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현 문화부 차장

※아랫글은 김수영의 시 '전화 이야기'풍으로 썼습니다.

오래전에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나라가 결딴나는 줄 알았죠. 처음엔 너 나 할 것 없이 피란 가기 바빴으니까요. 거의 국경 끝까지 내몰리다시피 했어요. 때마침 동맹국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라 잃을 뻔했죠.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나네요.

그래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금세 괜찮아졌어요. 우리 민족이 저력이나 뚝심이 있잖아요. 경제가 좋아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살림살이도 나아졌어요. 간혹 '제2의 전성기'나 '르네상스' 같은 말이라도 들으면 괜히 가슴 벅차고 뿌듯했죠.

하지만 좀처럼 고쳐지질 않는 고질병이 있었어요. 아시잖아요. 파당(派黨)으로 나뉘어 죽자 살자 싸우는 거요. 처음엔 둘로 갈라지는 것 같더니 다음엔 넷, 여덟까지 늘었어요. 이걸 두고 산술급수적이라고 하나요, 기하급수적이라고 하나요. 아무튼 나중에는 같은 당파 내에서도 또다시 갈라져서 서로 으르렁거렸죠. '엽전 근성'이라고 혀를 차기도 했고, '망국의 징조'라고 푸념도 했지만 별무소용(別無所用)이었어요.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에 친박계와 비박계 의원 상당수가 참석하지 않아 빈자리로 남아 있다.

문제는 곳간이 텅 비는 줄도 모르고 싸움질에만 여념이 없었다는 거죠. 언젠가부터 경제성장이 조금씩 둔화되는 것 같더니 나라 살림에도 이상 징후가 보였어요. 넉넉하게 퍼주고 싶어도 막상 곳간이 텅 비면 퍼줄 수도 없잖아요. 지방 각지에서도 못 살겠다고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죠. 그래도 꿈쩍도 안 했어요.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빴으니깐.

동북아 정세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당연히 관심 밖이었죠. 중국에서 집권 세력이라도 바뀌면 그걸 갖고 또다시 며칠 밤을 새우면서 국내에서 언쟁(言爭)을 벌였죠. '대륙 정세가 급변하고 있으니 부지런히 찾아가고 눈치도 봐야 한다' '그렇다고 오랜 우방을 푸대접해서는 안 된다'…. 외치(外治)와 내치(內治) 문제가 복잡하게 뒤얽히니까 또다시 분열되어 싸우기 딱 좋았죠. 이젠 파당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네요.

결국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이전투구(泥田鬪狗)였죠. 갑자기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쓰니깐 낯선가요. 쉽게 말해 '진흙탕 싸움'이죠. 음모와 소문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니깐 나중엔 진실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도 없었어요. 애초에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우울하죠. 결국 국운이 여기까지인가 싶기도 하고. 가끔은 목청 높여 푸념하면 '그 푸념은 또 누굴 위한 것이냐'고 캐물으니 할 말이 없죠.

그런데 이거 어느 시대 얘기냐고요? 우리가 조선 후기의 당쟁(黨爭)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것 아니었나요? 임진왜란, 병자호란, 북벌론(北伐論), 영·정조(英正祖)의 르네상스, 사색당파(四色黨派)와 민란…. 설마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싸우고 있는 건 아니겠죠? 결국 조선이 어떻게 망했는지 다들 알면서 또다시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니, 맞는다고요? 대체 왜들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