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그와 적대 관계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구해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행여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괜한 참견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범죄와 사고 현장을 모른 척 돌아서는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타인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관한 논의와 우리 사회의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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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처한 사람, 나몰라라 하는 세상
택시기사가 운전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졌는데 택시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119에 구급 신고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대전 둔산경찰서에 따르면, 8월 25일 오전 8시 40분쯤 대전 서구 한 도로에서 승객 2명을 태우고 쏘나타 택시를 몰던 A(63)씨가 갑자기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다. 몸이 마비 증상이 온 A씨는 핸들 조작을 하지 했고, 결국 택시는 주변을 지나던 차량을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사고 현장을 본 목격자가 구급신고를 했고, 119구급대원이 출동했다. A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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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0일 오후 10시 25분쯤 서울 동작구 공군회관 앞 도로에서 택시 기사 A(62)씨가 운전 중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A씨는 의식을 잃기 직전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택시는 아주 느린 속도로 중앙선을 넘었고 반대편 차선에 정차해 있던 김모(43)씨의 차량에 살짝 닿은 뒤에야 멈췄다.
깜짝 놀란 김씨가 차에서 내려 택시로 다가가는 순간 뒤에 타고 있던 승객이 차 문을 열고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택시 기사는 의식을 잃고 운전석에 쓰러져 있었다. 김씨 신고를 받고 경찰과 119 구급대가 출동했지만, 이미 택시 기사는 숨진 뒤였다. 사인(死因)은 지병인 심장 이상으로 인한 호흡곤란이었다.
이 같은 외면 풍조가 확산되는 것은 남을 돕다가 자신이 괜히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60대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61명이 '범행을 목격해도 돕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나도 위험에 빠질까 봐'란 응답이 47.5%(29명)로 가장 많았다. '가해자로 몰리거나 경찰 조사로 귀찮아질까 봐'라는 응답도 35.7%(25명)였다.
덴마크와 이탈리아는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 것이 입증되면 3개월 이하의 구류에 처하고 있다. 독일, 그리스 등은 1년 이하의 징역, 프랑스는 5년 이하의 징역형을 내린다. 이런 조항을 유럽에선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런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사 더보기] 사람이 맞고 있어도 못본 척… 모르는 척]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법으로?
최근 벌어진 사건들은 유럽 국가들처럼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만들자는 논의로 이어졌다. 새누리당 박성종 의원은 '구조 불이행 죄'라는 이름으로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구하지 않은 이를 처벌하도록 하는 법안을 8월 발의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은 도덕의 영역이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것은 이를 법의 영역에 두겠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도덕을 법으로 구속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에 대한 논란을 불러왔다.
찬성하는 쪽은 앞서 나온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날이 늘어나는 범죄와 사고에 대비해 사회 연대의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감수성이 무뎌진 현대 사회에서 최소한의 구조 의무를 두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범죄와 생명에 대한 책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법이 시행되면 공권력의 투입없이도 사회의 안전망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도덕의 영역을 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법 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조 의무'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도와주지 않는 행위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것인데, 단지 위협에 처한 사람 곁에 있었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지나친 규제라는 입장이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았을 때 윤리적 비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곁에 있었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가혹하다. 또한 '위험에 처한 상황'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상황을 목격한 이가 판단했을 때 괜찮아보여 지나쳤지만 후에 절박한 상황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처벌을 받는다면, 이에 대한 진실성과 기준이 논란으로 번질 것이다.
법과 윤리의 영역, 기준의 모호성, 개인의 자유 침해 등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은 여러 쟁점들을 안고 있어 앞으로 논의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이들이 법을 만들자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개인의 윤리 영역에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대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이런 현실 속에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위험해질 것을 알고도 이웃을 도와주는 '착한 사마리아인'들도 존재한다.
검은 불길 속 내려온 '한줄기 동아줄' 의정부 의인 이승선 씨
2015년 1월 10일 오전 9시 30분쯤 경기 의정부시 10층짜리 대봉그린아파트 1층에서 난 불이 위층으로 번졌다. 불길은 바로 옆 드림타운 아파트로도 옮아 붙고 있었다. 두 아파트 사이의 폭 1.6m 골목길. 그곳에서 올려다보이는 대봉그린 3층 창문에 20대 여성 2명과 남성 1명이 "살려달라"며 매달려 있었다.
