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가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 슬레이드 중령은 여성의 향기를 금세 알아차린다.

"내가 공기 속에서 향기를 맡았댔지? 뭔지 내가 말할게요. 오길비 시스터즈 비누."

눈이 보이지 않는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 역을 맡은 알 파치노 연기가 너무나 근사해서 당장 이 비누를 사서 쓰고 싶을 정도였다. 곁에 앉은 여성의 향을 정확히 알아맞히고 이를 구실로 그녀와 탱고를 추는 모습은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제목조차 '여인의 향기'인 영화에서 슬레이드 중령은 비행기 승무원의 향수를, 춤추기 주저하는 젊은 여성의 향을, 학생 법정에서 만난 여교사의 향수를 대번에 알아차리고 그녀들의 키와 외모, 성격까지 유추해낸다. 냄새란 상상의 열쇠와도 같아서 막연한 기억을 더듬어 확실한 공간과 시간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든 남성이 슬레이드 중령처럼 예민한 후각, 날카로운 센스를 지닐 수는 없다. 출장길 옆자리 승객 덕분에 5시간 넘는 비행이 고난이었다. 싸구려 향수를 한 병 가까이 뿌린 듯한 그 남자 때문에 비행기 안이 때아닌 화생방 훈련장으로 변했다. 승객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지만 중간에 내릴 수도 없고 창문을 열 수도 없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착륙 후 사람들이 짐을 챙겨 일어나면서 "이 고난 속에서 함께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으로 동지애 가득한 눈인사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만 몰랐을 것이다. 후각은 가장 빨리 피로해지는 감각이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새 향수 사용량이 점점 늘어나 이런 사고를 야기한다.

남자의 향기라면 올드스파이스로 대표되는 애프터셰이브로 충분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향이 기분을 바꾸어 주고 집중력을 높여 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새로운 물건을 사게 유혹하고 때로는 체중 감량을 도와준다는 연구 때문일까. 사람들은 곳곳에서 '좋은 냄새'가 나야 한다는 강박에 보디클렌저와 보디로션, 화장품과 샴푸, 향수도 모자라 탈취제를 뿌린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향수가 셀 수 없이 등장한다. 이름조차 낯선 해외 전문 브랜드의 '니치 향수'가 속속 선보이고 몇 가지 향수를 섞어 뿌려 자기만의 향을 만드는 '향수 레이어링'도 유행이다. 화장대나 세면대 위에 향수가 대여섯 개쯤 놓여 있고 온종일 향초를 사용하며 화장실, 사무실, 자동차에 방향제가 빠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향기 공해'라는 말을 실감한다.

"나는 아침에 맡는 네이팜탄 냄새를 사랑해. 승리의 냄새가 나거든."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로버트 듀발이 연기한 킬고어 대령처럼 사이코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평화롭고 은근하며 자연스러운 냄새를 좋아한다. 강렬하고 진한 향수 세례로 어지럼증마저 느끼다 어디선가 살짝 풍기는 소박한 비누 냄새. 화려한 실크 셔츠를 입은 느끼한 남자들 속에서 화이트 셔츠를 잘 갖춰 입은 단정한 남자를 만난 느낌이다. 향수 대신 비누 냄새를 풍기는 남자는 왠지 청결하고 믿음직하며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허세도 없을 것 같다. 향수 브랜드들은 "좋은 향으로 기억돼라"고 속삭이지만, 아니다. 멋진 남자는 향이 아닌 그 사람 자체로 기억되어야 한다. 향은 사람보다 먼저 등장하면 안 되고 사람이 떠난 후 오래 남아 있어도 안 된다. 향수를 뿌리든 비누를 쓰든, 남자에게서 나는 향에 관한 황금률은 이것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