했다고 한다.

-의심은 과학자의 습성인데요.

“법을 다루는 사람도 그래요. 다들 맞다고 해도, ‘과연 그럴까?’라고 질문하죠. 저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초등학교 때 충무공에 대해 글을 쓰는데, ‘이순신 장군은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때 죽어간 일본군의 가족에게는 원수가 아니었을까.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존재할까?’ 이런 글을 썼어요. 사춘기 시절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항상 회색으로 보려고 노력했어요.”

◆ 냉소주의에 빠진 엘리트 법관료 위험

-그런 기질이 직업적으로 또 다른 편견과 냉소를 낳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의심이 너무 심해지면 법 만능주의, 엘리트주의, 권위주의로 빠질 수도 있어요. 나치 시대의 판사들이 그랬어요. 정말 우수한 독일의 지식인들이 나치 하에서 말도 안 되는 판결을 해서 역사의 단죄를 받았잖아요. 건전한 회의주의를 넘어서 옳고 그름에 관한, 인류 보편성에 관한 가치판단을 버리면 그런 우를 범하게 돼요. 법이 무시무시한 파시즘의 도구가 되는 거죠.”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생각나네요. 최근 청문회에 김기춘, 우병우 같은 법률 관료 출신들이 나와서 자신의 행적에 ‘모르쇠'로 일관해 국민의 공분을 샀는데요. 어떻게 보셨나요?

“제가 얘기할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치 시대 법 관료들의 이야기를 더 해주시죠.

“아무리 천재이고 기능적으로 뛰어나도 냉소주의에 빠진 엘리트가 큰 권력을 쥐면 그걸 갖고 놀게 돼요. 공깃돌 놀 듯이. 그게 얼마나 무섭습니까. 인간의 보편 가치에 대해 코웃음을 치면서 테크닉만 발달한 채로 위험하게 달리는 게. 저도 위험에 빠질 수 있죠. 그래서 근본은 회의주의자지만 인간의 가치를 믿는 어려운 저글링을 계속하는 거예요.”

-스스로에 대한 검열은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도 우월감을 경계하지만, 매도 많이 맞아야 해요. 인간이 참 나약한 존재예요. 자기가 다 옳은 줄 알아요. 무오류성의 환상에 빠지기 쉬운 거죠. 저는 이순신 장군도 의심할 만큼 천성이 삐딱한데, 그런 저조차도 저에게는 관대하더군요. 그래서 수시로 주변에 물어봐요. ‘나 오버하는 거 아니야?’ 제가 가진 행운은 가차 없이 저를 비판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는 거예요.”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얘기해도 재수 없는 얘긴데, 어렸을 때부터 책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제가 수학이나 과학 이런 데는 젬병이고 그냥 심각한 책벌레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화장실에 앉으면 벽에 붙은 신문 쪼가리라도 읽었어요.

덕분에 언어적 능력이 과도하게 발달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제도 교육에서는 이런 습성이 있는 아이가 유리한 것 같아요. 단시간에 많은 텍스트를 읽고 기억하고 재현하는 사람이 시험에 유리하잖아요.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아마 “여기서 틀리라고 냈겠지?” 출제자가 파놓은 함정과 숨은 의도를 귀신같이 찾아냈어요.”

-시험에서 출제자의 함정과 숨은 의도를 추론해내는 요령이 직업과도 연관이 있을 듯합니다. 판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시험 준비해서 시험 보는 게 판사의 일상이에요(웃음).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 재판하는데, 법정에 오는 사람들의 속사정을 듣는 일이에요. 시험 준비하듯 사람들의 선행 서류들을 읽고 예습을 해요. 서류를 읽고 핵심을 정리하고 쟁점을 파악해 메모하죠. 원고와 피고의 삶을 이해해야 하니까요. 사건 파악, 이야기 듣기, 그리고 판결문 쓰기… 읽고, 듣고, 쓰고. 이걸 일주일 단위로 끝없이 반복하는 거죠.”

-말은 거의 안 합니까?

“안 해요. 진행을 주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피고 말씀하시죠’.”

지난 해 12월에 출간된 문유석의 첫 소설 ‘미스 함무라비'.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미생’ 같은 웹툰이나 ‘앨리 맥빌’ 같은 미국 법정 드라마 등을 염두에 두고 가볍게 썼다. 법원과 재판에 소개하는 해설도 곳곳에 있다.

