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기에 마운드와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모두 36명. 막판 극적인 동점과 연장 승부까지. 도합 174년간 우승 가뭄이 이어진 양 팀은 저주를 풀기 위해 4시간 28분간 혈투를 벌였다. 야구의 모든 것을 보여준 장편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고 최후에 웃은 팀은 미국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우승이 없었던 시카고 컵스였다.

108년 전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군 시카고 컵스 선수단의 기념촬영 사진.
이 모습은 미 프로야구(MLB)의 또 다른 역사적인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연장 10회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은 뒤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환호하는 시카고 컵스 선수들. 컵스는 인디언스를 상대로 월드시리즈 최종 4승3패를 기록하며 108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메이저리그 컵스가 3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벌인 월드시리즈 최종 7차전에서 연장 10회 끝에 8대7로 승리하며 1908년 이후 108년 만에 통산 세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1승3패로 몰렸던 컵스는 5~7차전을 내리 이기는 기적의 역전극으로 최종 4승3패를 기록, 지긋지긋한 '염소의 저주'에 종지부를 찍었다. 염소의 저주는 1945년 디트로이트와의 월드시리즈 당시 염소의 입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염소 주인이 "더 이상 컵스는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은 데서 비롯됐다. 반면 마스코트인 '와후 추장'을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1948년 이후 우승이 없던 인디언스는 '추장의 저주'를 풀 기회를 다음으로 미뤘다.

'야구의 신'은 누구의 손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6―3으로 앞선 컵스는 막판 아웃 카운트 4개를 남겨놓고 시속 160㎞대의 강속구 투수 채프먼을 마운드에 올렸다. 시카고 팬들은 이대로 경기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곧이어 거짓말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채프먼이 8회 2사 1루에서 가이어에게 적시 2루타를 맞아 한 점을 내준 데 이어 데이비스에게 2점 홈런을 헌납하며 순식간에 동점(6―6). 데이비스는 정규 시즌 통산 3999타석에 들어서 홈런 55개에 그친 선수다. 타석당 홈런 비율이 1.4%에 불과한 그가 최고의 마무리 투수를 상대로 극적인 동점 포를 쏘아 올린 것이다. 염소가 내린 저주의 기운이 경기장에 감도는 것 같았다. 양 팀은 정규 이닝 동안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연장전에 들어갔다.

힐러리 “내 고향팀 컵스 만세” -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3일 애리조나 주립대 유세를 마친 뒤 시카고 컵스의 우승 소식을 듣고 손을 번쩍 들며 환호하는 모습. 시카고에서 태어난 힐러리는 컵스의 팬이다.

하지만 하늘은 이날 컵스의 편이었다. 연장에 돌입하기 전 비로 인해 17분간 경기가 중단됐다. 타격감이 달아오르며 상승세를 탔던 인디언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재정비할 시간을 얻은 컵스는 연장 10회초 조브리스트의 1타점 2루타와 몬테로의 적시타로 2점을 뽑아 승기를 잡았다. 인디언스는 '히어로' 데이비스의 적시타로 연장 10회말 1점을 만회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마지막에 미끄러지면서 내야 땅볼을 아웃으로 연결한 컵스 3루수 브라이언트가 웃으며 송구하는 장면은 컵스 팬들의 행복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결승타를 기록한 조브리스트는 월드시리즈 MVP(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지난해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30년 만에 월드시리즈를 정복하는 데 힘을 보탠 그는 컵스로 이적한 첫해인 올해 결정적인 한 방으로 2년 연속 우승을 경험했다. 월드시리즈 MVP는 1955년 처음 제정됐기 때문에 컵스 소속으로 이 상을 받은 것은 조브리스트가 처음이다.

컵스의 우승이 확정되자 미국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는 "어릴 적부터 팬이었던 컵스가 우승하다니 정말 자랑스럽다"고 했다. 지역 라이벌 시카고 화이트삭스 팬인 오바마 대통령도 이날만큼은 컵스의 우승을 축하하며 "내가 백악관을 떠나기 전에 한 번 오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