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壁)신문(wall newspaper)'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로마제국의 지도자였던 카이사르는 재판 결과나 승전 소식을 벽에 붙여 나라를 통치하는 데 활용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방(榜)을 붙여 여러가지 나라 소식을 알렸다. 대자보(大字報)라는 말은 1957년 중국 공산당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1966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가 대자보의 전성기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대자보가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토익과 취업 강좌 포스터로 뒤덮였던 대학가 게시판에 대자보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대자보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어떤 것들이었을까.
시절이 하 수상하니
Step 1. "교수님 F학점이라고 했잖아요"
이화여대의 본관 점거 농성이 한창이던 지난달 17일, 이대의 생활환경관 건물에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 관한 대자보 한 장이 붙었다. 자신을 정유라와 같이 수업을 들은 의류학과 16학번 학생이라고 소개한 작성자는 대자보를 통해 "단 한 번도 수업에 나오지 않은 정씨가 어떻게 B학점을 받을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정유라를 보며 '얘는 이미 F'라고 말했던 담당 교수의 사과를 요구했다. ▶ 관련기사
Step 2. "어디에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
정유라의 '성적 비리 의혹'을 폭로한 위 대자보는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입학 비리와 동시에 정유라가 성적에서도 상상 이상의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는 '증언'은, 과제로 날밤을 새우며 학점 관리에 전전긍긍하는 '보통' 학생들의 집단 분노를 유발했다. 이에 '금수저' 정유라와 이화여대의 행위를 비꼬는 대자보가 잇따라 등장했다. 한 익명의 학생은 '어디에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로 시작하는 편지 형식의 대자보를 작성하여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Step 3. "정유라 누나! 이화여대 합격 축하해!"
정유라와 최순실 모녀에 대한 분노는 대학가를 넘어 고등학교까지 번졌다. 지난 1일 한 고등학교의 학생회는 "정유라 누나! 이대 합격 축하해"로 시작하는 대자보 한 장과,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대자보 두 장을 교내에 붙였다. 고등학생들은 본 대자보를 통해 "우리 부모님을 말을 사줄 수 없다"며 "공정한 시스템에서 평가받을 권리를 지켜달라"고 외쳤다.
Step 1.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우리의 립장"
지난해 가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사회 이슈로 떠오르자 대학가에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현수막과 대자보가 나붙었다. 북한식 서체와 어투를 차용한 연세대의 "우리의 립장"이라는 대자보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되자, 이후 여러 대학에서 국정교과서와 이를 밀어붙인 정부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내놨다. 빨간 배경의 국정화 비판 대자보를 내건 이화여대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Step 2. "1도만으론 검정색이 되지 않습니다"
대자보 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학과의 특성을 살린 대자보도 등장했다. 한 미대생은 '한 가지 색만으론 검정색이 되지 않는다'며 OHP 필름과 잉크를 이용해 미술 작품에 가까운 대자보를 만들었다. 국정교과서의 편향성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 서울대 수학과 학생은 미분 공식을 활용해 '한반도의 역사가 거꾸로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공식을 선보였다. 대학생들의 재기발랄한 대자보는 SNS를 타고 확산되며 젊은 층의 공감을 샀지만, 일부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진중하게 다뤄야 할 사안에 대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삼포 세대'의 하소연
Step 1. "안녕들 하십니까?"
한창 연말 분위기에 들떠있을 2013년 12월, 고려대 게시판에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한 대자보가 붙었다. 글쓴이는 대자보를 통해 "하루 만에 4213명의 노동자가 철도 민영화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었다"며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을 꾸짖었다. '안녕들' 대자보는 붙은 지 4일 만에 페이스북 '좋아요' 7만 개를 넘었으며, 전국 대학가로 확산됐다.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는 '좋아요' 수가 25만 명을 넘어섰다. ▶관련기사
Step 2. "안녕하지 못합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질문은 곧 '안녕하지 못하다'는 대답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은 '추운 밖에서는 투쟁을 하고 있는데 나는 눈앞의 것만 바라보고 있다'며 타인의 고통에 눈감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한탄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1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안녕들' 열풍은 정부 비판 촛불시위로 이어졌고, 대통령 지지율까지 끌어내렸다. 야당 정치인들까지 당사에 '안녕들' 대자보 붙이기 열풍에 동참했다.