-읽고 듣고 쓰고… 그게 판사의 일이라는 거죠?

“네. 좋은 의도로 얘기해도 법정에는 승패가 있고 유불리가 있어요. 법정에선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짓기가 조심스러워요.”

-그래서 판사가 얼굴이 그토록 무표정하군요.

“그게 바로 심판의 본질이에요. 어느 색깔도 없이 네 편도 내 편도 아니고 규칙 대로 판단하는 것. 재미없어 보일 수밖에 없는 직업인 거죠. 플레이어로 뛰고 싶으면 검사나 변호사를 해야죠.”

◆ 법정에서 약육강식의 바닥을 봐… 여성 판사들도 ‘남초' 사회에서는 어려움 겪어

-법대는 스스로 지원했나요?

“그렇죠. 당시엔 선지원이었으니까요.”

-사회 기득권층이 되기에 좋은 선택입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라 내 능력으로 취업해서 먹고 살아야 했어요. 독립적으로 안정적으로 살려면 고시 봐서 공무원이 되어야겠다, 이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갔죠.”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은 뭐죠?

“국문과, 미학과, 연극영화과에 지원해서 소설을 쓰거나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재밌게 살고 싶었는데, 비겁했죠. 모험을 걸 만큼 자신이 없었어요.”

-특별히 어떤 텍스트를 흥미를 느꼈나요?

“전 순정만화를 보고 자랐어요(웃음). 고등학생 때 동네 만화가게 가면 순정만화 코너가 따로 있거든요. 여학생들 사이에 시커먼 남학생 하나가 끼어 앉아 있는 식이었죠. 처음에는 저도 ‘외인구단’ 같은 걸 자주 봤는데, 야구나 승부 싸움질하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어느 날 여동생이 보는 ‘유리 가면’을 뺏어보다가 빠져들었어요. 거기 어마어마한 세계가 있더라고요. 프랑스혁명, 백년전쟁, 장미전쟁 이런 것들이 다 만화로 나와 있었으니까. 꽃미남 혁명가들도 많이 나오고(웃음). 저는 만화에서 세계사를 배웠어요. ‘북해의 별’도 만화계의 운동권 서적이잖아요(웃음). 그때부터 이야기를 참 좋아했죠.”

-순정만화 속의 여성과 현실의 여성은 차이가 큽니다(웃음).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칼럼으로 자주 표현하시더군요. 여성들은 때리지 말라, 용변 보는 데 몰카 찍지 말라, 강간하지 말라, 죽이지 말라고 분노하는데, 남성들은 여자는 왜 군대 안 가냐, 더치페이 왜 안 하냐, 왜 농담에 예민하게 구느냐며 분노한다고. 이거야말로 해일이 이는 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일갈하면서요.

“네. 이번에 쓴 소설 ‘미스 함무라비’도 그렇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런 얘기를 많이 하게 돼요.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한 건 아니지만, 직업상 법정에서 인간의 폭력을 날 것 그대로 목격하는 일이 많거든요. 형사재판을 하다 보면 끔찍한 일이 정말 많습니다.

말다툼하다 남편이 아내를 망치로 때려 살해하고, 여관으로 다방 종업원 불어 성폭행한 뒤 살해하고,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를 불 지르고 물가로 도망치니까 돌로 쳐서 살해하고… 그 풍경을 보면 마치 포식자인 한 종이 다른 종을 일방적으로 살육하는 것 같죠.

평생 맞으면서도 반항도 못 해보고 갇혀 사는 아내들은 또 얼마나 많게요. ‘안전이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젊은 여성들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어도 무서워서 말을 못 꺼낸다고 해요. 찌질하게 성생활을 동영상으로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하니까요.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하이에나가 토끼 잡아먹는 느낌이에요. 영화 ‘주토피아'의 이면, 실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바닥을, 저는 법정에서 봐요.”

문유석의 첫 에세이 ‘판사 유감'. ‘판사의 글이 이렇게 흥미로울 줄 몰랐다'는 김정운 교수의 추천사가 눈에 띈다.

-법정도 여전히 남성중심공동체고, 강자의 시각이 우선할듯싶은데요.

