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어떻게 범죄의 도시 오명을 벗었나
미국을 상징하는 도시 뉴욕은 1980년대만 하더라도 집창촌과 마피아가 집결된 곳으로 흉악범죄가 끊기지 않는 도시였다. 당시 연간 60만 건 이상의 중범죄가 발생했으며, 이 중 2,200건이 살인 범죄였다. 영화 '배트맨'에서 배트맨이 활약하는 최악의 범죄 도시 고담 시가 실제로 뉴욕을 모델로 한 것일 정도로 '뉴욕=범죄', '범죄의 온상'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런 뉴욕을 변화시킨 사람은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과 당시 윌리엄 브래턴 신입 검찰국장이다. 1994년 시장에 당선된 줄리아니 시장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범죄율을 낮추겠다고 공언했다. 그가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그래피티(낙서) 지우기'이다. 뉴욕의 지하철과 거리에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행해지고 있는 낙서들을 일일이 감시하며 지우기에 나섰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대책에 세금과 시간만 낭비한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줄리아니 시장은 자신의 계획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은 범죄를 막을 수 없다면 그 어떤 강도도 잡을 수 없다"
이 작은 시작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지하철의 낙서를 제거하는 캠페인을 5년간 펼친 끝에 뉴욕의 외관이 깨끗해졌음은 물론이고, 밝아진 도시 분위기와 함께 범죄율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낙서 지우기'로 범죄율을 줄였던 뉴욕의 사례는 '깨진 유리창 이론'에 근거한다. 당시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발표한 '깨진 유리창 이론'에서 "건물주인이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일대가 우범지대로 변한다"고 주장한 것을 뉴욕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결국 뉴욕의 우범지대였던 할렘 지역의 범죄율은 40%가량 떨어졌고, 뉴욕 지하철 내 범죄율은 75% 정도 줄었다. 살인사건 발생 횟수도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도시의 외관과 공간을 조금만 바꿔도 범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세계 각국 도시에서 입증되면서 이를 적용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깨진 유리창 이론에 근거해 도시 외관의 색채 변화, 조명의 밝기, 가로수의 위치 변화 통해 범죄가 형성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환경 설계를 셉티드라고 한다.
사소함이 범죄를 줄일 수 있다
CCTV와 더불어 건축물·도로·가로환경 건설에 셉티드를 반영하는 것이 요즘 추세다. 전국 지자체들도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벽화를 그려 사람들을 통행로로 유도하고, 시설물들이 주민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도시를 정비하고 있다. 부산시는 우암동과 구포동, 재송동, 금사동 등의 마을 중심에 주민들이 자주 왕래할 수 있도록 정자와 공동 빨래 건조대를 설치하고 있다. 충북 충주시는 사건사고가 잦은 사과나무 이야기길(지현동~문화동) 200m 거리에 보행자 움직임에 따라 자동으로 반응하는 스마트 보안등을 설치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광역·기초지자체 60여 곳은 건축물과 시설을 설계할 때 셉티드를 적용하도록 관련 조례를 제정해 놓은 상태다.
셉티드 : (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환경 설계를 통한 범죄예방) 미국에서 1970년대 초반부터 사용된 개념.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그곳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된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근거로, 환경 설계를 통해 범죄를 예방하는 건축·디자인 기법을 뜻한다. 유해 환경을 제거하는 등 범죄를 사전에 차단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범죄를 막는 디자인의 기본 원리
자연감시
자연감시는 사람들의 시야를 넓히고 밝혀 범죄가 일어날 수 없도록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감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범죄가 자주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주민들의 시선에 노출시켜, 외부인이 침입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일상 속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한다. 자연감시 효과를 늘리기 위해서 폐쇄적인 공간을 줄여야 한다. 경비실의 유리창을 3면으로 늘리고, 투명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지하 주차장의 벽을 개방한다. 으슥한 공원에 밝은 조명의 산책로를 설계해 시야를 확보하고 사람들의 통행을 늘리기도 한다.
