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연구는 그 사람의 일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조선시대 중요 인물은 실록 등 관찬(官撰) 자료에 주요 행적이 담겨 있는데 대부분 전산화돼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이점입니다. 우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정약용을 통해 인물 연구의 모범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역사학계에서 다산 정약용 연구의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조성을(60) 아주대 교수가 정약용(1762~1836)의 생애를 거의 일기(日記) 수준으로 꼼꼼히 재구성한 '연보로 본 다산 정약용'(지식산업사)을 펴냈다. 83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에서 조 교수는 다산의 생애를 유년·수학기, 사환(仕宦)기, 유배기, 해배(解配) 이후로 나눠 책의 부제처럼 '샅샅이 파헤치고' 있다. 다산에 관한 기본 연대기, 다산의 저술과 서한문, 실록과 승정원일기, 관련 인사들의 문집 등을 망라하며 다산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이런 작업을 통해 다산의 동선을 거의 매일 따라가면서 그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고 어떤 책을 읽고 무슨 글을 썼는지를 거의 완벽하게 알 수 있다.
조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한국사로 방향을 돌렸다. 국사학계의 태두(泰斗)인 김용섭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정약용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저서 '여유당집의 문헌학적 연구'(2004년)와 20여 편의 다산 관련 논문을 썼다.
조성을 교수는 다산의 생애에서 특히 강진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의 학문적 발전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산의 개혁사상은 곡산부사로 부임했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30대 말에 기본 틀이 잡혔고,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유배돼 유교 경전을 연구하면서 심화됐다. 하지만 혼자서 발전시켜가던 그의 학문은 고향(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으로 돌아와 근기(近畿) 지역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완성됐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일제시대 다산을 연구했던 최익한이 이런 다산의 만년 변화에 주목했고, 그런 관점에서 다산의 저작 목록을 만든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다산과 서학(西學)의 관련도 주목의 대상이다. 다산은 젊은 시절 남인 학자들과 함께 서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1801년 신유박해 때 서학과의 관련을 공식 부인했다. 하지만 천주교계 일각에서는 다산이 세상을 떠나기 전 다시 서교(西敎)로 돌아왔다고 주장한다. 조 교수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었다"며 "다산이 서학의 영향을 일부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유학자였다"고 말했다.
조성을 교수는 다산이 만년에 몰두했던 '상서(尙書)' 연구와 예학(禮學) 등에 관한 문헌을 정리해 단행본으로 간행하고, 이어 박사 논문을 전면 개작한 '정약용의 개혁사상'을 출간할 예정이다. 조 교수는 "정약용에 관한 3부작을 통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 실학의 역사적 특성을 밝혀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