“제 경우는 다행히도 젊은 여성 판사들과 독서토론이나 합창단 활동 등 여러 모임을 함께 하면서 힘든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기를 갓 낳아 기르는 젊은 여성판사들과 대화하다 보면 ‘남초’ 조직에서 젊은 여성으로서 갖는 불안과 억압이 대단해요.

대한민국에서 여자 판사면 가장 성공한 사람인데, 다들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해요. 이 사람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중 삼중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미안해져요. 하물며 판사들이 이 정도면, 법원 바깥의 다른 직업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판사는 안전도 면에서 최상위 직업인데도 그렇습니까?

“그들도 지하철에서 성추행 안 당해본 적 없고, 어렸을 때부터 ‘바바리맨’ 한번 안 만나본 사람 없고, 똑똑한 여성이라고 더 멸시당하고. 저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기득권을 누리고 살았나 싶어요. 동료 여성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일반 여성들에게도 마음이 가는 거죠.”

-약자의 아픔을 감지하는 미세한 촉이 발달한 것 같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고 들리는 데 모르는 척할 수 없으니까요.”

◆ 판사에게 기록물은 타인의 삶… 손에 낀 골무가 닳도록 읽고 또 읽는다

-과거에는 통상 성적순으로 판사 검사 변호사를 한다고 알려졌는데요. 특별히 판사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제 성격에는 판사가 맞았어요. 판사는 대학교수처럼 고적한 직업이에요. 대법원장도 대통령도 갓 스무 살 넘은 판사에게 직접 지시하거나 관여할 수 없어요. 그러면 범죄거든요.

반면 검찰은 상명하복이 엄격한 군대 같은 조직이고, 변호사는 자유업이지만 클라이언트 때문에 또 자유롭진 못하죠. 좀 더 비즈니스 마인드도 있어야 하고. 요즘엔 대형 로펌이 생겨서 인기가 더 많아요(웃음). 결론적으로 저처럼 개인주의자 성향이 강한 사람은 선택지가 판사밖에 없어요(웃음).”

-예전에 황우석 공판을 방청한 적이 있는데, 법정이 생각보다 드라이해서 놀랐습니다. 증거와 자료를 늘어놓는 지루한 공방이더군요. 가장 눈에 띈 건 검사들이 옆에 쌓아 둔 분홍색 기록물 보자기였어요.

“보자기, 그게 핵심인 거죠. 판사들은 이미 보자기에 있는 서류를 밤을 새워 보고 왔고..., 종이 밑에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미국 법정처럼 말로 화려하게 싸우는 게 아니니까요. 무조건 텍스트 싸움이에요. ”

-판사 일이 대체 불가능한 가내 수공업이라고요.

“맞아요. 분업이 안 돼요. 한 명이 기록을 다 보고 판결을 내야 하니까. 중요한 사건도 많아야 3명이죠.”

-그럼 지금 헌법재판소에서는 어마어마한 걸 읽는 작업을 하고 있겠군요.

“9명이 그걸 다 읽고 있는 거죠. 중요한 부분엔 가철도 하고 포스트잇도 붙이고. 그중에 더 중요한 걸 추리고.”

-판사에게 기록물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타인의 삶이죠. 굉장히 주관적으로 편집된 타인의 삶. 그걸 검사는 검사의 시각으로, 변호사는 변호사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판사는 그 삶이 얼마나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재현된 지 의심하고 판단하는 거죠. ”

왼쪽은 쌍커풀이 있어 부드럽고 오른쪽은 매서워보인다. 스스로 ‘아수라 백작'같은 용모를 지녔다고 했다.

-거기서 진실을 가려낼 수 있습니까?

“사법제도의 근원적 고민이죠. 과연 증거를 통해 객관적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거짓말 탐지기로 실험을 해도 오차가 나와요. 100% 확신을 하고 선의로 증언해도 사실과 다를 수 있어요. 인간의 뇌라는 건 그렇게 구성돼 있거든요.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현하니, 그게 정확하면 더 이상하죠. 그런 한계 속에서 오판 가능성이 있어도 각자 칼 들고 싸우는 것보다는 낫다는 믿음으로 사법 제도를 선택한 거죠. 억울하더라도 3심까지 결과가 나오면 따르기로 약속하고. 어차피 법은 차선이자 차악이거든요.”

