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덕후'를 자처하는 진화학자가 '다윈 룸'으로 들어선다. 주인공은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장대익(47) 교수, 장소는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의 과학전문서점 북파크 3층 강연장. 이틀 뒤인 14일, 그는 이 방에서 강연한다. 장대익 지적 인생의 한 매듭이자, 10년 프로젝트였던 '다윈 3부작' 완결을 기념하는 자리다. 논쟁으로 보는 현대진화론인 '다윈의 식탁'(2008)을 시작으로, 진화하는 지식의 최전선 '다윈의 서재'(2015)를 거쳐, 이번 '다윈의 정원'(바다출판사 刊)에서는 진화론이 꽃피운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다뤘다. 식탁과 서재로 모자라 정원까지. 아무리 현대 생물학의 영웅이라지만, 그는 왜 이리 찰스 다윈(1809~1882)을 '편애'하는 걸까. 장 교수는 '인간미 폴폴 나는 완벽주의자'라는 이율배반적 이유를 댔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천재였죠. 생명의 다양성과 정교함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한 최초의 과학자였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집단 따돌림이 두려워 '자연선택'이라는 아이디어를 20년이나 숨겼던 소심한 완벽주의자. 정말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인간미(人間美)는 '다윈 3부작'의 커튼 뒤에서도 폴폴 날린다. 우선 1권 '다윈의 식탁'을 탄생시킨 주역은 사실 문학이었다는 고백. '글 쓰는 과학자'로서의 삶을 결심하고 원주 토지문화관의 예술인 창작실을 찾았을 때, 그는 생전의 박경리·박완서 선생과 2주 동안 매끼 밥을 같이 먹는 '호사'를 누렸다고 했다. 스토리를 품은 과학 이야기, 진화론 대가들의 가상대담이라는 허구적 형식을 창안한 것도 이때였다.
진화생물학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던 영국 옥스퍼드 대학 해밀턴 교수가 급서(急逝)하고,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전 세계 학자들이 장례식을 찾고, 이를 계기로 열린 지상 최대의 진화론 논쟁을 영국 BBC가 6박 7일 동안 중계한다는 설정. 세계 최고의 대중적 지식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리처드 도킨스, 그 도킨스가 자신의 지적 영웅이라고 부른 과학철학자 대니얼 데닛 등 30여명 대가가 두 팀으로 나뉘어 설전을 벌이고, 대니얼 데닛의 제자였던 장 교수가 서기를 맡아 A부터 Z까지를 정리한다는 스토리였다. 내용은 100% 사실에 바탕을 둔 용쟁호투 논쟁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토론회. 하지만 소설가를 꿈꿨던 진화론자의 경쾌한 필력은 수많은 독자를 깜빡 속여 넘겼고, 서울의 한 명문대 생물학 교수는 BBC 원문을 찾을 수가 없다며 도움을 요청해 오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원래 모태신앙의 기독교 신자였다. 카이스트 기계공학과를 다니던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는 것. 하지만 진화론 공부를 거듭하며 신앙에 거리를 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됐고, 마침내 '거듭난 무신론자'로 스스로를 호명했다. 경험적 증거가 흘러넘치는 상황에서 신앙과 공부를 양립하기 어려웠다는 것. "어머님은 뭐라시냐"는 짓궂은 질문에, 그는 "아직도 새벽마다 탕아가 돌아오기를 기도하신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런던 교외에 자리 잡은 찰스 다윈(1809~1888)의 정원은 꽃과 나무를 넘어 지식의 실험실이자 융합의 마당이기도 했다. 인문과 과학을 가로지르며 영토를 넓혀가는 2017년의 진화심리학이지만, 대중에게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학문. 현대의 진화심리학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는 거창하고 추상적인 담론을 피하고,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예를 들었다. 분리수거장 벽에 그린 가짜 눈(eye)이다. 눈이 그려진 스티커를 붙여 놓는 것만으로 분리수거율이 급등한다는 것. 그 가짜 눈이 우리의 진화된 '평판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은 21세기 인문"이라며 "진화론적 시각에서 설명되고 활용될 수 있는 사례는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1. 식탁. 서재. 정원. 독자들이 농담삼아 ‘다윈 덕후’라고 할 것 같다. 왜 이리 다윈을 편애하느냐고 무례하게 묻는다면.
