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문화부 차장

신발 한 짝을 남겨놓은 채 최순실씨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울먹이며 검찰청사로 들어갔다. 죽을죄. 청와대 전 비서실장의 한 치 앞을 못 본 호언장담처럼 봉건시대에나 어울리는 사죄일 것이다. 그렇게 자복하면 누그러지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유감이지만 '악어의 눈물'과 함께 떠올린 영화 한 편이 있다. 블랙 유머가 넘쳐나던 송능한 감독의 '넘버 3'. 많은 사람이 흥분해서 말 더듬는 막내 조폭 송강호를 먼저 기억하지만, 기자에게 먼저 떠오른 장면은 조폭보다 더 다혈질인 검사 최민식의 대사다."내가 제일 ○ 같아 하는 말이 뭔 줄 아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야. 정말 ○ 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 있어? 죄를 저지르는 ○ 같은 ○○들이 나쁜 거지."

지면에는 차마 옮기지 못할 육두문자를 인용하는 까닭이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구약성경에서 출전을 찾는 이 격언은 많은 경우 최씨 같은 악당들이 자기 죄를 덮으려는 간편한 알리바이 아니었을까. "죽을죄를 지었다니 도와주러 왔다"며 서초동 대검청사에 돌진한 포클레인 기사의 궤변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침이다.

문화부 기자에게는 최민식 검사와 포클레인 기사에게 감정이입하도록 만드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이들의 국정 농단이 분야를 가리지 않았지만, 대부분 '문화'를 앞세워 죄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이권 챙기며 1800억 예산 주무를 때도 구호는 '문화 융성'이었고, 표절 망신 불러온 '크리에이티브 코리아' 프로젝트도 명목은 새 국가 브랜드 디자인이었으며, 중동 국가 UAE에 들어갈 때도 구실은 '문화 외교'였다. 문화부 장관까지 꿈꿨다는 차은택씨가 개입한 '문화' 관련 사업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20여 가지다.

1일 오전 8시 20분쯤 중장비 정비업자 정모(45)씨가 굴착기를 몰고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정문을 지나 청사 건물 입구까지 돌진했다. 이 과정에서 굴착기의 진입을 막으려던 경비원 주모(56)씨는 갈비뼈가 부러져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공용 건조물 손괴와 공무 집행 방해 혐의로 정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사진은 정씨가 전북 순창에서 대형트럭에 싣고 온 굴착기.

차씨가 이 정권에서 쓴 감투 중에 '문화융성위원'이 있다. 김동호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이 1기 위원장을, 세종문화회관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표재순씨가 2대 위원장을 맡았던 대통령문화자문위원회다. 1기 후반에 위원으로 잠시 위촉됐던 소설가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는 "첫 회의에 참석한 순간 나는 들러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연극배우 박정자, 영화배우 안성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등 순수한 예술가들을 '들러리'로 앞세워 그는 문화라는 이름의 '1800억 돈놀이'를 벌인 것이다.

문화부 설립 이래 이번처럼 장차관이 모두 외부 인사로 채워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씨와 차씨의 위세를 등에 업었던 김종덕 문화부 장관, 김종 문화부 차관, 김상률 교육문화수석, 송성각 콘텐츠진흥원장…. 사표 쓰고 잠적한 송 원장은 남의 광고 대행사 '꿀꺽'하려고 "묻어버린다" 협박했다는 보도까지 나온 상황이다.

'넘버 3'보다 못한 4류, 5류들이 '문화'만 앞세우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검사 최민식'의 명대사에는 이런 명령문도 있다. "네가 앞으로 뭘 하든, 하지 마라."

문화는 죄가 없다. 당신들이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