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타이어업체 미쉐린(Michelin)이 발간하는 음식점 평가·안내서 '미쉐린 가이드'가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건 엄정한 식당 선정 기준 때문이다. 지난 7일 첫 발간된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는 서울의 무수히 많은 식당 중에서 겨우 24곳이 별(1~3개)을 받았다. 최고 중에서도 최고의 음식점에 부여하는 별 3개는 단 두 곳. 전 세계적으로도 '3스타' 레스토랑은 111곳에 불과하다.
도자기업체인 광주요그룹이 운영하는 모던 한식당 '가온'은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과 함께 별 3개를 받았다. 광주요의 또 다른 모던 한식당인 '비채나'도 별 하나를 받았다. 한 기업에서 미쉐린 스타를 4개나 획득한 셈. 외식업계에서 '이번 미쉐린 서울편에서 최고의 승자는 광주요 조태권·희경 부녀(父女)'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조태권 광주요 회장의 둘째딸 조희경씨는 광주요 외식사업부 '가온 소사이어티'를 맡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신사동 '가온'에서 미쉐린 '4스타'의 주역인 조회장 부녀, 김병진 가온 조리장, 방기수 비채나 조리장을 만났다. 발표 당일 조태권 회장은 사무실에 있었다고 했다. "가온이 3스타로 확정된 순간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제발 (광주요를) 맡아다오. 너밖에 없지 않냐'고 유언하셨거든요. 어떻게 보면 걷지 않아도 될 길을 28년 동안 걸어온 셈인데…." 조 회장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목이 메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까지 저는 스스로 뭐든 할 수 있다는 만용이 있었어요. 도자기 사업쯤이야 했죠. 하지만 도자기를 하면서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인간으로서 성숙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지요."
조 회장은 광주요를 창업한 부친 조소수 선생이 1988년 별세하자 회사를 물려받았다. 이후 비색청자 등 전통 자기를 복원했고, 생활 도자기 '아올다' 라인으로 히트했다. 이어 '가온'과 '비채나' 등 외식업에 진출했고, 전통 소주 '화요'를 출시하는 등 광주요를 '한국 문화사업 그룹'으로 키웠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던 김병진 셰프는 "마지막까지 별을 몇 개 받는지 전혀 몰랐다"고 했다. "3스타라고 발표되는 순간 머리가 하얬어요. 무대에 서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마구 받고야 정신이 들었지요." 방 셰프는 "한식이란 우리 엄마 같은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가 남들은 친절하게 대하면서 정작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엄마한테는 소홀하잖아요. 한식을 대하는 우리 태도도 그런 것 같아요. 늘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모르는 존재. 미쉐린 발표장에서 한식이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한식 요리사로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조 회장은 '한식이야말로 앞으로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산업'임을 깨닫고 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2003년 가온을 열었다. 사재(私財) 600억원을 한식 세계화에 쏟아부은 걸로 유명하다. 김 셰프는 2003년부터 벌써 14년째, 방 셰프는 요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온에 입사해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외식업계는 이직이 잦고 근무 기간이 짧기로 악명 높다. 게다가 조 회장은 깐깐하기로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잔소리가 엄청나시죠. 하지만 모두 열정에서 비롯됐다는 걸 직원들이 알아요. 대표·오너이기 전에 실무자세요. 실무하는 사람들과 항상 호흡을 같이하려고 하시죠."(김병진)
"테이블 밑이나 그릇 바닥까지 손가락으로 문질러 확인하세요. '이런 부분이 더러우면 음식까지 의심받는다'고 하시면서. 음식뿐 아니라 그릇, 분위기 등 전체를 보라고 항상 말씀하시지요. 28년을 한결같이 자신의 꿈을 향해 몰입하고 추진하는 열정에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방기수)
요리사가 되려 했던 조희경 대표는 미국과 일본에서 일하다 비자 문제로 2009년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발목'을 잡혀 2010년부터 가온과 비채나를 운영하고 있다. 부녀는 언뜻 봐도 성격부터 외모까지 똑같다. 조 대표는 "아버지를 진짜 미워하고 진짜 사랑한다"고 했다. "어렸을 땐 아버지 눈도 못 쳐다볼 만큼 무서웠어요. 하지만 겉으로 강하지만 속은 여린 분이에요, 저처럼. 사업가로선 물론 존경해요. 화나면 '욱'하시지만 그걸로 끝이니까 힘들진 않아요(웃음)."
조 회장은 "딸에게 특별히 경영 수업을 시키진 않는다"면서 "사업을 맡기는 것 자체가 교육"이라고 했다. 조 대표는 "아버지가 경영을 직접 가르쳐주진 않지만 이런저런 조언을 자주 해주신다"고 했다. "얼마 전 아침에 '중요한 이야기'라며 저를 깨우셨어요. 최근 최순실 사태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통령이 왜 모든 권력을 갖고서도 무너지는지 아느냐. 나라에 인재가 없어서가 아니다. 대통령 자신이 다 안다고 자신하면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비선 측근에게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회사 경영도 마찬가지다. 회사에 인재와 자원이 어떻게 어디에 있는지 꿰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조 회장은 "사업가는 인문·사회·문화·과학·시사를 두루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공부는 새로운 지혜를 만들어내는 밑재료이니까. 많이 알수록 판단이 정확해집니다."
미쉐린 별은 요리사에게 큰 명예인 만큼 부담이기도 하다. 별을 잃는다는 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거대한 압박이다. 유럽에는 별 3개에서 2개로 강등된다는 루머를 견디지 못해 자살한 요리사들도 있었다. "내년이 걱정되지 않으냐"고 네 사람에게 물었다. 김병진 셰프는 "미쉐린이 온다고 했을 때, 정말 좋은 한식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토론하는 계기로 봤지 별에 연연하지 않았다"며 "경쟁을 통해 한식이 발전하기 바란다"고 했다. 조 회장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며 "미쉐린 가이드는 한식이 세계로 나가는 터널이 뚫린 것"이라고 했다. "간장게장을 예로 들어볼까요? 그동안 간장게장이 맛있다고 우리끼리 얘기했지만, 세계 사람들은 몰랐어요. 하지만 이번에 간장게장 하는 식당이 미쉐린 별을 받았으니, 세계인들도 '아 간장게장이 맛있는 음식이구나' 인식하게 됐어요. 미쉐린은 세계가 인정하는 미식의 기준이니까요. 이제는 우리가 세계인의 입맛을 길들이는 일만 남았어요. 맛은 길들여지는 거예요. 누가 처음부터 일본 스시(초밥)가 맛있다고 했나요? 길들여진 거죠. 이제 제 역할은 다 했고, 이제부터는 조 대표나 김병진·방기수 셰프 같은 젊은이들 몫입니다."
김병진 셰프는 "한식은 파면 팔수록 재미있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 궁중음식은 조선 말기 음식입니다. 여러 맛이 섞인 화려하고 융합적인 맛이죠. 하지만 수운잡방, 음식디미방 등 이전 시대 조리서를 보면 재료 하나에 집중한 요리가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