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불 때 시작되는 '쇼핑 축제'
지금부터 연말까지, 전 세계에서는 쇼퍼(shopper)들의 축제가 열린다.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된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와 영국의 '박싱데이'가 대표적. 단 하루, 한 인터넷 쇼핑몰의 매출이 16조 원에 달하는 중국의 '광군제'도 몇 년 전부터 세계 쇼핑 축제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인 코리아 세일 페스타를 열었다. 아직 2회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 축제는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남겼다. 수년 역사를 가진 중국·미국·영국의 쇼핑 축제와 이제 막 탄생한 우리나라의 쇼핑 축제, 뭐가 어떻게 다른지 전격 비교를 시작한다.
11월 11일
'광군(光棍)'은 중국어로 직역하면 '빛나는 막대기'로, 배우자나 애인이 없는 독신(싱글, single)을 뜻한다. 때문에 광군제를 '싱글데이', '솔로데이'라고도 한다. 11월 11일이 광군제가 된 배경은 '1'이라는 숫자가 네 번이나 겹쳐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커플들의 날인 '빼빼로 데이'가 중국선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광군제는 22년 전 중국의 난징대학교 기숙사에서 시작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애인 없이 지내던 남학생 네 명이, 서로 외로운 처지를 위로해주자며 파티를 열고 선물을 교환한 것이다. 이러한 풍습이 인터넷을 타고 중국 전역으로 전파됐다. 광군제가 대대적인 '쇼핑의 날'이 된 건 2009년 알리바바가 솔로 마케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알리바바는 젊은이들에게 '쇼핑을 통해 외로움을 달래라'고 광고했고, 이것이 통하면서 광군제가 중국 최대의 쇼핑시즌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의 광군제가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나 영국 박싱데이와 다른 가장 큰 부분은 온라인 쇼핑이란 점이다. 광군제 행사를 주도하는 건 중국 최대의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다. 알리바바의 온라인 쇼핑몰 뎬마오(天猫, 티몰)의 전자시계가 11월 11일 0시로 변하는 순간, 13억 중국인은 미리 찜해둔 상품을 클릭하기 시작한다.
지난해 한 시간동안 티몰이 올린 매출액은 300억 위안(약 5조 3,000억). 한국 대형백화점의 두 달치 매출액이었다. 홍콩 봉황TV는 "마윈 (알리바바) 회장이 잠시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는 사이 10억 위안을 넘겼다"고 전했다. ▶ 관련기사
이쯤에서 드는 의문, 도대체 얼마나 싸길래?
알리바바 측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기본 할인율은 정가 대비 50%다. 세부적인 할인률은 품목별로 다른데, 많게는 70~80%씩 싸게 파는 경우도 있다. 샤오미, 애플 등은 물론, 중국에 매장이 없는 코스트코·메이시스 등의 글로벌 유통기업들도 콧대를 낮추고 광군제에 참여한다. 이로 인해 외국 기업들이 얻는 수익도 짭짤하다. 특히 중국인들은 외국산 분유를 선호하는데, 지난해 광군제를 앞두고는 호주산 유기농 분유인 벨라미스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랜드·이마트·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등의 한국 브랜드도 광군제 하루 동안 제품 1,000만 개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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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군제는 철저하게 20~30대 젊은 소비자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구매력도 갖추고 있지만, 미혼인 '소황제(1980년대 한 자녀 정책 아래 태어난 외동아이들)'가 2억 명이 넘는다.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바로 광군제의 성공 비결이다. 주력 상품도 전자기기, 캐주얼 의류, 화장품, 유모차, 분유 등 젊은 층에 인기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올해 광군제는 판이 더욱 커졌다. 광군제를 주도하는 알리바바는 이미 올해의 목표를 지난해보다 5조 원 가량 늘린 20조 원으로 잡았다. '대륙이 쇼핑하는 날'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화장품·의류 업체들도 물량 확보 전쟁에 나섰다. ▶기사 더보기
추수감사절(11월 마지막 목요일) 다음날
'블랙'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 번째는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 동안(미국 블랙 프라이데이는 보통 단 하루가 아니라 11월 초부터 크리스마스 세일 시즌까지 이어진다) 회계 장부의 적자(빨강 잉크)가 흑자(검정 잉크)로 돌아서게 된다는 의미다. 블랙의 두 번째 의미는 세일 행사 다음 날 극심한 교통정체가 일어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24년 뉴욕의 대형 백화점인 메이시(Macy's) 백화점에서 추수감사절 다음 날 세일 행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에는 백화점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많은 사람이 쏟아져 들어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온라인 쇼핑몰의 발달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미국인은 블랙 프라이데이에 매장을 방문한다. 미국 소매협회는 지난해 추수감사절에는 3천만 명, 블랙 프라이데이에는 약 1억 명의 쇼핑객이 매장을 방문했다고 추산했다. 매장 개장 전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거나, 서로 싼 물건을 사기 위해 몸싸움을 하는 일도 매년 반복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매년 블랙 프라이데이에 수천 명이 부상을 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일각에선 '블프 회의론'도 나오고 있다. ▶관련기사
