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 기자

지난 2000년 11월 경기 가평 인근 야산에서 장의사 부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강모(47)씨가 필리핀 세부에서 16년 만에 붙잡혀 지난 21일 국내로 송환됐다. 서울 마포경찰서는 강씨를 지난 26일 검찰에 송치했다. 도피 사범이 많은 필리핀에서 끈질기게 살인범을 추적해 온 한국 경찰의 성과였다.

살인 사건 후 증발한 용의자

폭력·절도 등 전과 6범인 강씨는 1999년 출소했다. 강씨는 경기 남양주 일대 유흥업소와 도박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도소에서 알게 된 이모(49)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씨는 "1000만원을 줄 테니 나를 좀 도와달라"며 강씨를 불러냈다. 앞서 이씨는 장의사 조모(당시 39세)씨 부부에게 병원 영안실 운영권을 따주겠다고 속여 1억1000만원을 가로챘다. 사기 행각이 드러나자 이씨는 조씨 부부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강씨를 범행에 끌어들였다. 조씨 부부가 실종된 지 사흘 만에 경기 가평의 한 야산에서 시신이 발견됐고, 그로부터 사흘 뒤 이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됐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피해자 조씨보다 체구가 작은 이씨 혼자 조씨 부부 둘을 살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본 경찰은 공범으로 강씨를 지목했다. 강씨가 직접 경기도의 한 철물점에서 범행에 쓰인 흉기를 구입한 사실도 확인했다. 범행 직전 강씨와 이씨가 함께 안마 시술소에 들렀다가 술집으로 향한 모습도 목격됐다. 경찰의 거듭된 추궁 끝에 이씨는 공범 강씨가 있음을 자백했다. 이씨는 2001년 4월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하지만 강씨의 행방이 묘연했다. 강씨의 휴대폰 기록은 범행 현장 가까운 곳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뒤 끊겼다. 경찰은 강씨 가족을 통해 자백을 권유했다. 부산에서 강씨를 목격했다는 제보도 있었지만 몇 개월 지나자 국내에서 강씨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은 강씨가 해외로 도피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외 도피 사범 명단에 강씨 이름을 올렸다. 그 후 그의 이름은 16년 동안 묻혀 있었다.

세부에 숨은 조용한 이방인

강씨는 범행 직후 부산으로 가서 생활하다 6개월쯤 뒤에 밀항을 시도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부산항에서 소형 선박을 탄 강씨는 공해상에서 태국으로 가는 화물선으로 갈아탔다. 태국에서 다시 필리핀으로 가는 배에 오른 강씨는 육지가 가까워 오자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주장했다. 그가 헤엄쳐서 닿은 곳은 필리핀 민다나오섬 북부에 위치한 카가얀데오로. 그 후 강씨는 마닐라와 세부를 오가며 도피 생활을 하다 2013년쯤부터 세부에 눌러앉았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강씨 진술에 신빙성이 적다고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태국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다면 가까운 라오스나 캄보디아로 가는 게 일반적"이라며 "강씨가 남의 여권을 이용해 비행기로 밀입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세부 교민 사회에 따르면 강씨는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녀 행색이 추레했고 교민 사회와의 접촉은 적었다. 세부에 6년째 거주 중인 교민 A씨는 "강씨가 한국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반복됐다면 이미 입에 몇 번을 오르내렸을 것"이라며 "카지노 다니는 사람들이나 몇 번 마주쳤던 것 같다"고 했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던 강씨는 지인들이 사는 세부 인근의 작은 섬들을 전전했다. 주로 도박업자 등과 어울려 다니며 불법과 합법 경계에 있는 일들을 했다고 한다. 현지에서 친분을 쌓은 사람들에게 얹혀살거나 일하는 식당에 딸린 쪽방에서 몇 주씩 지내다 옮기는 생활이 이어졌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는 모바일 채팅 등을 통해 이따금 연락을 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가 16년 만에 다시 경찰 추적을 받게 된 것은 올해 4월 세부에 한국 경찰인 '코리안데스크' 심성원(39) 경감이 새로 파견되면서부터다. 10년 전인 2006년쯤에도 "세부에 살인자가 살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으나 당시엔 수많은 국외 도피 사범 중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교민 사회 일부에 "강씨가 도피 중인 강력범"이라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고 곧 심 경감 귀에도 들어갔다.

