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독일 본 의과대학 종신교수는 “독일 의학계는 경쟁자를 팔꿈치로 밀고 앞으로 나아가는 약육강식의 사회”라고 말했다. 그의 팔꿈치가 여전히 단단해보였다. 작은 사진은 이 교수가 1960년대에 독일 의대에서 연구 중인 모습.

'차붐'이 축구선수로 돌풍을 일으키기 전,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은 '종수 리'였다. 이종수(87) 독일 본 의과대학 종신교수는 1969년 유럽 최초로 간 이식수술에 성공했다. 간 보존액도 개발해 세계 최초로 간을 헬기로 공수해 이식 수술을 했다. 그 공로로 1975년 본 의과대학 종신교수가 됐다. 당시 서독 수도 본의 의과대학은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독일 의대에서 동양인이 종신교수가 된 건 그가 처음이다.

독일 의대에서 종신교수는 '왕'에 비유된다. 각 과에서 한 명만 배출되며, 형법을 어기지 않는 이상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정부가 지위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해당 과의 인사와 재정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1959년 이 교수가 30세 나이로 독일에 유학 갔을 때 독일인 누구도 그가 '왕'이 될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아시아에서 온 "작은 놈(Kleine Kerl)"으로 통했다. 이 교수는 차별과 멸시를 받을 때마다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학문으로 라인강을 넘어 세계를 지배하겠다."

일본 학술대회 참석하는 길에 잠시 방한한 그를 지난 28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이 교수는 "노벨의학상을 못 받았으니 내 꿈의 한 편만 이뤄졌다"고 했다. 이 교수는 올해 87세인데도 매년 유럽과 아시아로 수차례 해외 출장을 다닌다.

―지금도 매일 출근하신다고요.

"본 대학 간질환연구소 소장으로 있습니다. 거의 매일 일하는데, 오전 7시 30분쯤 출근해서 오후 9시에 퇴근합니다."

―건강 비결이 뭔가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커피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진한 커피 두 잔을 꼭 마십니다. 속이 쓰릴 땐 우유를 타고요. 커피는 간 보호와 당뇨병 예방, 치매 예방도 해줍니다. 다른 하나는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저는 아침에 아무리 피곤해도 정시에 출근하려 합니다. 늙어서 일손을 놔버리면 끝나는 겁니다."

―고령이니 아플 때도 있을 텐데요.

"아파도 아픈 티를 안 냈습니다. 독일 사회는 배타적인 면이 강해요. 제가 아프다고 소문이 나면 빨리 내보내려고 할 겁니다. 저는 제가 소속된 본 의대에서 한 번도 진찰을 받은 적이 없지요."

▲이종수 교수 제공

30세에 가족 두고 혼자 독일 유학

―원래 고교 수학 교사였다면서요.

"1929년 전남 영암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장학금을 주는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적어도 중학교 교사라도 돼야겠다고 생각해서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해 사범학교 3학년 때 대학 수학 과정까지 끝냈어요.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제가 전 가족을 부양해야 해서 광주에서 고등학교 수학 교사를 했습니다."

―광주의과대학에도 입학했다고요.

"1947년에 수석 입학했습니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계속 가르쳤어요. 의대 출석은 대리로 하고 시험은 선배들 노트를 빌려서 봤는데도 성적이 좋았습니다."

―꿈이 의사였나요?

"아니요. 부모님 뜻이었어요. 저는 사범학교 다닐 때 물리학을 공부해서 퀴리 부인처럼 노벨상을 타는 게 꿈이었어요. 특히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부터는 미국 유학을 가서 원자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원자력 연구로 세계를 지배해보자는 꿈을 꿨습니다."

―그런데 왜 독일 유학을 갔나요?

"1956년 독일 장학재단(DAAD)의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습니다. 우선 독일에 갔다가 3년 후 미국으로 유학 가려고 했습니다."

―부모와 동생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아내와 자식까지 있었는데 혼자서 떠났습니다. 가족들이 말리지 않던가요?

"1959년 3월 27일에 서울 여의도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는데, 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놓지 않았던 게 생각납니다. 우리 가족이 나 없이 굶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더 이상 인생의 꿈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마침 바로 아래 동생이 대학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가족 부양을 맡았지요."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지요. 독일어는 잘했습니까?

"인사만 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어학 공부 없이 바로 수업에 들어갔는데, 의학용어가 정말 어려웠어요. 수업을 들었지만 귀머거리였고 벙어리였어요. 병리학 책을 사서 주말에 아침부터 밤까지 사전 찾아가며 읽었는데 겨우 반쪽 읽겠더군요."

―돌아갈 생각은 안했습니까.

