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많은 이들이 새해 소망 중 하나로 '건강'을 꼽는다. 건강, 누군가에겐 식상한 소망이지만 정말 절실하게 이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힘겨운 병마와 싸우는 이들의 얘기다. 하지만 투병 중인 사람들이 늘 절망 속에 빠져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일반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아픔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남은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병을 극복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같은 병을 앓는 환자는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 희망과 삶의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건강한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우리를 조금은 부끄럽게, 또 조금은 뭉클하게 만들어주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윗줄) 만화가 김보통, 이해인 수녀, 영화 '꺼져버려 종양군'의 주인공 슝둔, 소설가 이외수. /조선DB·영화 스틸컷<br> (가운뎃줄) 배우 신동욱, 故최인호 작가, 가수 故임윤택, 故김점선 화백, 故장영희 교수. /조선DB<br> (아랫줄) 미국 의사 폴 칼라티니, 故조수진 작가, 구경선 작가와 일러스트
아만자 ┃
김보통

"온몸을 믹서기로 갈아버리는 듯해"

결혼은 안 했지만 여자친구가 있고 취업은 안 했지만 평범하게 사는 26세 '아만자'에게 예고 없이 불쑥 '암'이라는 한 글자가 끼어든다. "위암입니다, 전이가 다 돼버렸어요" 아만자는 기적을 꿈꾸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우리가 '예상하는 그대로' 흘러갈 뿐이다. 책 속에서 '사막의 왕'을 찾아 헤매는 아만자는 점차 몸과 마음이 부서져 사라진다.

거액의 치료비 때문에 치료를 망설이고, 항암제 중독을 걱정하고, 아만자와의 이별을 생각하는 여자친구의 모습이 워낙 현실적이기 때문일까. '아만자'의 김보통 작가는 만화를 연재하는 동안 수많은 암 환자들로부터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 만화의 주인공도 사실은 8년간 위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다. 아버지가 '믹서기로 온몸을 가는 듯한'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 후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이, 책 속에선 사막으로 모험을 떠난 것으로 표현된다.

작가는 아픈 아버지를 뒤로한 채 회식 자리에 억지로 앉아 있어야 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이러한 미안함과 회한의 감정이 책 속에도 녹아있다. 그 때문인지, 작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는 만화 속 주인공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망설이는 걸로 삶을 낭비하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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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깨어 있네 ┃
이해인

"고맙습니다//그래서/오늘도/나는 숨을 쉽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는 것, 내리쬐는 햇살, 귤 한쪽과 포도 한 알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존율 30%의 상태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은 뒤 투병한 이해인 수녀의 시집에는 이러한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해인 수녀는 병상에 틈틈이 쓴 시 100편과 1년 반 동안 쓴 일기를 엮어 이 책을 펴냈다. 겉으로는 곧음과 의연함의 상징이지만, 이 수녀 역시 '암'이란 무시무시한 이름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음이 그녀의 시에서 절절히 느껴진다. 처음 암 선고를 받고선 '남들은 친해지라는데 아직은 낯설고 숨고 싶다'고 토로하던 그녀가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상이 귀하다'고 말하기까지, 일기에서 느껴지는 심경의 변화가 흥미롭다.

대장암과 싸우며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30번 가까이 받았다는 이해인 수녀. 그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고통의 학교'에서 수련하고 나왔다"고 표현하는 이 수녀에게서 성인(聖人)의 면모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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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나는 유쾌하게 죽기로 했다 ┃
슝둔

"요괴든 병마든 모두 무섭지 않다~!! 다 덤벼!"

스물아홉,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꽃다운 나이의 아가씨가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쿵!'. 평범한 어느 날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걸어나가려던 순간 벌어진 이 일이 스물아홉 슝둔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이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마저 바꾸지는 못한다.

한국에서 '스물아홉 나는, 유쾌하게 죽기로 했다'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이 책의 원작은 중국 웹툰 '꺼져줄래 종양군'이다. 저자는 29세의 나이에 림프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한 슝둔. 예쁜 노트와 예쁜 펜을 보면 반드시 사고야 마는 일러스트레이터 슝둔은, 병상에서 만화를 그려 인터넷에 연재를 시작한다. 슝둔이 그려내는 병실 생활기는 그야말로 유쾌하다. 매일 아침 얼굴이 퉁퉁 붓지만 렌즈 끼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병실에 있으니 매일 친구들과 가족들 얼굴을 볼 수 있어 '휴가를 받은 것 같다'고도 말한다.

