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요?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친구죠."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진형준(27)씨 일상에 변화가 온 건 4년 전이다. 조금 피곤하다 싶었는데 진단 결과 급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그해 말 골수 이식을 받았지만 재발했다. "우울증이 밀려들었죠. 이러다 정신을 놓을 것 같았어요. 그때 레고를 손에 잡게 됐습니다."

레고 동호회 브릭스월드 회원들이 경기도 남양주시 작업장에 모여 창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진형준·노희준·이준승·정승복·하승범·이준하·이주성·원정식씨

병상에서 하나 둘 쌓아올린 레고 작품을 인터넷 레고 커뮤니티에 올렸다. "멋있다" "또 보여달라"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응원글이 하나 둘 올라올 때마다 큰 위안이 됐다. 두 번째 골수이식을 받은 이듬해 브릭코리아컨벤션에 '사진기' 작품을 출품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는데, 레고만큼은 아니었어요. 내가 상상하는 그대로 손안에서 구현이 됐지요. '살아야겠다'는 생의 욕구가 솟았지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닌데 레고가 세상과 다리를 놓아줬어요." 그가 레고로 만든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내 레고 전문지 '크리에이터'의 커버 스토리에 올랐다.

건축설계사로 일하는 이재원(36)씨는 지난 5월 덴마크 레고 본사에 초청됐다. 취미로 페이스북에 올린 레고 작품들에 팬들이 모이면서 해외에서도 소문이 났다. 레고 본사에 포트폴리오를 올려보라는 외국 친구들 이야기에 용기를 냈다. "레고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레고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환상이 있거든요. 상상 속 일이 현실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본사에서 인터뷰하자고 연락이 온 거예요. 한국에선 유일했죠. 최종 워크숍을 통과하진 못했지만 모든 게 꿈같고 마냥 좋았습니다." 그는 레고 팬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레고를 접하게 됐다. 중·고등학교 땐 비싸서 엄두를 못 냈지만, 직장을 잡고 여유가 생기면서 레고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동호회인 '브릭팀 코리아'에 속해 대형 창작품도 만든다. "놀면서 꿈에 다가가는 거죠. 이런 게 진짜 제대로 노는 거 아닐까요?"

진형준씨가 레고로 만든 사진기

'LEG GOGT.' 덴마크어로 '재미있게 놀다'라는 뜻에서 탄생한 'LEGO'. 단순한 직육면체의 브릭(brick)을 겹쳐 쌓는 유아용 '장난감'으로 출발한 레고가 한국의 어른아이, 키덜트족을 흔들어놓고 있다. 평범한 '아재'들이지만, 희귀한 아이템을 모으는 컬렉터에서 창작품을 만들어 전시회까지 여는 레고 아티스트로도 등극했다. 마니아들은 그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한다. "레고 세상에선 내가 신(神)이거든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대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말 그대로 '잘 노는(play well)' 레고의 정신이 손과 시간, 땀, 몰입 등을 통해 구현된다. 일상 탈출이다. 평범한 주인공이 창의력을 발휘해 매뉴얼에 갇힌 세상을 구하는 영화 '레고무비'(2014)의 주제가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하다. 'Everything is Awesome!'(모든 것이 멋져!)

레고가 어른들 마음을 사로잡는 건 정형화된 규격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자유로움 때문이다. 가로 네 줄, 세로 두 줄짜리 브릭 2개면 24가지 방식으로 조립이 가능하고, 블록 6개면 9억1510만3765가지 형태를 만들어 변화를 줄 수 있다. 성인을 겨냥해 ‘크리에이터’ ‘아키텍처’ 등 복잡한 설계의 제품군을 내놓으면서 성취욕을 자극하고, 창작품 전시회를 적극 열면서 ‘브릭 아티스트(레고 예술가)’라는 직업도 만들어냈다.

국내 레고 동호회원은 15만명 정도. 브릭랜드, 브릭나라, 브릭인사이드, 브릭스월드, 레고당 등 회원 상당수도 30~40대 정도로 파악된다. 탤런트 지진희는 레고 VIP 카드를 갖고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마니아로 꼽히고, 야구선수 추신수와 배우 신하균, 가수 케이윌 역시 레고가 취미다. 구글의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가 레고 열성팬이란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구글 로고에 사용되는 빨강·파랑·노랑의 3원색은 레고의 기본 블록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 같은 ‘덕후’ 문화라도 골방에 갇혀 남몰래 즐기는 것보다는 아이디어를 뽐내고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이자 레고 아티스트인 애덤 리드 터커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전 세계 13명뿐인 레고 공인 전문가(Lego Certified Professional) 중 하나로 그가 디자인한 아키텍처 시리즈도 발매되고 있다.