-법정 소설 ‘미스 함무라비’에서 판사가 쌍방을 설득해서 ‘조정’하는 과정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조정률이 높은 판사의 어법을 눈여겨봤더니, 원고 피고 쌍방에게 ‘~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뭐가 제일 억울하세요?’ ‘잘 해결될 겁니다' 등등의 어휘를 썼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조정의 달인인 후배 판사 이야기인데, 핵심은 다른 데 있어요. 그 후배 판사는 전날 밤 기도를 한다고 해요. ‘그분들의 고통을 도와줄 힘을 제게 주소서’라고. 굉장히 감동했어요. 그러니까 그 판사는 사건 하나 ‘떼는’ 것, 판결을 일로 바라보지 않고,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걸 느끼고 마음을 여는 거죠. 기적 같은 일이에요.”

-의사가 기도하고 수술하는 것처럼 말이군요.

“네. 그런 판사가 있어요. 어느 조직이나 직업이든 그런 사람이 있어서 세상이 살만한 거죠.”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말에 관해 쓰신 걸 읽었어요. 사람을 살해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도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더군요.

“네. 말이 정말 흉기죠.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에도 나오잖아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모욕감이란 게 정말 무시무시한 거죠.”

-참말인가, 필요한 말인가 친절한 말인가, 말할 때 항상 이걸 생각한다지요?

“네. 세 가지 다 신경 쓰기 힘들면 ‘필요한 말인가’만 생각해요. 참과 거짓은 구별하기 힘들고, 친절은 상대적이니까. 불필요한 말만 안 해도 갈등이 줄어요.”

◆ 살인 사건보다 지독한 건 이혼 사건과 상속 사건… 가족끼리 더 치열한 법정

-법정에서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더럽고 잔인한 꼴을 다 봤을 텐데, 가장 끔찍한 사건은 뭔가요?

“이혼 사건이에요. 살인사건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특히 이혼하면서 재산보다도 양육권 분쟁할 때… 요즘엔 젊은 부부들이 서로 애를 안 키우려고 싸워요. 반대로 애를 데리고 오려고 싸울 때도, 한때 사랑해서 같이 살았던 사람을 인간쓰레기로 만들어요. 친척들 다 나와서 ‘저 사람은 맨날 바람 피던 인간, 시부모를 개떡처럼 보는 인간,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인간’이라고 패륜아를 만들어요.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을.”

-어떤 기분이 드나요?

“다 나가라고 하고 싶어요. 차라리 국가가 키우겠다고. 너무 절박해지면 금도라는 게 없어지거든요. 전쟁이다 보니 실제보다 더 과장해서 상대를 죽여야 해요. 상속분쟁도 그렇죠.”

-가족끼리 싸울 때 가장 처절하군요.

“남들끼리 하는 건 그러려니 하죠. 그런데 친형제나 가족끼리 재산 때문에 싸우면 인간 본성의 바닥을 봐요. 구십 먹은 노인이 아픈 자식한테 5억짜리 집을 주면 일가친척이 다 일어나요. 상속 분쟁은 100% 치매로 몰고 가요. 아니면 재산을 노리고 노인을 몰래 모셔갔다고 하거나.

살벌해요. 아들 며느리가 다 나와서 서로를 물고 뜯는데, 눈이 살기등등해요. 그거 없다고 굶어 죽는 극빈층도 아닌데... 다들 점잖은 직업도 있고 재산도 꽤 있는데 그럽니다. 차라리 없으면 신경을 안 쓸 텐데, ‘형이 나보다 왜 천만 원 더 가져가?’ 이런 거죠.”

-손해 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심리죠.

“내 것에 대한 집착, 일종의 집단적 피해망상이 아닌가 해요. ‘쟤가 나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진 건, 불공정한 거다'라는.”

섣불리 진실을 믿거나,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회색의 자유주의자 문유석.

-온갖 삼류 드라마가 여기 다 있군요.

“교육 많이 받은 사람도 똑같아요. 아파트 재건축 분쟁을 하면 엄청난 지식인, 변호사, 사장님, 교수 이런 분들이 “왜 우리 아파트는 남서향인데 쟤네는 정남향이냐” 이걸로 죽어라 다퉈요. 한쪽이 조합장과 돈거래가 있을 거라고. 좁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치열하게 살다 보니 그래요.

