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유벌 레빈 지음|조미현 옮김|에코리브르|352쪽|1만8500원
따지고 보면 영미(英美)의 보수와 진보는 '밥상머리'에서 갈라졌다. 훗날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영국 정치가이자 문필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가 1788년 8월 18일 주최한 만찬(晩餐) 자리였다. 이날 영국 태생의 미국 이민자로 미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진보적 논객인 토머스 페인(1737~1809)이 손님으로 초대받았다.
참석자들 증언에 따르면, 이날 분위기는 시종 즐겁고 화기애애했다. 페인은 이렇게 술회했다. "미국 독립혁명에서 버크 선생의 역할을 생각하면 내가 그를 인류의 벗으로 여기는 건 자연스럽다. 우리의 친분은 그런 이유로 시작됐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이들은 혁명에 대한 견해차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미국 정치학자이자 보수적 싱크탱크 '윤리·공공정책센터' 연구원인 저자는 18세기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 보수와 진보의 사상적 기준을 제시했던 버크와 페인의 논쟁을 추적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응부터 둘은 달랐다. 1789년 10월 버크는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소멸하고, 그 자리에 괴물들의 세상이 만들어진 것 같다." 심지어 버크는 같은 해 프랑스 인권 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해서도 "무정부주의에 관한 일종의 요약본"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했다.
반면 페인은 "프랑스 혁명은 분명 유럽에서 일어날 다른 혁명들의 전조"라며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이들의 논전(論戰)은 사실상 불가피했던 것이다. 편지와 책자를 통한 이들의 논쟁 과정에서 근대 유럽 사상사의 기념비적 저작들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과 페인의 '인권(人權)'이다.
저자는 역사서와 정치학 서적, 교양서의 수위를 넘나들면서 이들의 논점을 명징하게 부각시킨다.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 등 주요 개념에 대한 인식부터 둘은 달랐다. 이를테면 보수주의자 버크에게 자유는 언제나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개념이었다. 그는 "지혜나 미덕이 빠진 자유란 가능한 모든 악 중에서 최고의 악(惡)을 의미할 뿐"이며 "이는 훈련이나 규제가 없는 어리석음, 부도덕, 광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세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 있다"고 믿었던 페인에게 인권과 자유는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자 전제 조건이었다. 페인이 천부적 인권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급진적 혁명에 찬성한 반면, 버크는 세상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점진적이고 연속적 개혁을 옹호했다. 버크가 급진주의나 과도한 신념이 지닐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하다면, 페인의 사상은 사회가 자칫 시대착오나 퇴행으로 전락하는 걸 막아준다는 점에서 효과가 있을 것이다.
현대 정치에서 좌우를 나누는 또 다른 기준이 되고 있는 정부 개입에 대해서도 둘은 사뭇 다른 견해를 보인다. 진보주의자 페인이 "노인, 무력한 유아, 가난한 자를 부양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강조할 때, 보수주의자 버크는 "어떤 유형의 행정이건 과도한 것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밝힌다. 이 구절들만 놓고 보면 페인은 영락없이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요, 버크는 미국 신자유주의의 정신적 지주처럼 보인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당시 백악관 정책보좌관을 지낸 저자는 그저 중립적인 전달자나 방관자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의 논쟁이 지닌 의미를 현재적 시점에서 재해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우파는 대체로 버크의 성향을 공유하면서도 덜 귀족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유산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반면 현대의 좌파들은 유토피아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페인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버크와 페인의 논쟁은 미국 대선이 막 끝난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원서의 문장을 충분히 음미한 뒤 요령 있게 옮기기보다는 직역투에 가깝게 번역한 구절들은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아쉬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