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담배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그림 아래쪽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초(超)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미지의 반역'이다. 이 그림을 보여주고 '창의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할 것인가.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 모임' 멤버인 서울대 김세직 교수(경제학부)의 '화폐금융론'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매주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를테면 '돌을 화폐로 사용하는 섬이 있다. 돈이란 무엇인지 설명하라' '장자를 읽으면 어떤 경제학 이론이 떠오르는가' 같은 질문들이다. 학생들은 "일주일 꼬박 매달려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고 말한다.
◇"말로만 '창의성' 중요하다는 수업과 달라"
김 교수는 이런 문제를 낼 때 "정답은 없다"고 강조한다. 형식도, 분량 제한도 없다. 틀을 깨는 창의적인 생각을 해보라는 뜻이다. 중간·기말 평가에서도 답이 정해진 문제도 내지만, '상상의 날개를 펴고 최대한 창의적으로 답하라'는 문제도 꼭 함께 낸다. 작년 2학기 중간고사 땐 '1년 내내 섭씨 30도가 넘는 '불나라'에서 얼음을 화폐로 도입하는 효율적인 방법은?' '정부가 갑자기 대출을 금지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는 문제를 냈다.
이런 수업이 처음인 학생들은 경제학에서 널리 알려진 학설을 이용해 평범한 답을 써내기 일쑤다. 하지만 김 교수는 톡톡 튀게 창의적이지만 논리적으로 쓴 답에 높은 점수를 주고 칭찬한다. 이 수업을 들은 경제학부 안상화(24)씨는 "말로는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교수의) 기준에 안 맞으면 박한 점수를 주는 다른 수업들과는 진짜 달랐다"고 말했다.
이런 훈련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김 교수를 놀라게 하는, '틀을 깨는' 답변을 내놓기 시작했다. 한번은 '금융 혹은 이자율의 본질을 사자성어로 표현하라'는 문제를 냈는데, 학생 한 명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다. '금융은 사람 뜻대로 되지 않고 운이 중요하니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유였다. 김 교수는 이 답변에 최고 점수를 줬다. 김 교수는 "금융의 본질에 대한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답변인 데다, 사자성어를 '고사성어'로 해석해 질문의 틀에 갇히지 않은 파격적 접근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창의적 인재가 한국 미래 좌우"
김 교수는 2006년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뒤 서울대에서 여전히 주입식·암기식 교육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한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은 사람인데 지금같이 가르쳐서는 한국 경제가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바로 창의성 교육을 시도했다. 김 교수가 화폐금융론 강의계획서 첫머리에 '강의 목표: 창의성〉경제학 지식'이라고 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교수는 "문제를 내고 채점하는 데 시간이 엄청 걸려 이런 수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평가 기준이 뭐냐'고 항의할 때도 있다. 교수 업적 평가에 이 같은 시도가 반영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수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창의적인 인재를 기르지 않으면 한국에 미래가 없다는 절실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창의성 수업의 성과를 측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학생들은 스스로 "창의성이 좋아졌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가 매 학기 첫 수업과 마지막 수업 때 학생들에게 '자신의 창의성을 10점 만점으로 평가해 보라'고 묻는데, 작년 2학기 수업을 들은 36명 중 33명이 '내 창의성이 올라갔다'고 답했다. 이들이 답한 자기 창의력 점수는 첫 수업 때 평균 4.5점(10점 만점)에서 마지막 수업엔 6.3점으로 껑충 뛰었다. 경제학부 김윤상(24)씨는 "엉뚱한 시도를 해도 교수님이 창의적 시도로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니까 서로 경쟁하듯 파격을 시도했다"며 "그러다 보니 수업 시간이 새로운 걸 해보는 우리만의 '놀이터'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