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레이디 맥베스’의 정동환(왼쪽)과 정은혜.

"피는 피를 부르는 법, 이제 핏길 깊숙이 걸어 들어갔으니 걸음 멈추고 되돌려도 돌이킬 수 없어." 어둡고 텅 빈 무대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창(唱)이 귀곡성처럼 처연하게 객석에 꽂혔다. '내가 어디서 멈춰야 될지 모르겠다'고 탄식하던 '사기열전'의 이사(李斯)처럼, 이미 질주를 시작한 권력욕은 더 이상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이 돼 버렸음을 실토하는 맥베스 부인의 절규였다.

지난주 개막한 국립국악원 창극 '레이디 맥베스'(한태숙 재창작·연출)는 최근 나라를 뒤흔들 정도로 질주하다 고꾸라진 '욕망'을 목도한 관객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셰익스피어 비극 '맥베스'는 베르디의 오페라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를 비롯한 숱한 변주와 각색을 거쳤다. 국내 최근작 중에선 한국적인 정서와 무협 코드를 담은 고선웅의 '칼로 막베스'가 있었다. 1998년 초연된 한태숙의 연극 '레이디 맥베스'는 원작에서 암류처럼 흐르는 '죄의식'을 추출해 내 호평을 받았다.

그 작품이 창극으로 새롭게 무대에 올랐다. 이미 공포를 극대화한 창극 '장화홍련'(2012)을 선보였던 한태숙은 이번엔 배우 6명 중에서 여성 3명에게 창을 맡겼다. 이들이 뽑아낸 창은 남성의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희생당했던 '여성의 이야기'를 했다. 주로 감정이 고조된 지점에서 시작한 창은 괴기스럽게 뒤틀린 욕망에서부터 불안스러운 회한과 비탄, 덧없는 권력욕 끝자락의 허무까지 내밀한 심리의 결을 훑었다.

파열하는 듯한 고음으로 레이디 맥베스의 광기를 표현한 국악인 정은혜는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였고, 배우 정동환은 맥베스와 전의(典醫) 역할을 넘나들며 쩌렁쩌렁한 발성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국립국악원 우면당이 마이크와 스피커를 쓰지 않는 '자연음향 공연장'으로 변신한 뒤 올린 첫 작품인데, 대사와 음악 모두 뒤쪽 자리까지 잘 전달됐다.

▷30일까지 국립국악원 우면당, 공연 시간 75분, (02)580-3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