“나는 레고 아티스트다”

지난 6월 국내 출간된 ‘나는 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원제 The Art of the Brick: A Life in LEGO)’를 쓴 네이선 사와야가 대표적이다. 잘나가던 뉴욕 변호사였던 그는 연결하고 재조합해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레고에서 인생을 읽고 브릭 아티스트로 변신했다. 사와야와 함께 레고에서 인정한 13명의 ‘프로페셔널’ 중 하나로 꼽히는 애덤 리드 터커는 전 세계 마천루 빌딩과 랜드마크를 재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그의 작품 ‘브릭 바이 브릭’이 시카고 과학산업 박물관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경제 전문지 포천은 “디지털 디자인 소프트웨어로 제품 디자인을 해볼 수 있게해 창작 욕구를 자극한다든지 일하는 엄마, 주부 아빠 같이 사회성을 반영한 피규어를 내놓는 등 어른들 세계를 폭넓게 겨냥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동호회 브릭인사이드에서 활동하는 김학진(41)씨는 레고 작가로 이미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레고 19년 차로, 대학 시절 건축 모형을 고민하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레고를 떠올려 작품을 구상하면서 레고를 다시 시작하게 됐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스팀펑크 아트전(2014년)에 출품작을 선보였다.

국내 매장을 돌며 제품 수집은 기본. 개인 간 레고 거래 사이트로 전 세계 최대 규모인 ‘브릭링크’를 통해 제품이나 희귀 부품을 구하면서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레고 경력 25년 차인 하승범(31)씨는 “설계도가 있지만 정답이 없는 것이 레고의 매력”이라며 “부품을 구하는 것도 하나의 예술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와, 아내와 함께 만든다”

게임회사 개발자 박치훈(41)씨도 레고 마니아다. 1999년부터 레고사가 발매하기 시작한 스타워즈 시리즈를 접한 이후 하나 둘씩 모았던 것이 지금은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대사관 무관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호주에 살면서 일곱 살 때 본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5―제국의 역습’은 그야말로 ‘인생작’이었다. “인생관을 세워준 작품을 레고를 통해 내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며 “다섯 살 아들이 영화 대사를 하면서 레고 작품을 만드는 걸 보니까 더 뿌듯하다”고 했다. 그는 “혼자서 즐기는 모터사이클 개조, 카메라 렌즈 수집이 취미였을 땐 아내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면서 “레고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만들 수 있어 가족의 취미가 됐다”고 말했다. 머릿속으로 구상했던 모습을 현실화하면서 짜릿한 ‘손맛’도 느낀단다. ‘서울역’이란 창작품으로 팬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노희준(41)씨는 “레고 사는 돈을 모으기 위해 술·담배를 끊는 친구도 굉장히 많다”며 웃었다.

레고를 함께 만들며 여자 친구도 사귀게 됐다는 정승복(29)씨는 ‘스타벅스’라는 창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국내 블록 완구업체 옥스포드에 입사했다. “레고 홈페이지에 레고 아이디어즈(Lego Ideas)라는 코너가 있는데 거기서 유저들에게 1만 표 이상 얻으면 레고사에서 제품화를 검토하거든요. ‘스타벅스’가 1만 표 가까이 받으면서 알아봐 주는 분이 많아지더라고요.”

레고 수집가 박치훈씨가 자신의 컬렉션 ‘일부’를 공개했다. 최근 이사했다는 그는 가장 먼저 ‘레고 장식장’을 새로 장만했다고 한다.

회사 교육용으로도 쓰이는 레고

자발적인 충성 고객들의 창의력은 오늘의 레고를 만든 핵심 동력이다. 레고가 특별 관리하는 13명의 ‘레고 프로페셔널’을 비롯해 레고 본사 소속 디자이너는 120여명이지만 온라인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열성 디자이너들이 12만명에 달한다. 미국 와튼스쿨 데이비드 로버트슨 교수의 저서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를 보면 조립하는 로봇 ‘마인드스톰’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프로그램이 해킹당하자 오히려 소스를 공개해 개조를 장려했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된 셈이다. 레고 동호회는 일반적으로 LUG(Lego User Group)라고 부르는데, 레고사는 이들을 자사 기준에 맞춰 심사한 뒤 RLUG(Recognized Lego User Group)라고 인증해 활동을 지원한다. 전 세계 200여 개 정도로 파악되며 현재 우리나라엔 11개가 있다. 레고 성인 팬들은 AFOL(Adult Fan of Lego)이라고 칭하며 레고 홍보대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협업’을 통해 대작을 선보이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레고의 성인 팬층도 두꺼워지고 있다. 창작팀 ‘브릭팀코리아’에 소속돼 활동하는 사진가 정운현(39)씨는 “팀 단위로 이뤄지는 대형 디오라마(실제 풍경이나 역사 장면 같은 상황을 모형으로 제작 설치해 놓은 것) 작품의 경우엔 8~9명이 함께 구상하고 완성하기까지 한 달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며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배워가면서 협업의 힘을 느낀다”고 말했다. 소속팀 평균 나이는 40세. 정씨는 “레고는 손으로 만드는 3D 그림”이라며 “창작자를 위한 무대가 늘어나는 것도 성인 팬을 모은다”고 말했다.

CJ 등 국내 대기업에서 자기표현 워크숍 교육용으로 레고를 이용하기도 한다. 국내 유명 디자인 회사인 PXD의 경우 레고를 통해 창의력을 키우는 훈련을 수시로 하고 회사 홈페이지에도 레고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올린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교수는 “쉽게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리더십이나 문제해결 능력을 알아보거나 자기를 표현해내는 교육용 도구로도 주목받는다”면서 “취미에서 벗어나,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아티스트가 등장하거나 교육적 효과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뤄지면서 ‘레고덕후’를 ‘전문가’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