우선, 그가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생명의 다양성과 정교함을 자연적 원인으로 제대로 설명한 최초의 과학자였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흐려놓은 이단자였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왜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궁극적 설명을 제공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우리는 그의 통찰 때문에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를 끊어짐 없이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지성사에 남긴 다윈의 발자취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런 업적만으로는 덕후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내가 다윈의 덕후가 된 것은 그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지식인들 중에서 그만큼 정겨운 이도 드물 것 같다. 그는 천재이긴 하지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류의 천재는 아니라 볼 수 있다. 따개비 같은 미물에 꽂혀 8년간을 몰두 한 후에 1천 쪽이나 되는 책을 내고야 만 학자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수시로 ‘내가 왜 이런 연구를 시작했을까’라며 후회했던, 정말 친근하고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딱 50세에 등이 떠밀려 이라는 대작을 발표(1859)했지만, 20년 동안이나 자연 선택이라는 아이디어를 꽁꽁 숨겼던 소심한 완벽주의자이기도 하다. 그 당시 분위기 상 너무 파격적이어서 집단 따돌림을 당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일 두 통의 편지를 쓰며 동료들과 지식을 공유했던 커뮤니케이터였고, 10권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던 글쟁이였다. 대중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아온 칼 세이건이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이들도 따지고 보면 다윈을 벤치마킹한 과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천재이지만 인간미가 폴폴 나는 그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2. 10년에 걸친 다윈 시리즈 3부작의 완결이다. 본인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10년 전쯤, 현대 진화학자들의 맛있는 논쟁을 다룬 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서(과학책인데 하루에 1천부가 팔리는 날도 있었으니.), 다윈과 진화론에 대해 더 써야겠다는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에게 반 농담으로 다음 책들은 , 같은 제목이 될 것이라고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앞서 가는 것이 항상 문제다. 다른 류의 책을 쓰고 싶어도 말을 먼저 해놨으니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했다. 게다가 책에 관한 아이디어를 말하니 사람들이 격려를 넘어 기대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결국 에서는 진화론과 관련된 책들에 관해 다뤘고, 이번 은 진화론이 꽃 피운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다루게 되었다.
물론 이 세 책이 현대 진화론의 전모를 다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진화론의 세계는 훨씬 더 넓고 깊다. 하지만 나에게 이 3부작은 내 지적 인생의 한 매듭이다. 그리고 적어도 책의 제목들에 대해서만큼은 자부심을 느낀다. 흔히 책 제목은 저자가 아니라 출판 편집자나 대표의 몫이라고들 하는데, 이 세 권의 책제목에 대해서만큼은 내 제안이 애초부터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나에게 이 세권은 완전체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글쎄.. 진화에 이미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는 진화론에 대한 다양한 변주곡들을 들려드린 셈이고, 조금 더 큰 판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과학은 논쟁이다”라는 의 명제, “무엇을 읽어왔는지가 그 사람이다”라는 의 메시지, “과학은 21세기 인문이다”라는 의 선언을 의미 있게 받아들일 것 같다.
3. 대중은 실용적이다. 현대의 진화심리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현대의 진화심리학은 우리가 왜 질투하고 어떻게 질투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남자들이 야동에 소비하는 시간만큼 여자들이 드라마에 몰두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왜 진보가 싸가지가 없어 보이는지를 말하며, 종교에 빠진 이들이 왜 자기 가족마저 버리는지도 설명한다. 왜 싸이의 강남스타일 같은 음악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한식의 세계화는 왜 멀고 험한지를 이야기한다. 욕을 처절하게 먹어도 막장 드라마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설명한다. 이런 것들보다 더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을 이야기해볼까. 분리수거장 벽에 눈(eye)이 그려져 있는 스티커를 붙여놓는 것만으로도 분리수거율은 급등한다. 그 가짜 눈이 우리의 진화된 평판 향상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적 시각에서 설명되고 활용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4. 팩션, 가상대담 형식이 이채로우면서도 대중친화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생물학 교수도 속아서 BBC 원문이 어디있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의 구체적 에피소드가 궁금하다.
