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칵테일 '핫 토디', 와인 데워먹는 '뱅쇼', 히레 사케 외에도 따뜻한 술 많아
스모크 칵테일부터 돌솥 칵테일까지 훈기 더하는 겨울 술 퍼레이드

한남동 ‘소하’에서 맛볼 수 있는 ‘켄터키 스모크’는 솔방울을 태워 만든 칵테일이다

우리가 뜨거운 술을 잊어본 적 있던가? 귀가 시리도록 추운 어느날, 길거리에서 뱅쇼 한잔을 마셔본 기억이 있다면 뜨거운 술의 위력을 제대로 경험해봤을 테다. 코가 빨개지도록 추운 날, 골프를 치다가 살짝 데운 물과 꿀을 탄 위스키 한잔을 마시면 몸이 얼마나 따뜻해지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추운데 바람마저 매섭게 부는 날, 어묵 한 꼬치와 비릿한 생선꼬리 향이 올라오는 히레사케 한잔을 마셔봤다면 아직까지도 이 뜨거운 술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니 떠오르는 가장 기억에 남는 ‘뜨거운 술’ 한잔이 있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해변도시 에트르타를 여행할 당시에 마신 술이다. 쌀쌀한 바닷바람에 근처 카페로 잠시 몸을 옮겼다가 메뉴판에서 ‘깔바도스쇼’를 발견했다. 깔바도스는 노르망디 지역의 특산주로 사과를 증류해 만든 알코올 도수 40도 정도인 증류주이다. 프랑스 어는 잘 몰랐지만 ‘쇼’는 뱅쇼의 그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남동 ‘버번스트릿’에서는 잭의 해골 모형에 태운 시나몬 스틱으로 향을 입힌 위스키 칵테일 ‘잭피아’를 선보였다

모험 정신으로 주문한 깔바도스쇼는 굉장했다. 콧구멍부터 식도까지 알코올의 뜨거운 기운이 불을 지르듯 태우고 지나갔다. 몇 번 시도해도 입 안으로 술을 밀어넣지 못했다. 이렇게 알코올 기운이 강하고 뜨거운 술은 벌칙 같다고 생각했다. 못 먹겠다고 다시 카운터로 돌려 보낼까 몇번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독사처럼 눈처럼 강렬한 알코올의 기운이 풀리고 식도를 넘어 몸으로 스며드는 능구렁이처럼 느껴졌다. 그 뜨거운 힘으로 여행은 내내 팔팔 끓었다. 맛은 상온에서 마시는 칼바도스보다 좀 떨어지겠지만 그 뜨거움은 분명 특별한 무엇이었다.

나무 장작 타는 냄새와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가 문득 떠오른다. 칵테일 중에서도 훈제 향처럼 그윽한 향이 감도는 스모크를 더한 한잔이 겨울에 더 인기다. 실제로 손님의 눈 앞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계피 타는 냄새, 나무 장작 냄새가 술 한잔을 휘감는다. 시나몬 스틱에 시가처럼 불을 붙이기도 하고, 드라이 아이스를 동원해 더 극적인 효과를 노릴 때도 있다.

◆ 따뜻한 그 연기, 스모크 칵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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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 바 '소하'에서는 '켄터키 스모크'라는 이름의 달콤하고 그윽한 칵테일을 만든다. 솔방울을 태워 그 향을 함께 음미하는 형태로, 베이컨의 향까지 더해 잘 구성된 요리 한 그릇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 베이컨 오일로 향을 더한 버번 위스키를 베이스로 쓴다. 일단 이 칵테일을 시킨 뒤엔 카메라로 금새 사라지는 연기를 포착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이 연기가 주는 따뜻함을 눈으로, 입으로 즐겨보길 권한다.

한남동에 있는 버번 위스키 전문 바 버번스트릿에서는 ‘잭피아’라는 창작 칵테일을 만든다. 잭의 해골 속에는 태운 시나몬 스틱을 태워 연기로 향을 입힌 버팔로 트레이스 버번 위스키 한잔을 놓고, 에스프레소, 코앵트로, 크림, 넛맥 등을 넣은 칵테일을 함께 서브한다. 취향에 따라 커피 칵테일에 넣어 마시거나 따로 마실 수 있다.

청담동 스틸에서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연상시키는 ‘카페 아가베’ 칵테일을 메뉴에 올리고 있다. 보리차를 우린 데킬라를 베이스로 쓴다. 동그란 소줏고리 형태의 술잔에서 뿜어져 나오는 드라이아이스에는 보리차를 넣어 고소한 향이 더 강렬하게 풍긴다. 이 술과 아주 잘 어울리는 안주 겸 장식인 조리퐁 과자를 칵테일 밑에 까는 재치도 담았다.

청담동 ‘스틸’의 ‘카페 아가베’ 칵테일은 따뜻한 커피 한잔을 연상시킨다.