접근통제
범죄예방에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이다. 일반적으로 이 방법은 경비와 순찰 활동, CCTV에 의해서 행해지지만, 셉티드에서는 공간 디자인을 통해 범죄 행위를 방지하고, 범죄가 일어났을 때 도주로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범죄자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없애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침입할 수 없도록 건물과 공간을 설계한다. 예를 들어 범죄에 악용되는 주택 외벽의 가스배관에 뾰족한 요철 커버를 두르거나, 침입을 시도했을 때 증거로 남길 수 있는 약품을 바르는 방법이 있다. 배관을 타고 내부로 침입하는 강도 범죄를 막기 위해서다. 아파트 입구 주변에 얕은 인공 개울을 설치하여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도 한다.
영역성 강화
사람들이 공간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가질 수 있도록 공간의 범위를 확실히 정하는 것이다. 공간을 다시 배치하고 디자인 해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보행로와 차도 등의 구분을 정확하게 정한다. 이렇게 영역이 정돈되면 환경에 대한 주민들의 준법 의식이 높아져 공간 자체가 깨끗해지며, 잠재적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를 때 심리적 부담이 높아진다. 단순히 디자인과 공간 구획에서 머무르지 않고 주민의 지속적인 참여가 중요한 부분이다. 접근 통제가 잘 이뤄지더라도 주민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공간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효과를 보기 힘들다.
활용성 증대
자연적 감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을의 방치된 공간과 시설을 주민 휴게 공간, 문화 시설, 체육 시설 등으로 탈바꿈 시켜 주민들이 활발히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던 곳을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거리의 눈(eyes on the street)'을 많이 두면,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명료성 강화
주민들이 공간과 시설을 바르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에 대한 안내, 위치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길찾기를 하기 쉽게 골목길 구조를 단순화 시키거나, 안내 시설, 방범 시설의 위치가 눈에 잘 띄도록 디자인 한다. 범죄 행위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명료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전봇대마다 눈에 띄는 크기로 숫자를 매기고, 비상 벨을 누를 수 있는 곳은 다른 색으로 표시한다. 이로 인해 잠재적 범죄자들의 범죄 심리가 약화되고 주민들이 느끼는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 낮아질 수 있다.
유지 관리
범죄 예방을 위해 마련한 장치와 디자인들을 잘 유지 관리하는 것 역시 범죄 예방에서 중요하다. 셉티드의 근거 '깨진 유리창 이론'에서 보듯이 아무리 잘 설계된 도시와 공간이더라도 이후에 잘 관리되지 않는다면 다시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 범죄예방디자인이 지속적으로 잘 적용될 수 있도록 주민들의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다.
공공시설에서 볼 수 있는 셉티드
서울시는 지난 2015년 3월 개통한 지하철 9호선 2단계(신논현~종합운동장) 구간, 총 5개 정거장을 셉티드를 적용해 건설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상·하행 승강장에 길이 5m, 폭 2m의 안전구역(safety zone)을 만들었는데, 이 구역에는 CCTV, 비상전화, 비상 벨, 대형 거울, 모니터 등이 설치됐다. 범죄 행위를 감시하고 범죄가 일어났을 경우 신속한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이 지하철역과 연결되는 버스 환승 정류장에도 승강장 안전구역과 CCTV, 경보 벨 등을 설치했다.
학교 공간에 셉티드를 적용해 학교 폭력을 줄이려는 사례도 있다. 강서구의 공진중학교는 주로 학교 폭력이 자주 일어날 수 있는 학교 건물 뒤편과 창고 공간에 범죄 예방 디자인을 적용해 학교 폭력의 사각지대를 없앴다. 예전엔 버려지고 방치돼 있었던 공간을 학생들이 여가와 취미를 즐기는 공간으로 만들어 건강한 취미 활동을 장려하고 범죄도 예방할 수 있는 효과를 노렸다. 창고로 쓰이던 공간은 학생들이 권투 놀이를 할 수 있도록 샌드백을 설치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게 만들었고, 학교 뒤편 담장엔 암벽타기 시설을 만들어 운동 공간을 마련했다. 또한 학교 1층 입구에는 '드림 월'을 설치하여 학교 곳곳의 사각지대를 CCTV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학생이 교내에서 '거리의 눈'이 되면서 폭력과 비행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셉티드로 안전해진 우리 동네
우리나라에서 셉티드의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은 마포구 염리동과 관악구 행운동이다. 기존 낙후되어 범죄에 자주 노출됐던 공간 곳곳을 새롭게 단장하여 범죄를 차단했다.