"유학 3개월 만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독일어가 너무 어려워서 의학을 포기하고 이공계로 옮겨 공부하다 귀국하고 싶다고요. 한 달 뒤 답장이 왔습니다. 동요하지 말고 의학 공부를 계속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버지가 별세했다는 전보가 왔습니다. 그 아버지 편지가 유언장이 됐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갔나요.

"아니요. 비행기표를 구할 돈이 없어서 아버지 장례식에 못갔습니다. 당시 의사가 1년을 꼬박 일해야 편도 비행기표를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참 불효막심한 자식이구나' 하고 울었습니다. 여러 날 고민하다 아버지 뜻대로 의학으로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지요."

"내가 있어야 가족도 있다"

그는 1학기가 끝나고 3개월간 수도원에 틀어박혀 1000쪽짜리 병리학 책을 읽었다. 하지만, 몸무게가 45㎏으로 주는 등 몸이 쇠약해졌고, 1960년 봄 급성간염에 걸렸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돼 위험한 지경까지 갔고, 1961년 3월까지 1년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그래도 의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1962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국가시험에도 합격했다.

―4년 공부하니까 독일어가 유창해지던가요?

"여전히 저는 대학에서 독일어를 못하는 의학도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사 시험에 합격했습니까?

"구두시험을 볼 때 대부분의 교수가 나에게 '예' '아니요'로만 답하게 했습니다. 해부학 시험을 볼 때는 교수가 백지를 주면서 '너는 독일어를 못하니 흉부와 무릎을 그림으로 그려서 제출하라'고 하더군요. 약자에 대한 동정이었겠지요. 전후 독일에서 의사가 부족했던 이유도 있었고요."

그는 1963년부터 라인강 하류 지방 도시인 두이스부르크의 중소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독일어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수술을 잘해 의사로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종수는 4년 뒤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 의과대학 외과로 자리를 옮겼다.

―왜 옮겼나요?

"지방이 아니라 중앙에서 학문으로 독일을 지배해 보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본 대학에서 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던가요?

"월급을 쪼개 한국으로 보냈는데, 당시 대학병원 월급은 지방병원보다 많이 적고 특히 외국인은 독일인의 절반만 줬습니다. 그때 동생 둘을 독일로 불러 유학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들한테 '대학 병원 월급으로는 더 이상 지원해 줄 수 없으니 각자 살길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가혹했군요.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환자 중에 모 은행 지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포로가 됐다가 살아남았는데 저한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가 있어야 가족이 있다. 당신이 살아남는 데 먼저 최선을 다하라'고요."

▲이종수(왼쪽) 교수와 그의 은사였던 귀트게만 본 의대 외과 과장. 귀트게만 교수는 1982년 12월 세상을 떠날 때 “내 조의금을 이종수 교수가 간 질환 연구에 쓰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오른쪽은 1969년 이 교수에게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남자(오른쪽)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

독일 최초의 동양인 의대 종신교수

당시 본 의과대학 외과에는 병상 400개, 의사 100명이 있었으며, 복부외과·심장외과·비뇨기과·부상외과 등 모든 외과 치료를 총괄했다. 그는 "본 대학에서 처음 독일 상류층의 '팔꿈치 사회(Ellbogen Gesellschaft)'를 접했다"고 했다. "독일 대학 입학을 위한 김나지움(중등교육기관)에선 학생들에게 팔꿈치 경쟁에 대해 가르칩니다. 경쟁자를 팔꿈치로 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요. 본 대학 의사들은 예전처럼 저를 동정해 주지 않았어요. 나한테 '너 같은 촌놈이 뭘 알아' 욕을 하며 따돌렸지요. 교수가 되려면 연구팀에 들어가서 논문을 써야 하는데, 어느 팀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극복했나요?

"어느날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학회에 참석했는데, 본 의대에서 한 번도 면담을 못했던 '왕'을 만났습니다. 본 의대 외과 과장이자 종신교수였던 귀트게만 교수였습니다. 그에게 간이식 연구를 해서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귀트게만 교수는 '외국인도 교수가 될 수 있어. 좋은 연구를 해서 국제의학지에 발표해. 그리고 발표된 논문을 내 책상 위에 갖다 놓으면 되지. 나는 못했다는 이유는 듣고 싶지 않아'라고 하더군요."

―귀트게만 교수가 도와주던가요?

"전혀요. 오히려 내 얘기에 힌트를 얻었던지 빈에서 돌아온 뒤 간이식 연구팀을 조직했는데 나를 끼워주진 않았습니다."

―섭섭했겠습니다.

"아닙니다. 귀트게만 교수도 다른 독일인 눈치를 봐야 했을 테니까요. 나는 그때부터 어떻게든 과장 눈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귀트게만 교수가 회의 시간에 '새 치료법이 발표됐는데 그것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나' 물어보면 도서관에서 논문을 찾아서 밤새도록 요약한 뒤 독일 학생에게 교정을 봐 달라고 해서 그다음 날 과장에게 전했습니다."