지상에 있던 한 남성이 가스배관을 타고 올랐다. 그는 둥글게 사린 밧줄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3층을 지나 4층 가스배관에 밧줄을 묶어 고정시킨 그는 밧줄을 타고 3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밧줄 반대편 끝을 사람 몸통 정도로 동그랗게 묶어 한 명씩 고정시킨 뒤 천천히 1층으로 내려보냈다. 그는 밧줄을 두 팔로 잡고 창문턱에 발을 대고 버텼다. 그렇게 3명을 모두 내려보내느라 손아귀에 맥이 빠져버린 그의 귀에 다시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6층과 7층, 8층에 사람이 있었다.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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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구하고 홀연히 떠난 '부산 사나이들'부산 시민 11人
지난 9월 부산의 곰내터널에서 어린이집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어린이들은 안전벨트를 모두 착용하고 있어 큰 부상은 없었지만, 뒤집힌 버스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를 지나가고 있던 다른 운전자 10여명은 사고가 나자 모두 차량에서 내려 유치원 버스로 달려왔다.
버스가 오른쪽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출입문이 바닥에 깔려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된 아이들이 차 안에서 우는 것을 발견한 시민들은 서둘러 구조를 시도했다. 이들은 각자의 차량에서 망치와 골프채 등을 가져와 버스 뒷유리를 조심스럽게 부수고, 유치원생 21명과 보육교사, 운전사를 차례로 구조했다. 이들은 아이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기도 했다.
이들은 교사와 함께 아이들이 모두 구조됐는지를 확인한 뒤 아이들을 갓길에 안전하게 옮겨 놓고 사고 현장을 떠났다.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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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값지게 쓰인 성우지망생의 마지막 목소리초인종 의인 안치범 씨
불이 난 5층 건물에 뛰어든 후 자고 있던 주민들을 깨워 탈출시킨 뒤 쓰러진 20대 청년이 11일 만에 끝내 숨졌다.
9월 9일 오전 4시 20분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5층짜리 건물에 큰 불이 났다.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에 분노한 20대 남성이 홧김에 지른 불이었다.
불이 나자 이 건물 4층에 살던 안치범 씨는 탈출한 뒤 119에 신고하고 다시 연기로 가득 찬 건물로 뛰어들었다. 불이 난 사실을 모른 채 잠든 다른 주민들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안씨의 이웃들은 경찰에서 "새벽에 자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나오세요'라고 외쳐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안 씨 덕분에 원룸 21개가 있는 이 건물에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안씨는 건물 5층 옥상 입구 부근에서 유독 가스에 질식해 쓰러진 채 발견됐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9월 20일 오전 사망했다. 경찰 관계자는 "신고를 마친 안씨가 건물을 수차례 올려보다 다시 건물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고 말했다.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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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윤리 교육'화염 속 버스서 부상자 구한 윤리교사 소현섭 씨
10월 13일 밤 19명의 사상자를 낸 관광버스 참사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긴 사람이 있다. 동해 묵호고의 윤리교사인 소현섭 씨는 자신의 승용차로 경부고속도로 언양 IC 부근을 가고 있을 무렵 70m 앞 지점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차선 분리대를 들이받은 버스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사고 버스에서 기름이 흘러나오면서 도로에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자칫 버스가 폭발할 수 있어 현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쉽사리 승객 구조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소씨는 곧바로 1차로에 자가용을 세우고 사고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소씨는 "불길이 너무 커 무서웠지만,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을 구조하겠다는 생각에 달려들었다"고 했다.
소씨는 119구조대에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다. 그 뒤 버스에 남은 승객을 구조하기 위해 유리창을 깨던 시민을 도왔다. 이런 구조 활동에 일부 승객은 버스에서 탈출했지만 다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소씨는 사고로 고속도로가 막혀 구급차가 늦게 도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고 한다. 그는 급히 자기 차량에 출혈 등으로 생명에 위협을 받는 부상자 4명을 태워 울산의 병원으로 이동했다. 소씨는 울산 지리를 몰랐지만 119에 전화를 걸어 병원 위치를 파악해, 울산의 한 병원으로 환자들을 옮겼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직업만 밝힌 채 자리를 떠났다.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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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려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의 문제에 가깝다.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 주변에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려운 이를 향하는 도움의 손길이 법의 테두리보다 선의 안에서 이뤄지는 사회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