똑같이 못살면 괜찮은데, 옆에서 빌딩 올라가는 거 보면 눈이 뒤집어지는 거예요. 재개발되고 땅값으로 벼락부자가 되면 가족은 물론 친구, 지역 공동체가 와해하는 경우도 허다해요. 반칙으로 큰 부를 이룬 사람을 보면 다들 예민해지는 거죠. 불공정에 관한 불편한 감정이 법정에서 대폭발하는 거고요.”

-‘미스 함무라비'는 일반인에게 신비에 싸여있던 판사들의 생활을 알려줬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큽니다. 판결에 앙심을 품은 재소자들이 간혹 교도소에서 ‘곧 찾아뵙겠다'는 협박 편지를 보낸다는 말엔 뒷골이 서늘해지더군요.

“‘판사에게 화살도 쏘는데요, 뭘(웃음). 칼을 들이대는 직업이니 부담이 크죠. 의사는 살리려고 칼을 들이대도 잘못되면 욕을 먹는데, 저희는 대놓고 당사자와 가족에게 고통을 주는 거니까요. 혹 잘못 판정하면 불교적으로 큰 업을지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업을 가지 않으려고 다 풀어주면, 그거야말로 권력 남용이죠. 나 좋은 사람 되자고 눈앞의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 순 없어요.

영세민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으면 내 돈이라도 주고 싶지만, 전체를 봐야 하는 거잖아요. 단순 구제가 제 임무가 돼서도 안 되고. 눈앞에서 호소하는 이해관계자뿐 아니라 그 판결로 영향을 받을 다수를 함께 생각해야죠. 그렇다고 또 법과 원칙대로만 한다면, 사람이 왜 필요합니까. 컴퓨터가 하면 되죠. 적법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예외적인 사건이 있고, 이런 걸 발견해서 제시하는 용기가 필요한 거죠.”

◆ 판사에게 동정심은 직권 남용, 그러나 법대로만 한다면 기계에게 심판 맡겨야

-판사에게 동정심은 불필요한가요?

“판사가 동정심을 개입시키는 건 지위 남용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의 선한 가치관은 개인의 자선으로 표현해야 하는 거고요. 판사는 헌법 질서 안에서 옳은 일을 할 뿐이죠. 헌법 자체가 그 동정심을 자유와 평등, 복지, 국민의 행복 추구권이라는 법으로 포섭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요.

그러니까 동정은 단지 ‘긍휼한 마음'으로 파악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국민이 법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권이라는 것이고, 그걸 몰라서 누리지 못한다면 판사로서 알려줘야 하는 거죠. 결국, 동정과 법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에요.”

-헌법에 대해 경외감을 갖고 있군요.

“네. 헌법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 역사의 산물이거든요. 프랑스 혁명,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부터 시작해서 계속 인류가 시행착오를 거쳐서 현재 21세기에 최선이라고 합의한 것들이 헌법이거든요. 문명국가의 헌법은 다 비슷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인류의 문명을 경외하는 거죠.”

-혹 영향을 받은 소설이 있나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나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 혹은 정유정의 ‘종의 기원' 등등.

“근래에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책은 하버드대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교수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책이에요. 흉기로 쓸 만큼 두꺼운데, 인간 폭력성의 기원을 밝힌 책이에요. 원시 시대는 잔혹한 타살이 대부분이고, 고대나 중세도 다르지 않아요. 상업화, 도시의 발달, 르네상스 등을 거치면서 인간의 폭력성은 어떻게든 제어되어 왔다는 거죠.

지금 시대가 전쟁과 폭력과 테러 등이 많지만, 과거에 비하면 훨씬 평화로워요. 인류의 합리성을 신뢰하면서 앞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참 힐링이 되더라고요.

저도 법정에 서면 인간의 바닥을 보지만, 과거보다 많이 발전했다고 느껴요. 과거에는 없었던 성희롱 같은 범죄도 이제는 규제하잖아요. 우리나라에 성희롱이 처음 이슈화된 것도 서울대 우 조교 사건 때부터거든요.”

-1993년이었죠?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으로 성폭력방지 특별법의 초안이 마련된 시점이...

“그 즈음이죠. 어쨌든 그때는 권리의 침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인정되는 거죠.”

-그럴수록 법 조항은 복잡해지겠네요.

“다 같이 자유로우려면 복잡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육체적으로 강하지 않은 우리는 자유가 없어요.”

