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100명을 국회로"

2003년 11월 26일. 17대 총선을 앞두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늘리기 위한 여성계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계는 비례대표 의석 확대와 비례대표 50%, 지역구 30% 여성할당제 등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국회의원 272명 중 여성은 15명으로, 5.5%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13년 여가 지난 지금, 여성 국회의원 수는 51명이다. 여성의 국회 진출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많이 부족하고 '여성 100여명을 보내겠다'는 꿈에는 아직 못 미쳤다.

여성이 정치하면 다르다?

처음에 여성의 정치 진출을 두고, 여성계가 강조한 부분이 있다. "현재 정치는 부패했으며, 이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이 정치하면 '맑고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로써 여성 정치인에겐 기존의 남성 정치인들과는 다른, 적극적 의미의 도덕성이 기대됐다. '기존의 남성 기득권에 저항하고 도전할 힘이 있는 여성', '기존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힘이 있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구축한 것이다.

과연 여성의 정치 참여는 부패한 정치를 깨끗하고 맑게 만들었을까. '여성' 정치인들은 여성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여성 문화를 바꾸었을까?

여성 정치인, 열심히 뛰었다지만…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여성 관련 법안에 대한 개정을 두고 남성의원과 여성의원 간 입법활동은 큰 차이가 없다. 정당 구분 없이 남성과 여성의원의 발의안 수를 살펴보면 남성 의원은 133개, 여성 의원은 139개를 발의하여 19대 국회 동안 여성관련 법안과 관련하여 6개 정도의 발의안을 더 제출했다.

19대 국회는 여성 분야 입법 성과를 거뒀다. 모든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폐지됐다. 그동안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 고소가 있어야 처벌이 가능했으나 친고죄 폐지로 피해자의 고소나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처벌할 수 있게 됐다. 국회 아동·여성 대상 성폭력 대책 특별위원회 활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또 1995년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이 20년 만에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전부 개정돼 시행됐다. 정책 추진 체계 강화와 성 주류화 조치 체계화, 여성의 참여 확대, 인권 보호와 복지 증의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여성의 경력단절 예방과 관련한 법안은 단 한 건도 국회를 통과되지 못했다. 정부가 '재직 여성 등의 경력단절 예방'을 주요 과제로 수립했음에도 이를 뒷받침해줄 관련 법은 관련 상임위에 계류했다.

성매매 방지를 위한 가해차 처벌 강화를 담은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도 여전히 국회에 잠자고 있다. 공공기관에서의 여성 임원 확대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 역시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여성 의원 수의 증가는 남성이 해결하지 못한 차별적인 이슈를 국회에서 논의하고 해결해갈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정치권 내에서 여성 정치인은 여성 대중을 적극적으로 대변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럼에도 여성 정치인들의 '여성 관련 법안' 발의 건수를 살펴보면 여성을 대표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국회의원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된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14년간 대표 발의한 법안에서 '여성'과 관련된 법안은 한 건도 없었다.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주장하며 새누리당 최고위원에 출마해 당선된 김을동 의원 또한 8년 동안 대표 발의한 법률안 중 '여성'과 관련된 법안은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개정안과 결혼중개업의 관리에 관한 개정안으로 손에 꼽는다.

사회·정치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정계에 입문했다고 하는 나경원 의원도 대표 발의 법안 중 '여성'과 관련된 법안은 호주제 폐지로 인한 관련 법 조항의 개정, 여성재소자의 처우개선을 위한 관련 법으로 역시 손에 꼽는다.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에, 여성의 높아진 사회적 지위는 더 높은 잣대가 요구된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은 여성에게 더 큰 기대와 더 큰 실망이 따르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첫 여성 총리와 첫 여성 대통령의 선례는 많은 충격을 주었다.

2015년 8월 서울구치소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던 중 눈물을 흘리는 한명숙 전 총리

헌정(憲政) 사상 첫 여성 총리이자 야당 대표를 지낸 한명숙 전 총리. 그는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가, '실형 사는 첫 총리'라는 불명예도 얻었다. 한 전 총리는 대법원에서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비례의원직을 잃었고, 10년 동안 공직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은 '탄핵'이라는 위기를 맞았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법치로 운영하지 않았고, 청와대와 정부조직 기업을 통제하는 데 적절하지 못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영입했던 '이회창 키즈' 여성 정치인 세 명은 갈등을 빚고 있다.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 바른정당 이혜훈 의원,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2015년 12월 조윤선 전 수석과 기자회견장에 들어오던 이혜훈 전 의원이 마주치고 있다.

나경원 의원과 이혜훈 의원은 신당 합류 문제로 대립 중이다. 서로 공개사과를 놓고 "어이가 없다"며 부딪쳤다.

이혜훈 의원과 조윤선 장관도 '최순실 게이트'로 법정싸움을 벌이게 됐다. 이 의원은 조 장관이 최순실씨를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미리 알았다는 취지로 라디오 방송에서 인터뷰했고, 조 장관은 이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세 사람은 비슷한 연령대에 정치 입문 시기도 겹쳐 '여성 트로이카'라고 불리며 항상 비교 대상이 돼 왔다.

나경원 의원

나 의원과 이 의원은 서울대학교 82학번 동기로, 전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학교에서 단짝같이 붙어 다녔다. 그러나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을 계기로 이 의원은 친박계, 나 의원은 친이계로 나뉘면서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조 장관도 두 사람과 질긴 인연으로 얽혔다. 조 장관은 특히 나 의원과 자주 언급됐다. 특히 당 대변인 등 요직을 두고 경합을 벌였다. 2004년 공천 당시 엇갈린 두 사람은, 이후 다른 궤적을 걷게 됐다.

