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는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권위주의적 보수'의 몰락이다. 한국 보수는 이제 '민주적 보수'로 거듭나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 내각제 등 선진국의 제도를 과감히 도입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에서 '뉴라이트의 대부(代父)'로 변모한 안병직(80·사진)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역사적 시효가 끝난 권위주의적 통치를 계속하다가 결국 추락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사를 전공한 안 명예교수는 1960~7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스승'으로 많은 젊은이가 그의 영향을 받아 '혁명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연옥을 통과하는 지적 고뇌'를 거쳐 우파로 전향한 뒤 한국의 경제발전을 후발국가가 선발국가를 따라잡는 '캐치업' 이론으로 정리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좌파 운동권에서 우파 운동권으로 전향한 인사들로 구성된 '뉴라이트 그룹'의 어른으로 이들을 뒷받침해 왔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겪고 있는 곤경을 어떻게 보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에서 권위주의적 보수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의 행동양식이나 인간관계를 보면 다른 사람을 정치적 동지나 파트너로 보지 않고 자기에게 종속된 사람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장관이나 수석비서관을 명령 일변도로 대하고 여당을 청와대에 종속시키며 야당을 경원시하는 것이 그렇다. 초법적인 행위를 하면서 '국가를 위하는 것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권위주의의 특성이다."

―'권위주의적 보수'는 한국에서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권위주의는 국가 발전이라는 시대적 사명 속에서 다른 사회통합 방법이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헌법 질서를 만들고 한미동맹과 교육 등을 통해 국가의 토대를 쌓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엘리트 집단이었던 70만 대군(大軍)을 물리적 기반으로 수출 지향 공업화정책을 통해 경제개발을 이뤘고 군사적으로 북한을 제압했다. 이처럼 권위주의는 한국 근대화의 동력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 경제발전의 결과로 사회 분야가 성장하면서 그 역할이 끝났다."

―그런데도 왜 '권위주의적 보수'가 계속 먹혔을까.

"한국의 정당은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치를 할 만큼 지적으로나 행태적으로 성숙돼 있지 않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양보와 타협을 모른다. 진보는 서구식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 성향이 강해서 국민을 동원 대상으로 생각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전체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는 전통이 약한 한국의 역사적 특질까지 가미돼 권위주의가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의 보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유민주적 질서에 걸맞은 '민주적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 지난번 총선 공천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당초 내걸었던 오픈 프라이머리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보수 정당이 국민에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오픈 프라이머리가 좋은 수단이다. 또 민주적 훈련을 위해서는 내각제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민주적 보수'로의 변모가 쉽게 가능할까.

"한국의 보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한 믿음, 자유와 인권 중시, 국제협력 추구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기본 원칙은 그대로이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실현하는 방법이 달라진 것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선진국이 오랜 학습과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한 제도를 더욱 열심히 배워야 한다. 보수주의자는 자신이 정말 민주주의자인지 끊임없이 묻고 자기혁신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