그러나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블프'는 온라인과 모바일 쇼퍼들에 힘입어 꾸준히 그 위상을 이어가는 중이다. 지난해 미국 '사이버먼데이'(블랙 프라이데이 다음 첫 월요일)의 온라인 쇼핑 거래액은 역대 최고치인 30억 달러(약 3조4700억 원)를 기록했다. '사이버먼데이'는 본래 플랙 프라이데이 이후 온라인 쇼핑몰들의 할인 행사를 뜻했지만, 최근에는 '블프'에도 온라인 쇼핑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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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도 손꼽아 기다리는 미국의 '블프'
매장에서는 육탄전이 벌어질지언정,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세계인의 '축제'가 열린다. 미국의 종합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 한국인이 좋아하는 의류 브랜드 갭, 폴로, 짐보리, 빅토리아 시크릿 등이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에 50%~90%가량 파격 세일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 브랜드의 가전제품도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에 더 싸게 살 수 있다. 지난해에는 국내 온라인몰에서 330만 원 하던 LG전자의 60인치 TV를 아마존에서 180여 만 원에 살 수 있었다.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의 가장 큰 장점은 평소 세일을 잘 하지 않는 가전제품과 명품 브랜드의 제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블랙 프라이데이에 직구로 제품을 구매할 생각이라면 조금 서두르는 것이 좋다. 블랙 프라이데이 시작 전 갖고 싶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뒀다가, 시작과 동시에 결제하는 것이 안전하다. 제품을 골라 장바구니에 넣는 동안 'sold out(품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의 시차도 고려해야 한다.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는 미국 시간으로 25일 자정에 시작하는데, 한국에서는 25일 오후 1시경에 해당한다. 직구가 처음이라면 전체적인 과정에 대해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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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박싱데이의 '박스(Box)'는 선물상자를 뜻한다.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물건을 상자에 포장해 줬다는 공통점이 있어 '박싱데이'라고 이름 붙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중세시대 영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크리스마스에도 일해야 했던 하인들에게 고용주가 26일에 휴가를 주고, 선물이나 남은 음식을 담은 박스를 준 것이 시작이다. 두 번째 설은 이 박스를 고용주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인들이 직접 갖고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용주는 박스 안에 특별 연말 수당을 넣어주었다. 마지막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에 모인 헌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설인데, 여기서 박스는 헌금 상자를 뜻한다. 유래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등장하는 '박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가난하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의미다.
영국에서 유래한 박싱데이는 현재 유럽 및 영국 연방 국가들에서 열리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캐나다·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서 박싱데이인 12월 26일은 공휴일이다. 나라별로 박싱데이 행사의 특징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스포츠 경기와 대대적인 세일 행사가 펼쳐진다. 명품 등을 50~70%가량 싸게 살 수 있는 박싱데이는 유럽인과 영연방 국가의 국민들이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날이기도 하다. 미국에도 박싱데이가 있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재고떨이' 세일의 성격이 강하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도 박싱데이에 경기한다?