―어떻게 간 연구를 시작했습니까?

"따로 박사 과정 학생들을 모아서 몰래 실험을 했습니다. 수술기구 지원을 못 받으니까 훔쳤습니다. 실험용 동물을 배당하는 담당자에게 밥을 사 주고 개를 얻어냈습니다. 밤 9시까지 환자를 돌보다 새벽에 실험을 하니 근무시간에 조는 경우가 많았지요."

헬무트 콜 총리의 친구

이종수는 1968년 개의 간 이식수술에 이어, 1969년 6월 뇌사자로부터 간을 떼어내 30세 환자에게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했다. 유럽 최초였다. 1975년 드디어 본 의과대학에 신설된 이식과 과장이자 종신교수가 됐다. 그가 꿈에 그리던 '왕'이 된 것이다. 그 사이 가족들을 독일로 초청했고 자녀들도 독일에서 키웠다.

―독일 의사들이 '왕' 대접을 해주던가요?

"아니요. 독일 의사들은 내가 종신교수가 되는 걸 끝까지 막으려고 했어요. 의대에선 모든 결정을 다수결로 했는데, 다수결로는 절대 제 권리를 얻어낼 수 없었습니다. 귀트게만 교수가 외과 과장에서 물러나고 정도가 더 심해졌지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정치인의 힘을 빌렸습니다. 독일 모든 대학은 국립입니다. 병원에 내 편이 없으니, 정부에 내 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밀어줬던 사람 중에는 발터 셸 대통령, 헬무트 콜 총리 등이 있었습니다. 콜 총리는 CDU(기독교 민주당) 당수일 때부터 약 20년 동안 저를 지원해줬지요. 가령 병원에서 우리 과 연구예산을 적게 책정했을 때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부탁하면 며칠 뒤 해결이 되는 식이었지요."

―어떻게 사귀었습니까?

"주요 장관, 당 원내대표, 장학재단 사무총장 등을 제 집에 초대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극진한 대접은 자기 집에 초대해서 밤 늦도록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계속 내놓는 겁니다. 독일 부인들은 절대 이렇게 하지 않거든요. 한국 음식을 식탁에 올리면 모두들 또 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국 정치인과 교류도 많았다고요.

"독일 정치인을 움직이려면 한국 정치인도 필요했으니까요.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6년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은 한국 인권 상황에 대해 우려가 많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양국 정상이 만났을 때 독일 측에서 표현을 순화하길 바랐고, 그 부탁을 나한테 했지요. 일이 잘 풀렸는지 전 전 대통령이 만찬장에서 나한테 제일 먼저 다가와 인사하고 이순자 여사에게도 소개시켜 주더군요. 독일 정치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명예박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한국에 부탁한 적도 많습니다."

―의사가 아니라 정치인 같았네요.

"노태우 정부 시절 홍성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독일에 왔을 때였어요. 라인강을 바라보며 함께 포도주를 마시는데 나한테 '이 교수는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정치를 했을 거야' 그러더군요."

―현재 독일·북한 의학협회 회장이기도 합니다. 2001년부터 북한 의사들의 독일 유학을 돕고, 그 공로로 2007년 평양에서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김대중 정부가 관여한 일이지요. 1년에 10명씩 다녀갔는데 현재까지 100명이 넘는 북한 의사들이 독일에서 공부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르웨이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초청받았지요.

"노벨 재단에서 저를 독일 의학계 대표로 부르더군요. 환영만찬장에 가보니 제 자리가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위원들과 동석하는 메인테이블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정치했을 것"

―노벨 의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지요.

"어릴 적 꿈은 이제 묻어야 할 것 같네요."

―그래도 성공한 인생 아닌가요.

"글쎄요. 간 이식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게 간 기증자가 나오는 겁니다. 주로 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진 환자지요. 내 환자를 살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죽기를 바랐던 건 아닌가, 내 공명심 때문은 아니었나 자문한 적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참 무모한 일을 한 것 같아요. "

―딸과 두 아들 모두 독일과 한국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지요. 손자도 의사고요.

"형제 집안까지 합치면 의사가 30명 정도 되지요. 지금 와서 아쉬운 것은 아들 딸이 크는 걸 제대로 못 봤어요. 요새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가장을 보면 부럽더군요. 저는 다시 태어난다면 교수 대신 개업의를 하고 싶습니다."

이 교수는 본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라인바흐 시 작은 마을에 부인과 둘이서 살고 있다. 그가 한국·독일 정치인을 초대해 파티를 열고 자식 셋을 키운 2층 집이다. 이 교수는 "집이 커서 아내가 정원을 가꾸는 게 이제 힘이 들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독일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수필집을 준비 중이다.