안타깝게도 슝둔의 이야기는 암 투병을 한 지 1년이 조금 지나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웹툰은 하루에 댓글 5,000개가 달리고 누적 조회 수가 3억 뷰를 넘는 등 온 대륙을 웃고 울렸다. 슝둔 역시 자신의 만화에서 "병 덕분에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것들을 얻고 뜻깊은 경험을 했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슝둔의 웹툰 '꺼져줄래 종양군'은 2015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자뻑은 나의 힘 ┃
이외수

"핼쑥해진 이외수를 향해 파이팅을 외쳐주었습니다"

뻣뻣하게 기른 긴 머리카락이 트레이드마크이던 작가 이외수가 짧게 머리를 자른 계기는 '암'이었다. 지난 2014년, 갑작스레 위암 소식을 전한 이외수는 투병 1년여가 지나 책 '자뻑은 나의 힘'을 펴냈다. 위 절제 수술과 8차례의 항암 치료를 견디며 꾸준히 쓰고 그린 글과 그림을 한데 모은 것이다.

'자뻑'이라는 책의 제목이 다소 과격하게 느껴졌는가. 실제로 책 속에는 이를 악물고 암과 싸우는 그의 모습이 연상되는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 암 투병을 하는 자신에 대해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나날들"이라 탄식하면서도, 깔끔하게 머리를 자르고 애써 화려한 옷을 꺼내 입는 등 삶을 이어나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처럼 암을 통해 느낀 감사함이나 깨달음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이외수는 특유의 날카로운 문장들로 자신만의 암 투병기를 써냈다.

책 속에는 글 외에도 나무젓가락으로 그린 그림과 캘리그라피 등 작가가 병상에서 '마인드컨트롤'을 위해 애쓴 결과물들이 수록돼 있다.

씁니다, 우주일지 ┃
신동욱

"어디선가 버려진 만큼, 당신은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5년여 전 돌연 TV에서 자취를 감춘 배우 신동욱이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나며 갖고 온 소설이다. '슬픔이여 안녕', '소울메이트' 등 여러 지상파 드라마 출연으로 막 뜨려던 그를 숨게 했던 건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이라는 희귀병. 극심한 고통을 주지만 원인과 치료법이 불분명해 '악마적 질환'이라 불리는 병이었다.

세간의 안타까움과는 달리, '작가'로 재등장한 신동욱은 씩씩했다. 비록 배우의 꿈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는 움츠러드는 대신 '우주 덕후'인 자신의 적성을 살려 SF소설 '씁니다, 우주일지'를 썼다. 데뷔작인데도 400쪽이 넘는 장편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천재 사업가 맥 매커천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맥 매커천은 홀로 우주에 내던져져 3년간 홀로 표류하는 인물이다.

작가 신동욱은 고립된 주인공의 심리를 실감 나게 묘사하기 위해 전화와 문자메시지까지 통제하는 등 철저하게 스스로를 고립한 뒤 글을 썼다. 또 우주 관련 책 150권을 탐독했을 만큼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전하고 싶은 건 '희망'이다. 책 속의 주인공이 우주를 표류하며 상황이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듯,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듯이, 작가 신동욱은 자신도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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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인생 ┃
최인호

"나는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 않았다"

침샘 암으로 5년 넘게 투병하다 지난 2013년 영면한 소설가 최인호가 살아있을 때 남긴 마지막 책이다. "환자가 아닌 작가로 죽겠다"고 공공연히 말해온 그답게, 최인호는 암 투병 중에도 몇 권의 책을 꾸준히 발간했다. 책 '최인호의 인생' 역시 작가가 손톱에 골무를 끼우고 발톱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병마의 고통과 싸우며 쓴 책이다. 작가 최인호의 등단 50주년 기념 산문집이기도 하다.

