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을 보통 2차 대전의 출발선으로 잡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유럽의 지역 전쟁이었을 뿐이다. 명실상부 '세계대전'이 된 것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1941년 12월이다. 일요일 아침 날벼락을 맞은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하자 일본의 동맹국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피바람이 세계로 몰아쳤다.
▶두 차례 공습은 몇 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함 8척을 포함해 선박 19척이 파괴됐고 폭격기 117대를 비롯해 항공기 328대가 박살 났다. 2403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절반이 어뢰를 맞고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호 승무원이다. 미국은 배를 인양하지 않았다. 많은 유해가 여전히 그 속에 있다. 그 위에 전몰자를 추도하는 기념관을 세웠다. 위에서 보면 기념관 건물과 물속 애리조나호의 그림자가 십자가처럼 다가온다.
▶비열한 기습이었다. '더러운 일본 놈(dirty Jap)' 이미지가 못이 박혔다. 슬로건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는 유럽 전선에서도 사용됐다. 미국은 8개월 뒤 남태평양 작은 섬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원자탄 두 발이 본토를 강타할 때까지 일본은 한 번도 미군을 당해낸 적이 없다. 빈 라덴이 복수당했듯 진주만 공습 사령관도 미군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일본인 235만명이 죽었다. 한국인 수만 명도 남의 전쟁에 끌려가 희생됐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했다. 세계인을 향해 사죄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기념관에 헌화하고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선에 그쳤다. "전후 평화 국가의 길을 걸어온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75년 전 공습 때 가미카제 방식의 공격을 시도했다가 숨진 일본 조종사 유적도 찾았다. 공습 직후 미군이 군인의 명예를 생각해 만든 석판이다. 아베 총리는 "용감한 자는 용감한 자를 존중한다"고 했다. 지금의 미·일 동맹을 "관용의 힘이 가져다준 화해의 힘"이라고 했다.
▶승자의 여유일까. 미 오바마 대통령은 2차대전 때 맹활약한 일본계 미국인 부대를 언급했다. 유럽 전선에서 9000명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442연대다. "미 역사상 가장 빛나는 부대 중 하나"라고 했다. 불행한 역사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모래알처럼 작은 역사의 공통분모를 찾아 최대한 부각했다. 한국인의 눈으론 용납하기 어려운 모순투성이 방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미·일 동맹은 확실히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