오늘날의 박싱데이는 쇼핑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원래 영국에서는 이날이 '스포츠의 날'이었다. 여우 사냥을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점차 축구와 경마로 종목이 바뀌었다. 호주에서는 크리켓 경기가 열린다. 박싱데이의 전통 때문에 영국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은 겨울 휴식기를 갖지 못한 채,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주 3회 경기를 소화해야 한다. 선수들은 '미친 스케줄'이라고 매년 반발하고 있지만 이를 즐기는 시청자들은 즐겁기만 하다. 워싱턴포스트는 "박싱데이에 EPL 경기가 몰아서 열리는 이유는 크리스마스 주간에 주로 집에 머무는 영국인들 특성 상, TV 시청률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싱데이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선물을 주고 받는 영국인의 오랜 전통에서 시작됐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날이 아니라 자연스레 생겨난 문화인 셈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연방 국가에서도 박싱데이는 자연스럽게 공휴일로 자리 잡았고,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됐다. 새로운 해를 단 5일 남겨두고 열리는 박싱데이는 유통업체에게도 딱 좋은 시기다. 남은 재고를 처리하기 위한 파격적인 할인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10월경
다른 국가들의 쇼핑 축제가 주로 할인이 목적인 것에 비해, 코리아 세일 페스타는 세일, 관광, 문화체험 등이 혼합된 축제다. 때문에 행사 날짜도 중국인 관광객이 급증하는 중국의 국경절(10월 1일)에 맞춰 결정됐다. 'FESTA'는 본래 의미대로 '축제'를 의미함과 동시에, Festival(축제), Entertainment(한류), Shopping(쇼핑), Tour(관광), Attraction(즐길거리)라는 뜻도 갖는다. 올해 열린 코리아 세일 페스타는 33일간 3개의 테마(대규모 할인행사, 문화축제, 외국인 특별할인)로 진행됐다.
지난해 메르스로 침체된 소비 심리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를 벤치마킹해 기획했다. 시행 첫해인 작년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코리아 그랜드세일'과 내국인 대상의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가 구분돼 있었다. 그러나 올해부터 '코리아 세일 페스타'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되며 내·외국인을 아우르는 관광축제로 치러졌다.
중국의 국경절 연휴와 동시에 시작한 코리아 세일 페스타는 이 시기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명동에 있는 롯데면세점 본점과 인근 신세계면세점에는 일주일 새 중국인 관광객만 25만 명이 다녀갔다. 쇼핑백에 담배와 화장품을 가득 담고 맨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유커가 있는가 하면, 밥솥 네 개를 탑처럼 쌓아놓고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 이도 있었다. 쇼핑백 6개를 팔에 걸고 바삐 움직이는 여성도 있었다. ▶관련기사
면세점 북적이면 뭐하나… 전통시장은 '썰렁' 한국인은 '시큰둥'
그러나 면세점과 바로 이웃한 백화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일부 백화점 매장에서 20~30% 제품 할인을 하고 있었지만 이에 매력을 느끼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어차피 작년 이월 상품을 조금 싸게 파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세일 축제에 자국민들이 더 신이 나 열광하는 외국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다.
이번 코리아 세일 페스타에는 전국 400여 개의 전통시장도 참여했지만, 이것 역시 몸으로 체감하기 어려웠다. 서울의 대표 전통시장인 남대문시장은 오히려 축제가 끝난 뒤 문을 닫는 점포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상인들은 "축제 기간 손님이 많지 않았고, 수입도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푸념했다. 이런 와중에 중소기업청에서 '전통시장의 평균 매출이 18.5% 늘었다'는 엉터리 설문조사를 발표해 빈축을 산 일도 있었다. 청와대에서 코리아 세일 페스타를 언급하자 성과 보여주기에 급급해 나온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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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전부터 '한국판 블프'로 떠들썩했던 코리아 세일 페스타가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세일 축제의 필수 요건인 '파격 할인'이 없다는 점이다. 미끼상품인 몇몇 '노마진' 제품을 제외하고는 할인 폭이 20~30%대에 머문다. 반면, 한국이 벤치마킹했다는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는 평균 할인율이 68%(지난해 기준)에 달한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 백화점의 모든 매장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할인 폭이 크지 않다 보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반드시 코리아 세일 페스타 기간에 물건을 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세일 많이 하는 나라'로도 유명하다. 작년 한 해 동안 국내 백화점이 세일한 기간은 100일이 이상, 사흘에 하루꼴이었다. 굳이 코리아 세일 페스타를 기다리지 않아도 언제든 할인된 물건을 살 수 있는 셈이다. ▶관련기사
일부 유통업계에서는 한국 유통업체들이 파격 세일을 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기도 한다. 국내의 백화점은 입점업체들에 장소를 빌려주고 수수료를 받는 임대업 성격이 강한데, 수수료를 내야 하는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파격 할인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는 올해로 두 돌을 맞았다. 아직 성공과 실패를 단정 짓기에 이른 시기임은 맞다. 그러나 한국에서 열리는 쇼핑 축제가 2년째 중국인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있는 건 안타깝다. 내년부터는 일본에서도 블랙 프라이데이가 도입될 예정이라고 한다. 3주년을 맞는 우리의 '블프'는 두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의 쇼핑 축제 사이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