에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다. 처음에 이 책이 나오고 서점을 가보니 가정/살림 코너에 꽂혀 있기도 했다. BBC 홈페이지에서 논쟁 전문을 찾지 못하겠으니 보내줄 수 있냐고 정중하게 메일을 보낸 생물학 교수도 계셨는데, 진실을 말씀드리자, “글솜씨가 좋네요”라는 답장을 주시기도 하셨다. 한번은 으로 상을 받았는데, 심사평에 “세계적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논쟁에 참여한 저자”라는 문구가 써져 있어서 소감을 이야기할 때 교정을 해드린 적도 있다(그러니까 그분은 끝까지 읽지 않으신 게다). 아직 을 읽지 않은 분들도 계실테니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다. 한편 의 문제의식은 이것이었다. ‘만일 다윈선생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면, 그의 서재에는 어떤 책들이 꽂아 있을까?’ 한 마디로 과학책에 대한 서평집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거기서 가상 대담과 스토리를 굳이 만들어서 흥미로운 독서를 이끌어내려 했다.
5. 하지만 이번 은 그런 대중적 형식을 버리고, 전문 독자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유는.
나는 내용만큼이나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전작들에서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진화론의 어려운 쟁점들을, 읽기 어려운 과학 고전들을 소개하려 했다.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대중적 소통을 추구했다. (그랬더니 “그런 대중서적은 그만쓰라”는 분도 계셨다). 은 전작과 같이 말랑말랑은 대중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깊은 이야기’를 화장기 없이 정리했다. 전작들에 대한 독자들 중, ‘그래서 당신의 주장은 무엇이죠?’라고 물었던 분이 계시다면, 이 그에 대한 답이다. 골리앗(주류 인문학)과 싸우러 가는 다윗(나의 ‘진화 인간학’)에게는 화장할 여유가 없었다. 나의 이런 ‘정색’이 낯선 분들도 계시겠지만 반가운 분들도 계시리라 믿는다.
6. 모태신앙에서 박사과정 시절 무신론자로 ‘전향’했다고 들었다. 계기와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면.
사실 나는 대학교 때 상당히 독실한 신자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리인지 알고 싶었다. 이러한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신학책과 철학책을 깊이 읽으면서 공부도 많이 했고, 신앙을 정당화하려고 토론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대학원(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 진학했고 계속해서 철학을 공부했는데, 서서히 신앙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도 실존적인 문제는 남아 있었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그러다가 과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우리의 기원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는 과학 분야가 바로 진화론이었다. 그래서 진화론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분야를 파게 되었다. 마침 그 때 최재천 교수님께서 서울대에 부임하셔서 진화 생물학, 진화 심리학을 공부하는 팀을 만들어서 연구하게 되었다. 진화론을 공부하면서 나의 신앙에 대해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이내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유신론적 세계관에서는 신이 먼저 존재하고, 그 신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 그러나 진화론적 세계관에서는 물질에서부터 생명체가 시작되고 점점 진화해서 의식을 가진 동물과 나아가 신을 찾는 인간이 나오게 된다.
유신론적 세계관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면, 진화론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경험적 증거들이 흘러넘쳐나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순간, 경전에 기초한 유신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진화론을 공부하던 초기에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썼고, 실제로 그에 관한 글도 적잖이 썼다. 그러다가 인지과학과 과학철학의 대가이자, 리처드 도킨스가 자신의 지적인 영웅이라고 칭하는 대니얼 데닛 선생님 밑에서 포스닥(박사후 연구원)을 하면서 ‘어떻게 무신론자들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세상을 이끌고 있는가’를 현장에서 보면서 ‘거듭난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 때부터 무신론자로서의 자긍심이 생겼던 것 같다. 종교학자인 김윤성 선생님, 목사이자 신학자인 신재식 선생님과 함께 이라는 책을 함께 쓴 것도 그 때였다.
7. 최근 진화심리학에서 장대익 선생님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끌었던 뉴스 혹은 발견은.
