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증거를 잡았다. 대북 제재의 뚫린 구멍을 찾아낸 것이다. 북한과 무역 거래를 해온 중국 랴오닝훙샹그룹을 적발한 우리 연구 보고서가 미국과 중국으로 하여금 액션을 취하게 만들었다."

이런 난국에 한가하게 들리겠지만 함재봉(58) 아산정책연구원장의 '세계적인 특종(特種)' 얘기는 기록해야겠다. 박근혜 대통령 개인보다 국가 일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9월 중순 미(美) 월스트리트저널은 '미·중 양국이 북핵 개발 관련 물자를 제공해온 의혹으로 랴오닝훙샹그룹에 대한 공동 조사에 나섰다'고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 취재 소스(source)가 아산정책연구원과 미(美) 국방문제연구센터가 함께 만든 '중국의 그늘에서'라는 연구 보고서였다.

"재작년 미 국방문제연구센터에서 '북한 정권이 국제 제재를 받는데도 어떻게 외화벌이를 하고 자금이 유입되는지 추적해보자'고 제안했다. 빅데이터 기법을 통해 제3세계 독재자의 자금 흐름, 무기 밀매, 코끼리 상아 거래 조직 등을 추적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연구원에서는 '북한 외교관이나 주재원들이 직접 불법 거래를 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해외에 거점을 만들고 외국 기업을 앞세워 제재망을 피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함재봉 원장은 “지금 현실에서 핵무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적했나?

"UN 제재 목록에 들어 있는 북한 선박 39개의 소유 선사(船社)와 인물들의 네트워크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랴오닝훙샹'그룹이 나왔다. 이 회사는 대북 무역 거래 실적을 중국세관에 보고해놓았다. 그 안에 산화알루미늄과 산화텅스텐 등 '이중(二重) 용도' 물자를 거래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이중 용도 물자'라는 뜻이 뭔가?

"알루미늄은 민간용이지만 핵 개발을 위한 우라늄 정제에도 필수적인 물질이다. 이런 거래는 유엔안보리 결의안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란의 경우에는 핵 개발 문제로 민간 부문까지 경제 봉쇄를 당했다. 석유 수출로 먹고사는 이란에 대해 석유 금수(禁輸) 조치를 했다. 미국과 서방의 보험회사들이 이란의 물품을 선적하는 배들에 대해 보험 가입을 거부했다. 생필품은 물론 병원의 약품까지 바닥날 만큼 가혹했다. 이에 비교하면 대북 제재는 제한적이다."

―중국의 비협조가 문제일 뿐, 대북 제재의 강도는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북 제재 대상은 핵 개발에 직접 관련된 인사와 군대, 선적, 금융기관에 한정돼 있다. 중국이 '민간 제재를 해봐야 주민들의 고통만 더해진다'며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제재조차 구멍이 뚫려 있다는 증거를 우리가 찾아낸 것이다."

―조사 보고서는 언제 나왔나?

"지난 4월 보고서가 완성됐다. 기자회견을 앞두고 미국 재무부와 법무부에서 미뤄달라는 연락이 왔다. 세 번이나 연기했다. '9월 중순까지 기다려달라'는 마지막 연락이 왔을 때 내가 이유를 물었다. '제3국(중국)과 얘기를 해봐야 한다'는 답변이었다."

―미국 수사기관에서도 이 사안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던 건가?

"그건 모르겠다. 다만 중국 측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딜(deal)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중국이 자체적으로 랴오닝훙샹에 대해 조사를 한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9월 19일 오바마 대통령과 리커창 총리가 유엔에서 만나 '대북 제재 등 한반도 비핵화 달성을 위한 협조를 강화하기로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바로 그날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이 사안을 1면 톱으로 단독 보도했는데?

"그전에 월스트리트저널에 단독으로 조사 보고서를 넘겨줬다. 이 신문은 중국 단둥에 가서 현장 취재한 뒤 그 날짜에 맞춰 보도한 것이다. 일주일 뒤 미 법무부가 '제재 위반 중국 기업'에 대한 공식 발표를 했다."

―랴오닝훙샹그룹만 문제가 됐나?

"의심이 가는 기업은 10여 개가 있었지만 적발한 것은 랴오닝훙샹뿐이다. 우리 같은 싱크탱크도 잡아냈는데 정부기관이 나서면 훨씬 더 성과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중국을 압박할 수 있다."

―지난주 일본 정부가 북·중 국경에 위치한 중국 기업들의 유엔 제재 위반 사례에 대해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보도됐는데?

"같은 맥락으로 중국 기업과 북한 간의 하도급 관계 무역 구조도 살펴보고 있다. 북한 노동자 상당수가 중국에 파견되어 있고 그 송금액이 핵무기 개발 비용으로 유입되는지를 주시하고 있다. 사실 북한 해외 노동자 문제를 국제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도 우리 연구 보고서(2014년)였다. 그 뒤 폴란드·몰타·카타르 등에서는 북한 노동자들을 추방시켰다."

―연구 보고서의 어젠다는 어떤 식으로 선정하는가?

