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중견 기업에 입사한 박세훈(30)씨는 옷장만 열면 한숨이 난다. '자유복 출근' 방침에 맞춰 대학 시절 입던 캐주얼 의류를 입고 다니는데 영 직장인 '태(態)'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급 정장을 입기도 뭣하다. 외근 나갈 때마다 면접용으로 장만했던 모 100% 정장을 입지만 옷이 망가질까 봐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장만한 게 '전투용 정장'이다. "교복처럼 매일 입고 다녀도 별로 티 나지 않을 실용적인 옷이 필요했어요. 가격과 혼용률, 촉감 같은 착용 후기를 블로그나 카페에 꼼꼼히 올린 사람이 많아 정보를 얻었죠."

최근 사회 초년생이나 실속파 직장인 사이에서 '전투용 정장'이란 용어가 유행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인 '디젤 매니아'나 '무신사' 같은 곳엔 '전투용 정장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의 글이 하루에도 몇 건씩 올라온다. 격식은 기본, 저렴하면서도 언제든 마음 편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정장을 뜻한다. 가격은 10만원에서 20만원대 초반. 주로 모(毛)와 폴리에스테르 혼방 소재로 구김이 적고 자주 빨아도 옷감 변형이 덜하다. 활동하기 편하게 스트레치성 있고, 슬림핏(fit) 투버튼 스타일에 네이비나 차콜 그레이(진회색)로 된 솔리드(단색) 상·하의 제품이 가장 인기가 높다.

그래픽=김현지 기자

20~30대 소비자들은 "눈·비, 회식·땀냄새에 강해 막 입어도 되는 옷"이라고 정의한다. '전투용 정장' 인기에 맞춰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것) 좋은 '전투화(신사용 구두)' '전투용 벨트'를 찾기도 한다. 전투에서 '총알'이 필요한 것처럼 돈 단위도 '만원' 대신 '발'이 주로 쓰인다. 가성비 좋게 잘 산 것인지 커뮤니티 회원들에게 확인받기 위해 '치킨승(勝)'이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치킨승이란 '그 돈이면 치킨을 사 먹는 게 낫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모 35·폴리 65. 네이비 솔리드 15발 구입 예정. 치킨승인가요?"라는 식이다.

아웃렛이나 온라인몰에서 역시즌·이월 상품 특별전을 하면 커뮤니티를 통해 빠르게 정보가 전달된다. 원단 느낌이나 착용감을 알기 어려워 슈트는 온라인 인기 상품이 아니었지만 상시 할인이나 쿠폰 때문에 오프라인보다 10~20%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 고객이 늘고 있다. 온라인 큐레이션(선별해 보여주는 것) 쇼핑몰 G9 조사 결과, 취업 시즌에 맞춰 젊은 층의 정장 구매가 몰리면서 9월 기준 브랜드 정장 매출이 전년 대비 89% 증가했다. TNGT·지이크·지오지아 같은 브랜드 선호도가 높은데 TNGT의 일명 '박보검 정장' 가을·겨울 신제품은 온라인 LF몰에서 10만원대 후반부터 구매할 수 있다.

싸고 활동성 있는 슈트를 찾는 이들이 늘면서 '초저가 슈트 시장'도 형성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으로 유명한 부림광덕의 슈트 전문 브랜드 '젠'이 지난해 내놓은 9만8000원짜리 양복이 대표적. 롯데백화점은 지난 9월 2일 안양점·중동점 등 백화점 4개 점포에 정장 SPA(제조·유통 일괄) 브랜드 '맨잇슈트' 매장을 열었는데 지난 한 달 동안 각 점포의 정장 상품군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매장이 됐다. 가격은 9만8000원부터. 주요 구매층은 20~30대. 매장을 방문하는 남성 고객 중 백화점을 처음 이용하는 고객이 25%나 됐다. 롯데백화점 남성스포츠부문 김필수 수석바이어는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정보력으로 무장한 2030 젊은 남성의 저가형 정장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무조건 싸다고 '전투용 정장'이 되는 건 아니다. 각종 커뮤니티에선 "싼 맛에 샀더니 광택이나 소재에서 싸구려 티가 심하게 났다" "의류 수거함에서 주워온 것 같다는 소리 들었다"는 불만도 눈에 띈다. 쇼핑몰 G9의 신현호 패션팀장은 "모 함유량이 많을수록 좋고, 라이크라 스트레치 소재가 신축성이 뛰어나고 원상 회복력을 지니고 있어서 덜 늘어지고 망가지는 현상이 적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