불필요한 말만 하지 않아도 갈등이 줄어들거라고 조언하는 문유석. 그는 우리 시대의 석학이자 큰 어른인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98세) 명예교수의 손녀사위다.

◆ “내가 불행하니까 너도 불행해야 돼"라는 생각이 발목 잡아… 행복의 연쇄 작용 일어나야

-우리나라 사법 환경에서 가장 크게 개선되어야 할 점은 뭔가요? 전관예우입니까?

“사건이 너무 많아요(웃음).판사도 더 있어야 하고 법정과 속기사, 실무관 등이 더 늘어나야해요. 정의도 ‘한정된 자원’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한정된 예산에서 법원이 큰 형사 사건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사실 벌금형 같은 작은 사건이라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중요한 것이거든요. 재판에서 국민들 이야기를 성의있게 들어주고 창의적인 해결을 하려면, 물적 토대가 필요해요.”

-야근이 많습니까?

“어느 날 야근하다가 택시를 탔더니, 택시 기사분이 ‘왜 이렇게 늦게 퇴근하냐’ 그래요. 그래서 ‘공무원이 야근하는 걸 국민들도 아셔야 할 텐데’라고 했다가 집에 가는 내내 혼이 났어요(웃음).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대한민국 다 힘든데 따뜻한 직장 다니면서 불평한다고요(웃음).

그때는 ‘네네'했지만, 문득 우리 사회에는 ‘내가 불행하니까 너도 불행해야 해’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런 사회에서는 모두가 같이 불행해야 안심이 되는 거예요. 불행이 평등한 사회인 거죠. 행복의 연쇄를 해야지, 불행의 연쇄를 한다는 건 자승자박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야근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8시간 노동제는 많은 사람이 죽고 피 흘려서 쟁취한 권리거든요. 20세기 초 미국은 깡패 자본주의여서 노동쟁의를 거의 폭동 취급했으니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제도는 잘 활용해야죠. 전 행복한 판사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례지만, 판사의 급여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요?

“부장 판사면 대기업 부장 정도 수준인 걸로 알고 있어요(웃음).”

-요즘도 사건 자료를 보따리에 싸서 집에 들고 가나요?

“요즘엔 USB로 하니 간편해졌죠. 제출하는 쪽에서도 스캔만 하면 되니 양은 어마어마해졌어요.”

-딸들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웃음). 저는 저희 집에서 제일 우습고 만만한 존재에요(웃음).”

-69년생인데, 마흔아홉 살의 대한민국 남자로 살아가는 소감은 어떠십니까?

“제가 설마 이런 나이를 맞게 될 줄 몰랐어요(웃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게으르게 살면 꼰대가 되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장이 되겠지요. 열린 마음으로 활력을 찾아서 제2의 청년이 돼보려고요(웃음).”

그는 우리 사회가 불행의 연쇄 작용이 아니라 행복의 연쇄 작용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몸담은 조직에서는 어떤 부장입니까?

“가장 좋은 부장은 ‘없는 부장’이라고 생각해요. 공정하게 최선을 다해 개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에 관해서 규칙을 정하고, 팀워크에서 필요한 소통을 하도록 설계하고 그 외 사적인 것은 일절 터치하지 않아요. 가능하면 귀 기울여 듣고 꼭 필요한 것만 구체적으로 묻죠. 부담스러운 자리도 안 만들어요. 돈키호테형에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리더도 있지만 저는 햄릿형에 브레이크를 밟는 스타일이죠.”

-정말 개인주의자시군요.

“가끔은 소설가 하루키가 부러워요. 하루키의 개인주의적 면모를 그대로 용인해주는 일본 사회가 부러운 거죠. 어떤 ‘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상태. 서로가 서로에게 덜 기대하고 덜 의무를 지우고 서로의 자유를 좀 더 지지해주면 개인의 자유는 커지고 행복해질 확률도 높아져요. ‘그래. 나도 힘든데, 너도 힘들겠지.’ 이런 정도의 여유가 생기는 거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맡으면 어떤 말로 포문을 여시겠어요?

“인간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달라요. 진보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은 뇌 구조부터 다르다는 이야기도 있죠. 정의에 대해 끝없이 논쟁할 수 있는 사회가 역설적으로 정의로운 거죠. 그 절차가 강자 약자에게 공정했다는 합의만 있어도 우리는 충분히 승복할 수 있거든요.”