Step 3. "깨어있는 대학생이 뭡니까"
그러나 모든 젊은이가 '안녕들' 열풍에 공감한 건 아니었다. 대학가에는 '안녕들 반박 대자보'도 붙었다. 반박 글을 쓴 이는 "당신들이 말하는 깨어있는 대학생이 뭐냐"며 "옳지 못한 일에도 지지하고 응원해야 하냐"고 되물었다. '안녕들' 대자보가 사실관계도 틀린 채 감성에만 호소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실제로 대자보에서 '일자리를 잃었다'고 표현한 이들은 단지 직위해제 된 것이었으며, 해당 글의 필자도 구 진보신당 당원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관련기사
Step 4. "'안녕들' 질문이 한국을 흔들고 있다"
세밑 한파에 닥친 '안녕들' 신드롬은 외신에서도 집중 조명했다. 프랑스의 르몽드(Le Monde)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이 한국사회를 흔들고 있다"며 당시 국내에서 벌어졌던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 통진당 해체 헌재 기소, 나꼼수의 박지만 명예훼손 항소심 등의 사건을 언급했다.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안녕들' 신드롬을 단순히 진보·보수의 정치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불안과 불신이 집단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형성되기도 했다. ▶관련기사
Step 1. "최씨 아저씨, 저는 좀 화가 나 있습니다"
2014년 겨울, 연세대·고려대 등 대학가에 '최씨 아저씨께 보내는 협박 편지'라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아저씨, 저는 좀 화가 나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대자보는 "손자 볼 생각은 꿈에도 마세요. 애 기를 돈도, 시간도, 공간도 없는 저에게 기대하시는 건 아니죠?"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최씨 아저씨'는 당시 경제부총리던 최경환을 지칭하는 말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정규직 과보호 때문에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과 더불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중규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대학생들의 비난 대상이 됐다.
Step 2. "최경환 학생, F학점 답안지 받아가세요"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공론화에 성공하게 된 건 협박 편지 이후에 나온 'F학점 대자보'를 통해서다. 경희대에 붙은 이 대자보는 '한국 경제의 위기 해법에 관해 쓰시오'라는 시험 문제에 대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답안을 작성한 형식으로 꾸며졌다. 최 부총리가 평소 언급했던 '정규직의 해고 요건을 간소화 해야', '시간제 일자리를 확대해야' 등의 내용이 적히고, 마지막에는 알파벳 'F'가 큼지막이 쓰여 있었다. ▶관련기사
Step 3. 최경환 "중규직 용어도 몰랐다"
이 대자보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엇갈렸다. 정부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시각과, 잘못된 정책 방향에 대해 따끔한 지적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논란이 커지자 최경환 부총리는 대학생들과 직접 대화의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자신은 "중규직이라는 용어도 몰랐다"며 해당 정책을 추진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정부 관료들 역시 대학생들의 어려움은 이해하지만, 일방적인 비난은 아쉽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 관련기사
'性' 얘기도 숨기지 않는다
최근 고려대 여학생위원회는 학내에 '잘 살 것이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였다. "성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너는 잘 살 것이다. 나처럼 소화불량에 걸리지도 않고 불면증에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는 내용을 담은 해당 대자보는, 여학생위원회가 학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비판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피해 여학생은 2년 전 같은 대학 남학생으로부터 강제 추행을 당했지만, 법원은 학생이 어리고 초범인 데다가 술에 취한 우발적인 범행이라는 이유로 벌금형에 처했다. 학교 역시 남학생에게 두 학기 정학 처분을 내리는 데 그쳤다. 이에 대자보를 붙인 여학생위원회는 학교에 해당 사건을 전면 재검토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 관련기사
지난 7월에는 서울대 총학생회 산하 단체에서 붙인 '카톡방 성폭력 고발'이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화제였다. 공개된 카톡 대화에는 동기나 후배 여학생을 성적으로 모욕하거나, 미성년자를 성희롱하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대자보에 대해 "사적인 대화를 공론화시키는 건 인권침해"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 관련기사
올해 여름에는 대학가에서 성폭행 가해자들이 본인들의 실명을 거론한 '사과문 대자보'를 줄줄이 공개해 이슈가 됐다. 이들은 "만취 상태로 후배 집에 찾아가 성폭행했다"던지, "단체 카톡방에서 언어 성폭력을 해 죄송하다"는 식으로 자세하게 자신들의 범행을 기술했다. 자신의 이름과 학번, 학과까지 밝힌 대자보를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지만, 대부분은 피해자와 합의 하에 작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공개 사과를 할 경우 재판에서 감형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 관련기사
대자보, 해학 속에 담긴 강렬한 메시지
하얀 전지에 검정색 매직으로 써 내려간 부모님 세대 '대자보의 정석'은 조금씩 변형되고 있다. 이제는 컴퓨터로 글을 쓴 뒤 인쇄해 붙이기도 하고 그림으로 글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형식은 변했지만 게시판에 뭔가를 붙이는 '아날로그적인' 대자보 문화는 수십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 이유는 바로 대자보가 주는 강렬한 메시지 덕분이다.
전문가들은 SNS시대에 대자보가 부활하고 있는 이유를 '진정성'에서 찾는다. SNS 상에선 하루 수천, 수만개의 글이 쏟아지지만, 이를 통해 진지한 의견을 전달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것. 반면 자필로 쓴 대자보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강하게 전달할 수 있다.
과거보다 파급력이 강해진 것도 대자보가 부활하는 이유다. 성폭력 대자보처럼 '정공법'으로 쓴 것이나, '돌려까는' 재미를 담은 대자보는 SNS를 타고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공감과 지지를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장점. 본래의 대자보에 '응답'하거나 '패러디'하는 후속 대자보도 순식간에 쏟아진다. '아날로그'인 대자보 문화와 '디지털'인 SNS 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