"현안이 생길 때마다 연구원들끼리 토의한다. 언론사 편집국 회의 풍경과 비슷하지만, 매일 시간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길게 깊이 본다는 차이가 있다. 가령 얼마 전 말레이시아의 한 호텔에서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 특사와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가 북한의 한성렬 외무성 부상, 장일훈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 차석 대사를 만났을 때 우리 언론에서는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우리는 '이들끼리의 연례행사'라고 분석했다."

―우리가 대북 강경 일변도로 가다가, 자칫 한반도 문제에서 '물을 먹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지난 3년간 이들끼리는 열몇 번을 만났다. 올 상반기에도 베를린·스톡홀름·베이징에서 만났고, 작년에는 싱가포르·스톡홀름, 재작년에는 울란바토르, 그 한 해 전에는 런던에서 만났다. 매번 등장인물이 거의 똑같다. 북한과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온 미국의 일부 대화론자들이다. 물론 이런 만남이 어느 순간 의미 있는 대화로 전환될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로는 여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잘못 짚게 된다."

아산정책연구원은 정몽준 전 의원의 개인 출연으로 문을 연 국내 첫 민간 싱크탱크다. 그가 원장을 맡은 것은 2010년부터다. 초창기에는 정몽준의 대선캠프 부속 정책연구소로 오해받기도 했다. 일 년 예산은 약 100억원. 박사급 17명 등 연구 인력은 70명이다.

"매년 현대그룹 계열 회사에서 십시일반 모아 경비를 대준다. 우리는 공공이익을 위해 순전히 돈만 쓰는 셈이다. 장사를 해서도 안 되고 수익을 내서도 안 된다."

―최근에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이 보유 주식 260만주(약 4400억원)를 내놓아 '여시재(與時齋)'라는 싱크탱크를 설립했다. 이헌재 전 부총리와 이광재 전 강원지사 등이 전면으로 나섰는데?

"설립 준비 단계에서 전직 장관급인 K씨 등이 두 번이나 자문하러 왔을 때 '설립자는 돈만 대고 빠져야 한다. 그걸 통해 자기의 무엇을 이루겠다면 실패한다. 그리고 자체적인 연구 진용을 갖춰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때는 K씨 등이 주도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바뀌었더라."

―여기서도 돈을 대는 정몽준 전 의원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있나?

"지금까지 연구소 인사나 운영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물론 그분이 명예이사장이다."

―정몽준 전 의원은 정치인으로서 처음 '자위적 핵무장'을 공개 제기했다. 그 논리적 토대를 아산정책연구원에서 마련해준 것인가?

"그분의 생각이다. 연구원 차원에서 제기하거나 보고서를 만든 적은 없다."

―'자위적 핵무장'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나?

"국가 생존이 걸린 북핵 대응 문제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핵으로 공격했을 때 미국은 결코 핵으로 보복을 안 할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까지 개입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그걸 안다. 그렇다면 북한이 핵 사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망설이고 재고하게 하는 것은 뭘까. 우리의 자체 핵 보유뿐이다. 물론 지금 현실에서 핵무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대안으로 미국의 전술 핵 재배치에 대해서는?

"이는 미국의 결정에 달린 것이다."

―이 또한 미국의 '핵 확장 억제'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미국의 '핵 확장 억제' 원칙에도 독일에는 여전히 전술핵 200기가 남아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얼마 전 라트비아(북유럽 발트 3국 중 하나)의 국회외교위원장이 리퍼트 미국 대사, 독일 대사, 핀란드 대사 등과 함께 우리 연구소를 방문했다. 라트비아 외교위원장은 러시아가 최근 라트비아 인근 국경에 배치한 신형 탄도미사일 문제를 꺼냈다. 자신의 나라가 중대한 위협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전술핵 무기를 다시 갖고 오는 등 나토(NATO)가 조치를 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서방과 러시아의 신(新)냉전이 시작됐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이 나토에 전술핵 무기를 재배치한다면 한반도에서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설령 미국이 전술핵 재배치를 결정해도 '사드' 문제에서 보듯이 한국이 수용 못 할 것이다. 중국과의 외교적 갈등도 감당하기 어렵다.

"지난 2년간 중국의 정부 인사나 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이 북핵 실험을 계속 눈감아주면 한국 여론은 사드 배치와 한·미 동맹 강화, 심지어 일본과의 군사협정도 요구할 것이다'라고 말해줬다. 과연 4·5차 북핵 실험 이후 사드 배치는 물론이고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 심지어는 자위적 핵무장론까지 나오고 있다. MB 정권에서 한 청와대 인사는 일본과 정보교환 협정을 언급했다가 옷을 벗었는데 지금 여론은 찬성으로 바뀌었다."

―본인이 정부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전혀. 나는 책 쓰는 것을 가장 하고 싶다. 아버지(함병춘·5공 시절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아웅산 테러로 순직)는 대학과 정부에서 반반씩 일했다. 아버지 말씀이 '정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걸 막는 것뿐이고, 진짜 공명심을 만족시킨 것은 논문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걸 막기는커녕 더 깊숙이 수렁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을 비롯해 그 누구도 국가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함재봉

1958년 출생. 미국 칼턴대, 펜실베이니아대 경제학과 대학원, 존스홉킨스대 정치학박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사회과학국장. 서던캘리포니아대 한국학연구소장.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 현재 아산정책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