-판사는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벽에 똥칠할 때 까지요(웃음). 저는 제 직업을 사랑해요. 과분할 정도로 보람이 있어요.”

-언제 보람을 느끼세요?

“사소해요(웃음). 가령 속에 쌓인 게 많은 할머니가 법정에서 하소연을 길게 하면 적당히 끊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날따라 제가 시간적 여건이 됐어요. 법적으로 절대 이기기 어렵지만, 원고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그 이야기를 1시간 동안 들어드렸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이제까지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판사님밖에 없다.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거예요. 저는 우연히 작은 일을 한 건데도 정말 고마워하세요. 직업상 권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상대에게 조금만 배려하고 들어줘도 힘을 줄 수 있다는 게, 참 행복한 거죠.

백화점 직원이 친절한 건 당연한 거고, 판사가 친절한 건 과분한 감사를 받으니, 어쩌면 불공평한 건데… 어쨌든 노력 대비 많은 걸 줄 수 있는 일이에요. 가끔 후배 판사에게 이야기해요. ‘이게 얼마나 굉장한 일이냐? 우리는 맡은 일만 잘해도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이런 날로 먹는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웃음)”

2005년, 중앙법원 파산부 시절에 문유석 판사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파산이 뭐길래'라는 제목의 그 글은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만큼이나 사회적 파장이 컸다. 신용불량자에게 빚탕감으로 회생의 기회를 열어 주자는 그 글은, 한동안 ‘모럴 헤저드' 논리로 힘을 잃은 ‘파산자 면책 제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거기엔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갑남을녀가 등장한다. 몇 차례의 수술로 카드빚을 진 아픈 택시 기사, 언니의 사업 자금을 대다 동반 추락한 여동생 가족, 형님 아우 하다 돈으로 앙금이 진 이웃사촌, 고시촌에 살며 재기를 꿈꾸는 부부... 빚으로 가정이 해체된 집의 어린아이들은 판사 아저씨를 만나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사채업자가 깡패를 보내서 돈 갚으라고 협박할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서 감옥에 가면 빚 다 갚을 때까지는 못 나오는 건가요?’

우리 인생도 서로서로 돌려막기 하며 사는 거라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두 번째 찬스를 주어야 자본주의의 바퀴가 굴러간다고, 문 판사는 담담하게 진술한다. 그의 글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저도 호그와트에라도 가서 진짜 마술을 배워왔으면 좋겠습니다... 빚갚으라며 아빠 멱살을 잡던 험상궂은 아저씨의 기억도, 소풍 때 엄마아빠와 온 학교친구들 곁에서 느낀 부러움도 영원히 사라지도록 말이죠. 하지만, 평범한 머글인 판사들이 할 수 있는 마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손에 골무를 끼고 기록을 뒤적이다가, 컴퓨터 자판을 눌러 주문을 외웁니다.

'주문, 파산자를 면책한다'’

가장 좋은 부장은 ‘없는 부장'이라고 말하는 문유석 판사. 서로가 덜 기대하고 덜 의무를 지우고 더 자유를 주면 행복의 여유 공간이 넓어질 거라고.

판사석이라는 높은 안전선 안에서 판결문이라는 문서 뒤에서 뒷짐 지고 앉아, 저 아래 쓰레기더미 같은 보통 사람들의 불운을 모른 척 하지 않았던 문유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판사에게 동정심은 직권 남용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기본권의 보장 안에서 파묻혀 있던 보석같은 ‘자비'를 찾아내는 일, 그게 용기라고. “우리는 맡은 일만 잘해도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니, 이런 날로 먹는 직업이 어디 있겠느냐?”고 소탈하게 반문하며.

일찍이 빅토르 위고는 ‘장발장'에서 한 편엔 무조건적 관용의 상징인 미리엘 주교를, 한편엔 몰인정하게 직업에 충실했던 자베르 경감을 등장시켰다. 2017년 대한민국엔, 그 양극단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엄격한 휴머니스트, 문유석이 있다. 섣불리 진실을 믿거나,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회색의 자유주의자. 원고와 피고의 억울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불공형의 오차를 줄일 뿐인 그가.

‘누구든지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씀도, 지혜의 판관 솔로몬도 아득해진 이 법률 전쟁 시대에, ‘미스터 함무라비', 그가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