작가는 책을 통해 절절한 고통과 삶의 깨달음을 전하는 동시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고백도 덧붙인다. 항암 치료를 받던 그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건 성모병원 성당에서 열리던 미사 참례와 병실로 찾아와주었던 신부님과 수녀님이었다고 말한다. '울지마 톤즈'로 유명한 이태석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과 그들에 대한 감사함도 담았다.

작가 최인호는 그의 생전 다짐대로 '작가'의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그에게 펜을 잡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첫 암 수술을 받은 뒤 다시는 글을 못 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어째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앞당겨 근심하는가"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작가는 눈을 감기 보름 전, 병상에 누워 마지막 유고 시(詩)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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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고 하지말고 아니라고 하지말고 ┃
임윤택

"윤택아, 학교 그만둬라. 저런 선생 밑에서 배울 건 없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누구도 그가 아픔을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위암 말기, 밴드 '울랄라세션'의 멤버 임윤택은 끝이 예견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꿈을 모두 이뤄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고 결혼을 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을 펴냈다.

임윤택 에세이집의 제목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아니라고 하지 말고'는 그가 울랄라세션의 멤버들과 자주 외치던 구호다. 그의 일생이 축약된 이 책을 읽다 보면, 임윤택이 가진 긍정의 기운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게 된다. 고등학생 때 두 번 자퇴하고 스무 살에 세 번째 고등학교에 입학한 사연, 뚱뚱하고 소심했던 초등학교 시절에도 당당하게 춤꾼을 꿈꿀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결심을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1년여 전 책을 펴낸 임윤택은 평소 자신이 존경하던 소설가 이외수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아온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봐." 33년, 짧고도 굵었던 그의 삶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건 꾸밈도 가식도 없는 순수한 열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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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뎐 ┃
김점선

"죽음도 삶의 마지막 부분, 그저 초지일관해야 한다"

"각자의 삶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라고 말하던 화가 김점선. 그녀는 정말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예술품과 같은 삶을 살다 갔다. 그 누가 예고없이 덜컥 찾아온 암을 보고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화가 김점선은 폐암으로 남편을 잃은 뒤 자신도 난소암에 걸려 투병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리고 책을 냈다. 매일 8시간씩 그림을 그렸고 일평생 6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었다.

김점선 화백은 서양화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자신의 그림이 휴지곽에 인쇄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좋아해, 오십견으로 붓을 들 수 없게 되었을 땐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워 작품활동을 이어 나갔다. 암이 발병한 후에도 열정적이고 성실한 그녀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엉뚱하다 하겠지만 화가 김점선은 난소암을 알고 난 후 "이제 아무데도 못 나가고 집에만 있으니, 그림이나 실컷 그리자" 했다고 한다.

김점선의 투병생활 및 일생의 에피소드를 담은 자서전 '점선뎐'은 두려움과 애절함이 느껴지는 여느 투병기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누구와도 같지 않게' 살아온 김 화백의 삶은 우리에게 "내 인생도, 네 인생도 예술"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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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악착같이 침대 난간을 꼭 붙잡았다. 어디 흔들어 보라지"

암 치료로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만든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정작 저자인 장영희 교수는 보지 못했다. 장 교수는 인쇄된 책이 나오기 며칠 전 의식을 잃고 세상을 떠났다. 유방암에 이어 척추암, 간암까지 10년에 가까운 암 투병을 한 뒤였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까지 앓았던 것을 기억하면,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살아온 기적'이다.

보통 사람은 한 번도 겪기 어려운 신체적 고통을 몇 차례나 경험했고 어려서부터 온갖 차별에 시달렸음에도, 장영희 교수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열정적이었다. 남들이 '그러고 어떻게 사냐' 할 때마다, 그녀는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며 버텨낸 날들이 바로 기적"이라고 얘기한다. 장 교수가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평생 병마와 싸우며 경험했던 일화들을 여럿 소개했다. 가슴 아픈 일화들도, 그녀는 담담하고 유쾌한 문체로 적어냈다.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장영희 교수와 이해인 수녀, 김점선 화백은 공교롭게도 셋 다 암 투병을 했다. 이들이 남긴 작품에는 서로에 대한 기억도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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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이 될 때 ┃
폴 칼라티니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바로 죽지 않아. 그러니 오늘만 생각해"