말을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막말'로 홍역을 치른 정치인은 꽤 많다. 홍준표 의원의 여성 차별주의적 발언은 유명하다. 청년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화여대 계집애들 싫어한다. 꼴같잖은 게 대들어 패버리고 싶다"고 발언한 적이 있으며, 야당 소속 여성의원에게 "일하기 싫으면 집에 가서 애나 보든지 뱃지 떼라"고 하기도 했다.

남성 정치인의 막말에 대항하기라도 하듯 여성 정치인의 막말도 예외는 아니다.

19대 국회 때 새누리당 소속 김을동 전 의원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여성 예비후보들을 향해 "우리나라 정서상 여성이 똑똑한 척하면 굉장히 밉상을 산다. 약간 모자란 듯한 표정을 짓는 게 한결 낫다고 생각한다"고 하거나, "여성 후보는 남성 후보에 비해 사적인 부분을 내세워 다가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본다"고 말해 빈축을 샀다.

여당 여성의원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그가 여성의 능동적인 정치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동시에 양성평등에 위배되는 가부장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쏟아낸 것이다.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에 입성했던 임수경 전 의원은 술자리에서 만난 탈북 대학생에게 도를 넘어선 욕설을 쏟아낸 사실이 알려진 적 있다.

당시 임 의원은 "야,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까불지 마라.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들이 굴러 와서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겨? 대한민국 왔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라고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여옥 전 의원

한나라당 소속이던 전여옥 전 의원 역시 국회의원 임기 중 했던 막말로 유명세와 악명을 떨쳤다. 17대 국회 당시 전여옥 전 의원은 국민의 정부 시절 이뤄진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해 "김정일이 껴안아 주니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치매 든 노인처럼 얼어서 서 있다가 합의한 게 6·15 선언"이라고 비난했다.

여성 정치인 혐오로 번지는 건 아닌지…

미국 경제주간지 포츈은 "박근혜 대통령 사태로 한국 정치에서 여성들이 주권을 잡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보도했다. 포츈은 "여성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자질보다 그녀가 여성이었다는 점을 이용해 여성을 공격할 수 있다"고도 전했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비난은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박지원 의원은 "100년 내 여성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고, 이재명 성남시장과 유승민 의원도 최순실을 향해 "근본을 알 수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 "강남의 웬 아줌마"라며 여성 비하 표현을 썼다.

박근혜 대통령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시점에서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 손질이나 성형, 비아그라, 남자관계 등의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며 "여자는 역시 리더십에 한계가 있다"는 식의 희롱과 막말이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는 '여성 대통령'의 실패가 아니다. 수많은 여성 운동가와 정치인이 쌓아온 것들이 단지 박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여성 혐오'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위험하다.

그동안 대통령들의 친인척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남성 노태우' '남성 노무현' '남성 이명박'이기 때문에 비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으로서의 한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남성이라서 혹은 여성이라서 잘못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희롱과 막말로 명예와 인격을 훼손하는 것은 실정법 위반이다. 가장 말을 조심해야 할 정치인들이 대놓고 여성 차별적 발언을 내뱉고 있는데도, 여성 의원들은 한 마디 말이 없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최초 지역구 5선 여성 의원인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연일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정신 몽롱' '주사'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아직 확인이 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원색적으로 비판해 논란이 일었다.

추 대표의 이 발언은 세월호 사건 당시 박 대통령이 수상한 의료 행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마치 박 대통령이 약물 주사를 맞고 정신이 몽롱해진 상태여서 7시간 동안 구조 대책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처럼 해석될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또 추 대표는 "박 대통령이 미용을 위해 2000억원 이상을 썼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고 했다가 "착오가 있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공직자인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개인의 여성성이나 인격에 대한 비난은 분리되어야 한다.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한 촛불집회 또한 부패 기득권층에 대한 심판이었지 '여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국정농단을 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섹스 비디오'나 '미용비용 2000억원' 등 중장년 여성에 대한 편견과 거짓 비난이 일색이다. 이런 보도를 한 언론에 대해서도 여성 정치인이 나서서 바로잡고 여성 정치인 스스로라도 성차별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여성 100인을 국회로"

칠레와 프랑스에 이어 EU,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는 정치권 '남녀 동수'인 민주주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기회가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상황에서 같은 크기의 목소리를 내기란 어렵다. 그렇기에 한국 정치에서 여성의 설 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신호다.

그러나 여성이 정치 세계로 진입하려면 다차원의 장애를 뚫어야 하기 때문에 남성과는 다른 자질, 혹은 더 훌륭하기를 바라는 '이중 잣대'로 이어지고, 이중 잣대는 의원이기 이전에 '여성의 대표'로 역할을 했는지를 묻는 '이중 부담'으로 귀결된다.

여자라서 다르고, 여자라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할 때부터 스스로를 '여성'이라는 프레임에 가두게 됐다. 또, 여성이 '선(善)'이며 남성이 '악(惡)'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듦으로써 같은 잘못에도 '여성이기 때문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도 사실이다. 여성 정치인 스스로 '남성과 다르다'고 선포한 이상, 진정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여성정치세력화'란 대의를 위해서라도 여성 정치인들이 책임지지 못할 막말 또한 조심해야 한다. 스스로 "여성이라서"라고 변명하지 않고, 여성을 위한 세상을 적극적으로 열어 나가는 여성 정치인들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13여년 전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말이다.

■ 참고 자료
여성정치지도자의 자질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김은경, 2011
제19대 국회 여성분야 입법 현항과 과제 / 조주은, 2016
제19대 국회 여성의원 의정활동의 특징과 평가 및 시사점 / 임혜란,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