심 경감은 세부 주재관으로 있는 이용상(42) 경정과 함께 지난 5월부터 강씨의 행적을 쫓았다. 강씨는 가명(假名)을 쓰고 있었지만 20명 넘게 탐문을 한 두 경찰관은 가명을 쓰는 강씨가 국외 도피 사범 명단에 있는 살인 피의자 강씨와 일치하는 인물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강씨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당최 알 수 없었다. "세부섬 북쪽 외곽에 있다더라" "올랑고섬에 배 타고 들어가 방을 얻어 생활한다더라" 등 엇갈리는 정보가 난무했다. 강씨의 보복이 두려운 몇몇은 입을 굳게 닫았다.

16년 만에 막 내린 도피 생활

탐문을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자 포위망이 좁혀졌다. 강씨가 묵고 있던 콘도도 확보됐다. 강씨가 막탄섬에 있는 S콘도 606호에 묵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심 경감은 8월 4일 밤 강씨가 묵고 있다는 콘도에 찾아가 "강씨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다"며 사전 답사를 했다. 콘도 직원은 강씨 사진을 가리키며 "606호가 아닌 604호에 있다"고 했다. "강씨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도 들려왔다.

사건은 긴박해졌다. 다음 날인 8월 5일 오후 필리핀 이민청 직원과 현지 경찰 10여 명은 M16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강씨가 묵는 콘도 604호를 급습했다. 한국 경찰이 필리핀에서 직접 강씨를 검거할 수 없기 때문에, 심 경감의 요청을 받은 필리핀 이민청이 현지 경찰과 협조해 불법 체류 중인 강씨를 검거한 것이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던 강씨는 순식간에 제압됐다. 그는 아는 사람이 묵고 있던 월 1만페소(약 22만원)짜리 원룸식 콘도에 얹혀살고 있었다.

당시 검거 현장에 있던 경찰은 "강씨가 오랜 도피 생활에 지쳐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강씨는 읊조리듯 "죽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 시켜서 했다. 죗값은 달게 받겠다"며 범행 사실을 시인했다고 한다. 또 "이씨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며 공범 이씨를 원망하기도 했다. 강씨는 이후 강제 추방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필리핀에 구금돼 있다가 지난 21일 한국 경찰에 인계돼 국내로 들어왔다. 하지만 강씨는 국내 송환 뒤 태도를 바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지난 23일 서울 서부지법에서 열린 영장 실질심사에서 강씨는 "산에 올라갈 때는 4명이었지만 내려올 땐 (이씨와) 2명이 왔다"며 "나는 야산까지 운전만 하고 자동차 안에서 이씨의 범행을 지켜보기만 했다"고 주장했다. 경찰 관계자는 "강씨와 함께 장의사 부부를 살해했다고 한 공범 이씨의 진술이 믿을 만하고 이씨가 사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강씨가 혐의를 부인해도 중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올해 6월까지 불구속 기소된 상태에서 필리핀으로 도피한 사범은 219명이다. 전체 국외 도피 사범(2373명)의 10%에 달하며 미국, 중국에 이어 셋째로 많다. 김병주 경찰청 인터폴 계장은 "필리핀에는 크고 작은 섬이 많아 숨어 살기 좋고 치안 상태가 불안해 특히 강력범이 잘 도피하는 곳"이라며 "거주 비용이 저렴하고 한국과 가까운 것도 도피 사범들이 필리핀을 선호하는 이유"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