최근 밝혀지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들을 힘겹게 지켜보면서 자기기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로버트 트리버스라는 진화생물학자는 성선택 이론, 호혜적 이타성 이론처럼 진화심리학의 근간을 이룬 핵심 이론들을 제시한 석학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기만 즉, 남을 속이는 진화론적 이유는 간단하다. 남을 속임으로써 더 많은 자원을 얻어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한 경험이나 기억을 스스로 거짓되게 속이는 ‘자기기만’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트리버스는 최근 저서 에서 자기기만은 기만의 최고 전략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즉, 남을 더 잘 속이도록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심리와 행동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자기기만은 기만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고, 의식적으로 기만을 했다는 단서를 내비치치 않기 때문에 들킬 가능성도 줄여준다. 스스로가 거짓 상황을 믿고 있기 때문에 인지적 부담도 덜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기만은 기만을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지금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엘리트들 중 일부는 이미 자기기만 전략을 터득한 이도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심리는 상대방의 자기기만에 아직 취약하다. 그래서 속고 또 속는다. 자기기만의 정체를 명확히 드러내 주는 것은 오직 증거이다.
8.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에서 이제 '은퇴'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낡은 개념은.
모든 행동이 ‘유전적 적합도’와 관련이 있다는 주류 진화심리학자들의 생각이다. 에는 이에 대한 이견을 담고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대체로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번식성공도를 높이게끔 진화했고, 우리의 행동을 추동하는 것은 결국 유전자라고 믿는다. 나는 이런 믿음이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에게는 완벽하게 들어맞지만, 가치, 종교, 신념, 제도 등을 만들고 그것들에 속박당하기도 하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이 만든 인공물에 숙주 노릇을 할 수도 있게끔 진화했다.
일찍이 도킨스가 에서 ‘밈(meme)’이라는 용어를 제시했는데, 나는 그의 밈 이론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는 학자들 중 하나다. 밈이라는 것은 우리의 뇌(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사람의 뇌(기억)로 복제되어 전달될 수 있는 비유전적인 문화의 전달단위를 말한다. 밈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밈들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추운 겨울날에도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게 만드는 ‘민주주의 밈’은 우리의 정치적 마음을 사로잡은 지 꽤 오래되었다. 이번 책에서 나는 유전자와 밈의 적합도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일반 복제자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9.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지배적인 것 같다. 특히 자동화와 기계화로 인한 인간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사람이 많다. 진화심리학자로서, 당신은 어떤 희망적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생명 진화의 역사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주인공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약 20만 년 전에 나타나서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종이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생명의 역사를 볼 때 호모 사피엔스가 결국 멸절할 확률은 90% 이상이다. 대부분의 생물종들은 멸절했고, 멸절은 생명의 역사에서 일종의 규칙이다. 그런데 생명의 역사에서 인간만큼 지구의 생태계를 광범위하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가진 종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는 동료 종들을 한방에 훅 가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지배력을 가진 종이다. 따라서 지구 생명체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밈의 관점에서 보자. 인공지능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까? 쉬운 문제가 아니다. 탁월한 사회적 학습능력을 진화시킨 호모 사피엔스는 그 덕택에 문명을 만든 유일한 종이 되었지만, 그 문명 때문에 망할 수도 있는 유일한 종이 되었다. 가장 두려운 순간은 기계가 우리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를 복제하게 될 때이다. 그러면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기계가 지구의 지배자 자리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일자리의 사라짐은 소소한 문제일 뿐이다.
10. 묻지 않은 질문 중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과학과 가치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과학은 21세기 인문’이라고 주장해왔다. 사람들은 과학이 사실은 이야기하지만 가치에 대해서는 침묵한다고 믿는다. 과학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물질적으로 풍요를 가져다준 것은 틀림없지만, 삶의 의미와 실존적 가치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가치는 수많은 사실들과 함께 드러난다.
가령, 실직자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어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비자발적으로 6개월 간 실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연인과 사별했을 때 느끼는 고통과 유사한 강도의 고통을 경험한다. 이런 경험적 사실에 ‘고통을 주는 것은 나쁘다’라는 가치 진술이 합해질 때에만,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정책이 왜 중요하고 시급한지가 따라 나온다. 요점은, 가치는 늘 사실들과 함께 일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내세우려는 가치들에는 사실상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사실들,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관한 수많은 새로운 경험적 사실들이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실들을 업데이트 해줘야 한다. 이 업데이트를 하는 작업이 바로 과학이다. 그러니 과학이 가치에 침묵한다는 통념을 틀렸다. 에서 다루고 있는 진화론/뇌과학/영장류학/심리학은 그동안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부지런히 업데이트 해준 이론들이다. ‘과학이 21세기 인문’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