한창 일할 나이 36세, 하루 14시간 넘게 일하던 레지던스(수련의) 생활이 막바지에 달하고 이제 그에겐 장밋빛 미래만이 남아있다. 혹독한 수련생활이 끝나면 그는 모교인 스탠퍼드대 의대에서 곧바로 교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모든 꿈을 한 번에 깨버리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린다. 폐암 4기. 그러나 느닷없이 죽음을 마주한 이 젊은 의사는 무력하게 죽을 날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암 선고를 받고 꼭 2년 뒤에 숨진 미국인 의사 폴 칼라티니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한 권의 책을 남겼다. 2016년 발간된 '숨결이 바람이 될 때'가 그것이다.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시간동안 '스스로 소중한 것을 찾아내라'는 담당의 말대로, 폴과 그의 아내는 고심 끝에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생후 8개월 된 딸에게 편지를 남긴다. "케이디, 넌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준 존재였어."

폴은 마지막 연명 치료를 거부한 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발적 죽음을 택한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그의 아내가 책의 마지막 부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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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은 암, 청춘은 청춘 ┃
조수진(오방떡 소녀)

"암이 재발한 이후 다시는 웃지 못할 줄 알았어요"

27세의 나이로 임파선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조수진씨(필명 '오방떡 소녀')의 인생에 좌절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예쁘고 똑똑해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고와 명문대, 대기업 코스를 밟았다.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많았고 학창시절엔 A학점 이하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암과 마주했다.

작가 조수진이 쓴 책 '암은 암, 청춘은 청춘'은 그녀가 블로그에 만화로 연재한 투병일기를 모아 엮은 것이다. 블로그에 만화를 올리는 건 친언니의 제안으로 이뤄졌고, '오방떡 소녀'라는 필명은 얼굴이 동글동글한 작가 자신의 특성을 따 지었다.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난 누구나 그렇듯, 조수진 작가 역시 처음에는 '왜 하필 나인가'라는 한탄 섞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다. 그녀가 찾아낸 답은 자신이 변하는 것. 이후 조수진 작가는 '암 환자만이 할 수 있는' 일들로 하루하루를 유쾌하게 보내기로 한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머리카락이 빠지자 다양한 두건을 써 보며 멋을 내는 식이다.

색색깔의 소변을 본 뒤 침울해 하거나 골수검사를 한 뒤 안도하는 등, 항암치료를 받으며 겪은 생생한 심리를 묘사한 그녀의 만화는 실제 암 환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샀다. 그러나 꿋꿋하게 암과 싸우던 '오방떡 소녀'는 암 투병 6년 여 만에 고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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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은 하루 ┃
구 작가(구경선)

"소리를 잃고 시각을 잃어도 냄새는 맡을 수 있잖아요"

'잘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귀가 커다란 토끼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토끼는 싸이월드 열풍을 타고 불티나게 팔렸다. 토끼 '베니'를 탄생시킨 작가는 30대의 아가씨. 겉모습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데 귀가 들리지 않았다. 두 살 때 열병을 앓은 이후 줄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베니의 엄마' 구경선 작가가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건, 청력에 이어 시력까지 사라져가는 걸 느끼면서다. 구 작가가 진단받은 병은 '망막색소변성증',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가 결국 보이지 않게 되는 불치병이었다. 몇 달간 분노에 가득 차 발버둥 치던 작가는 점차 마음을 바꾼다. 언젠가는 완전히 앞이 안 보이게 될 테니, 조금이나마 볼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걸 다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그래도 괜찮은 하루'다. 구 작가는 '베니'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책 속에는 구경선 작가의 '버킷리스트'도 담겨있다. 엄마에게 미역국 끓어드리기, 소개팅 해보기, 운전면허증 따기, 가족여행 가기 등, 쉬워 보이지만 그녀에겐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원들이다. 들을 수 없을 땐 볼 수 있었고, 볼 수 없어져도 맡을 수 있으니 괜찮다는 구 작가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행복'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볼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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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아파 본' 사람들은 병을 얻은 뒤 삶의 깨달음을 얻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쓴 책에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느끼기 힘든 감정이 담겨있다. 작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마음, 하고 싶은 일에 쏟아붓는 열정 등이 그렇다. 2017년 새해를 맞는 이 시점에, 아픈 사람들이 남긴 메시지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