◆ 겨울엔 포기할 수 없는 '뜨거운 술'

얼음을 즐겨쓰는 바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끼려면 평소보다 레이더망을 평소보다 좀 더 높게 올려야 한다. 먼저 뜨겁게 마시는 클래식 칵테일을 구비해둔 바를 찾아가보자.

한남동과 역삼동 커피바K에서는 '핫 버터드 카우'를 만들고 있다. '핫 버터드 럼'에 들어가는 뜨거운 물 대신에 뜨거운 우유를 넣은 칵테일로 커피바K에서는 기존 레시피에서 계란 노른자를 더해 고소한 맛을 추가한다. 청담동 앨리스는 뜨거운 칵테일로 아이리쉬 커피, 뱅쇼, 핫 버터드 럼과 함께 '탐앤제리' 칵테일을 제공한다. 탐앤제리라고 적힌 두툼한 머그컵에 서브되는 칵테일로 브랜디, 우유, 머랭이 들어가는 달콤하고 크리미한 한잔이다.
꽃집 겸 진(Gin)을 전문으로 하는 경리단길 끄트머리의 플라워진에서는 '핫 진 펀치'를 만든다. 헨드릭스 진에 루이보스 차, 히비스커스 시럽 등이 들어가는 향긋한 한잔이다. 한남동 마이너스에서는 독특한 클래식 칵테일에 이곳만의 색깔을 더한 '빅토리아 진 펀치'를 판매한다. 앤티크 찻잔에 서브되며 차갑게도 뜨겁게도 마실 수 있다. 칵테일에 얼그레이 티와 엘더플라워(허브의 일종) 향을 더해, 진을 데웠을 때 올라올 수 있는 날카로운 향을 잡았다. 그 덕에 화사하면서도 독특한 향이 난다.

광장동 W호텔의 ‘우바’에서는 돌솥에 담긴 삼계탕 형태의 칵테일을 선보이고 있다.

꼭 술의 온도가 뜨겁진 않더라도 추운 겨울을 달래줄 칵테일은 무궁무진하다. 바의 메뉴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찻잔이나 돌솥, 항아리 등을 술잔으로 활용한 재미있는 칵테일도 많다. 특히 이런 뜨거운 음식을 담는 그릇에 만들어주는 칵테일은 바텐더가 건네주는 순간 일종의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재미있는 술이다. 뜨거운 음료일 것이라는 상식을 깨고 차가운 술이 들어가 있어 눈도 입술도 깜짝 놀란다.

온도가 뜨거운 술, 뜨거운 술처럼 보이는 술

W호텔의 우바에서는 돌솥을 술잔으로 응용한 독특한 칵테일을 선보이고 있다. 돌솥 한켠엔 삼 뿌리가 장식으로 쓰인 칵테일 잔이 놓여 있고 닭다리 스낵이 함께 제공되는 재기발랄한 술이다. 삼계탕의 여러 요소를 칵테일로 끌어와 재조립한 버전으로 삼 우린 물에 드라이아이스를 더해 삼 향기 가득한 연기가 피어 오른다.

최근 동부이촌동에 새롭게 문을 연 ‘헬카페 스피리터스’에서는 찻잔에 향을 살린 위스키 칵테일 담아 내는 ‘잉글리시 로즈 부케’를 만든다. 위스키의 다채로운 향 특히 허브 향을 살려내기 공들인 칵테일로 칵테일에 술을 한번 붙여 알코올 향을 날려서 다시 식힌다. 애프터눈티를 즐기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마카롱 하나를 함께 낸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차 한잔인데, 한 입 마시면 향긋한 위스키 향이 입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청담동 ‘앨리스’에서는 초소형 티파티 테이블과 의자 모형이 칵테일과 함께 제공된다.

청담동 앨리스에서 만드는 ‘언버스데이 티파티’는 인형놀이에나 볼 수 있는 초소형 티파티 테이블과 의자 모형이 칵테일과 함께 손님 눈 앞에 펼쳐진다.

경리단길에 있는 ‘칼로앤디에고’에서는 ‘항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담는다. 뜨겁게 달군 돌에 과일을 굽고 이 과일을 넣어 만든 칵테일로 항아리에 담아서 낸다 . 뜨거운 돌에 음식을 구워먹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전통음식 ‘항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칵테일이다. 이 겨울, 스산한 바람이 불어도 따뜻하게 보낼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특히나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바에서라면.

◆ 손기은은 남성 라이프스타일 월간지 ‘GQ KOREA’에서 음식과 술을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로 9년 째 일하고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레스토랑의 셰프부터 재야의 술꾼과 재래시장의 할머니까지 모두 취재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요즘은 제대로 만든 칵테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바와 바를 넘나드는 중이다. 바람이 불면 술을 마신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