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 앞에 생긴 중고명품매장을 찾았다. 큰맘 먹고 샀다가 무겁기도 하고, 볼수록 취향이 안 맞아 고이 모셔둔 가방을 들고 갔다. 영수증 같은 거야 다 버렸고 구매한 지도 꽤 지나 교환·환불이 불가능했다. 놔두자니 자리만 차지하니 '아직 괜찮을 때' 차라리 한 푼이라도 더 받자는 생각이었다.
몇 번 사용한 적 없어 상태는 A급을 받을 거라 예상했다. 한데 가방을 샅샅이 살펴보며 '흠'을 찾던 매장 관리자가 물었다. "더스트백이랑 상자, 영수증은요? 그게 있으면 더 좋은데…." 제품을 담는 주머니인 더스트백은 '명품 보관'의 기본이라기에 챙겨뒀지만, 상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값 받으려면 박스도 가져오셔야 돼요. 고객 분들이 점점 까다로워져서요." 예전엔 물건이랑 보증서 카드 정도면 괜찮았는데 이젠 '새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자가 돈이 되는 시대다. '덕후' 문화가 발달하면서 레고나 나이키 등 일부 수집광 사이 인기 있는 제품일수록 포장까지 완벽한 제품을 찾는 이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용어도 생겼다. '칼박' '미스박'. 해외 거래 사이트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MISB(Mint In Sealed Box·박스째 한 번도 개봉되지 않은 제품)를 재치 있게 번안한 단어다. '칼박'은 흠집이나 구겨짐 전혀 없이 '칼날 같은' 모서리를 유지한다는 걸 뜻한다. '미스박'은 MISB를 소리 나는 대로 유머러스하게 읽은 것이다. 레고 마니아 김동건(30)씨는 "레고는 패키지 이미지만으로도 매력이 있고 레고 재판매로 돈을 버는 레테크(레고+재테크) 시대에 포장 상태가 완벽해야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큐레이션 쇼핑몰 G9 배상권 마케팅 실장은 "고객들이 실제 상품을 구매할 때 필요한 것들에 대해 고민하던 중 레고 마니아들을 위한 칼박 포장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며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21일까지 한 달간 레고 판매가 지난해보다 46% 늘었다"고 말했다.
피규어 마니아들은 일반 노란 골판지 박스인 '카턴 박스(Carton Box)'를 수집한다. 카턴 박스 안에 '모셔둬야' 더욱 보호받는 느낌이란다. 나이키의 조던 덕후들은 흔하지 않은 레어 아이템을 모으는데, 컬렉션별로 박스 디자인에 차이가 있어 박스를 매우 중히 여긴다. 이들은 비용, 디자인과 관계없이 '컬렉팅의 기본은 풀 세트'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박스까지 모은다고 입을 모은다.
샤넬이나 루이비통 같은 명품 브랜드의 박스도 '한몸값' 한다. 명품 브랜드에선 제품당 종이봉투도 한 개, 박스도 한 개만 제공하는 게 기본 규칙이라 중고 거래에서 인기 품목으로 꼽힌다. 샤넬 같은 경우는 브랜드 상징인 '카멜리아'(동백꽃)를 붙여주기 때문에 카멜리아 유무에 따라 가격도 차이난다. 몇 년 전 명품 브랜드 종이 가방이 중고 시장에서 1만원 내외로 팔렸다. 최근엔 제품을 담는 박스도 중고 사이트에서 인기. 보통 3만원대다. 최근 한 중고 거래 사이트에선 샤넬의 종이 가방·박스·리본·포장할 때 쓰는 기름종이까지 '풀 세트'로 20만원대에 물건이 나와 화제가 됐다. 이젠 박스도 '상전'처럼 모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