본래 조선시대 마포나루를 거점으로 소금 창고들이 많고 더불어 소금 장수들이 많이 살던 동네라고 해서 '염리(鹽里)' 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곳은 2012년 범죄예방 프로젝트 목적으로 '소금길'이라는 명칭으로 변화를 꾀했다.
이전엔 미로처럼 으슥한 골목에 낙후된 주택들이 많아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꼽혔던 이곳은 밝은 색으로 담벼락을 칠하고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채워 넣으면서 동네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다. 외관만 바꾼 것이 아니다.
이 동네 69개의 모든 전봇대에는 각각의 번호가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위급 상황 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전봇대의 번호를 달아놓은 것이다. 소금길에 노란 대문 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소금지킴이집' 으로 범죄 이력이 없고 이곳에 오래 살아온 주민 가운데 6개 가구를 자발적으로 선정했다. 위급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구나 이 노란 집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이 소금지킴이집에는 더욱 밝은 조명과 CCTV, 비상벨 등이 따로 설치돼 있어 알아보기 쉽게 했다.
[마포나루 소금 나르던 알록달록 골목길도… 곧 사라질 추억]
서울에서 여성 비율이 두 번째로 높고, 특히 20~30대 싱글 여성 1인가구가 절반에 육박하는 관악구 행운동은 경찰청에서도 ‘여성안심구역’으로 집중관리해온 곳이다. 다닥다닥 붙은 원룸 사이사이의 어둡고 좁은 골목, 어두운 주차장 때문에 늦은 밤 걷기 무서웠던 이곳의 공포지점들이 LED 방범등으로 빛을 밝히고, 후면 240도까지 보이는 반사경과 비상 벨, 경광등이 곳곳에 설치된 ‘행운길’로 새 옷을 입었다.
최근 우리나라 신도시들은 셉티드 기술을 적용해 도시를 설계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 판교와 광교 신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아파트들은 2005년 시공 단계부터 투시 형으로 경비실과 계단 설치하고, 지하 공간과 연계된 커뮤니티 시설을 배치했다. 국내 아파트 단지에서 본격적으로 셉티드 개념이 반영된 첫번째 사례다.
세종시는 2006년 9월 행복도시 지구 단위 계획을 수립할 때부터 '셉티드'를 적용하고 있다. 세종시는 '시야 확보'를 지구 단위 계획의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일반 건물을 지을 땐 1~2층 창문이 가리지 않도록 조경수를 심는다. 상가 건물 전면부 투명유리 설치 비율과 건물 지하 주차장 조명 밝기도 기준을 설정해 어두운 구역을 최소화한다.
유동 인구를 늘려 자연스럽게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유도한 곳도 있다. 한솔동 주민센터 옆 교각(생태통로) 아래엔 매월 2차례 주민들이 참여하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행복중심복합도시건설청 도시특화경관팀 신제욱 서기관은 "범죄자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주민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출발한 셉티드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고 본격적으로 적용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90년대도 이런 도시계획과 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최근 들어서 낙후 지역과 신도시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적용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범죄 예방 디자인이라고 불리는 셉티드지만, 이 셉티드가 잘 자리잡고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결국 디자인보다 이를 지속시키고 관리해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하다. 실제로 셉티드를 적용시킨 지역이 지속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히려 범죄가 늘고 있는 사례들이 최근 나타나기 시작했다. 셉티드의 5가지 적용 기술에 '활용성 증대'와 '유지 관리'가 있다는 점만 보아도 잘 계획된 범죄 예방 도시도 입주민과 지역 사회의 유대와 관심이 없다면, 제대로 효과를 보기 힘들다.
[방범용 LED는 고장나고 반사거울 위엔 광고 덕지덕지…주민들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참고 자료 및 사이트
범죄예방디자인연구정보센터
한국셉티드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